#33. 두 번째 오아시스(3)
두 번째 오아시스는 이 차이툰의 모든 사람이 은혜를 입고 있는 식수의 수원지였다.
사람들이 몸을 씻고 가축을 돌보는 물은 궁의 오아시스에서 흘러나왔지만 그들이 직접 마시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하는 물은 모두 이 바위산의 오아시스에서 나왔다.
그래서 두 번째 오아시스는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보호받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괜찮아.”
“하지만…….”
“두 번째 오아시스를 보호하는 것이 헬라임의 자식들인 당신과 나의 의무니까. 그 장소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의무를 행할 수는 없잖아.”
치아린이 들었다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바이샤의 목을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바이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내이자 라누아인 세리아나라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바이샤가 하는 모든 일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었다.
바이샤는 얌전히 안겨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나의 몸을 추슬러 단단히 안고 거침없이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도, 짐승도 다니기 어려워 보이는 길을 어렵지 않게 오르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작게 입을 벌려 감탄사를 흘렸다.
그의 한쪽 팔에 올라앉은 세리아나의 무게는 느껴지지도 않는지 한쪽 손만을 이용해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잡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에 가까웠다.
“무서운가?”
“아, 아뇨.”
“내 라누아께서는 여전히 나를 어려워하시는군.”
“네?”
“뭐든 편안하게 말을 해달라는 소리야.”
편편한 바위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한쪽 팔로만 그녀를 안아 든 탓에 평소 시선이 닿던 높이보다 높은 곳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싫은 것이 있으면 싫다. 무서운 것이 있으면 무섭다.”
“…….”
“좋은 것이 있으면 좋다. 그렇게 말하고 요구해, 세리아나.”
“……네.”
그의 눈을 슬쩍 피해 고개를 숙인 세리아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바이샤에게 매달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그에게 아주 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쟁이인 그녀가 바이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더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천박한 엘라이어의 딸이라 손가락질받으며 자라왔지만 어미의 뻔뻔함은 조금도 물려받지 않은 세리아나였다.
‘이 이상 욕심을 부리면 당신의 신께서 내게 벌을 내릴 거예요.’
모두가 그녀를 헬라임의 가장 사랑받는 딸, 라누아라고 부르지만 정작 세리아나는 여전히 자신을 라젠의 가짜 왕녀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헬라임이라는 이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비로운 신이라 들었지만 ‘가짜’가 자신의 딸 행세를 하는 것을 얼마나 참아 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세리아나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묵묵히 바위산을 오르는 바이샤와 세리아나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가파른 바위산이 점차 완만해져 이내 평지를 드러내는 순간까지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아니야, 이대로 가지.”
바위산 중턱의 평탄한 지역에서 세리아나를 내려놓을까 잠시 고민하던 바이샤는 그녀의 발목에 감긴 하얀 붕대를 곁눈질했다.
그녀를 안고 험준한 바위산도 올랐는데 이까짓 평지쯤은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었다.
‘애초에 무게가 느껴지지도 않고…… 대체 어떻게 해야 살이 붙지?’
이대로 조금만 더 살이 오르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쯤 사냥대회를 혹독하게 치른 세리아나는 금세 이전의 마른 몸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것이 안타까워 그녀에게 많은 음식을 권했던 바이샤는 그의 권유에 묵묵히 음식을 삼키던 세리아나가 크게 체해 한나절을 고생한 이후 음식을 억지로 권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그녀를 살찌울 방법을 찾는 걸 포기하진 않았다.
“무리하지 말아 주세요.”
“……무리?”
분명 자신을 걱정해 하는 말이라는 걸 머리로는 받아들였다.
그러니 지금 그의 미간 사이에 얕은 주름이 파인 건 심적인 문제라는 소리였다.
만약 세리아나가 여기서부터는 혼자 걸어가겠다고 말했다면 그의 반응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보다 두꺼운 팔뚝을 가진 그에게 무리하지 말라니……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의 자존심을 살짝 건드리는 세리아나의 말에 어린 시절에 잠깐 부리다 사라진 치기가 불쑥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체 어느 부분이 무리인지 모르겠지만…….”
“꺄악!”
살짝 가라앉은 바이샤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리아나는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어깨까지 들어 올린 바이샤는 허둥거리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짓궂은 웃음을 터트렸다.
바이샤의 웃음소리에 그가 지금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리아나가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바이샤는 제 얼굴을 감싼 세리아나의 한쪽 손을 살짝 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세리아나, 아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의 남편은 이 사막에서 가장 강한 전사야.”
“아, 알아요. 꺅!”
또다시 비명, 이번에는 아래로 쑥 꺼지는 듯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세리아나는 이번에야말로 원망 가득한 눈빛을 바이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에 홀린 것처럼, 금세 몽롱해진 연둣빛 눈동자에 좀 전까지 깃들어 있던 원망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내 행동 그 어디에도 무리는 찾아볼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마.”
“……네.”
치아린이 곁에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다시 한번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어쩐지 멀리서 치아린의 그런 절절한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건 비밀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세리아나는 다시 얌전히 바이샤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대었다.
바이샤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동안 주변의 풍경이 변해 갔다.
거친 바위틈 사이로 초록색 풀잎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얼마 안 가 울창한 숲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저 황량한 장소라고 생각했었다.
오아시스의 푸른빛에 대조되어 메마른 공간이라 여겼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푸른 빛을 발견한 세리아나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곁에서 바이샤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변을 살피는 세리아나를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
“굉, 장해요.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거친 바위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이런 숲이 있다는 건 아무도 알지 못해. 이곳에 출입이 가능한 건 쿠드라와 라누아, 단 두 사람뿐이니까.”
“야안이나 치아린도요?”
“카얀도 모르지.”
오직 두 사람만의 비밀이라는 말이었다.
비밀이라는 말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된 세리아나의 두 뺨이 핑크빛으로 살짝 물들었다.
바이샤는 그런 세리아나의 몸을 추슬러 더욱 단단하게 끌어안고 숲의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뾰족한 잎사귀와 나뭇가지가 세리아나의 얼굴을 할퀼 수 없도록 손으로 앞을 헤치며 걷는 바이샤의 귓가에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로를 본 적 있나?”
“아니요.”
“그럼 잠깐 들렀다 가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살짝 틀어 걷고 있던 방향에서 조금 빗겨나간 곳으로 걸어간 바이샤는 어느 한 장소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담장을 두른 듯 낮은 벽이 바위 표면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바이샤의 품에서 내려온 세리아나는 조심스럽게 그 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허리에 닿을 만한 높이의 벽 안쪽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가 양팔을 벌리면 꽉 찰 것 같은 너비의 수로였다.
높이 쌓은 벽보다 한참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 물을 바라보던 세리아나의 눈동자에 의문이 깃들었다.
“짐승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벽을 쌓은 거야.”
세리아나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아차린 바이샤가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의문을 풀 수 없었던지 세리아나가 질문했다.
“그럼 그 짐승들은 어디에서 물을 마시나요?”
“수로 외에도 가느다란 물줄기는 존재해. 대부분 힘센 놈들의 차지지만. 힘 있는 것들에게 밀린 약한 것들은 아래의 오아시스로 내려가 목을 축이지.”
“그렇군요.”
오아시스에선 사냥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막의 금기이자 차이툰의 규칙이었고 오랜 학습과 본능으로 사막의 짐승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혹은 사냥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아시스를 찾았다.
그러나 사방이 트인 오아시스는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오아시스에서 사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규칙이었고 조금 게으르고 사나운 포식자는 쉬운 사냥감을 선택하는 법이었다.
물가에선 제법 빈번하게 그런 사냥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짐승들은 물이 잔뜩 고인 오아시스보다도 가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목을 축이는 것을 선호했다.
이 수로를 처음 생각해 낸 인간은 그런 물줄기를 찾는 짐승들로부터 수로를 깨끗하게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특별한 것을 수로 안쪽에 설치했다.
그래서 그리 높은 벽이 아니었음에도 짐승들은 암만 목이 말라도 수로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 수로를 살피던 세리아나는 아래로 흐르고 있는 물줄기 아래 반짝이고 있는 그 특별한 ‘어떤 것’을 발견했다.
안쪽 벽의 아랫부분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푸르게 빛나고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본 세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저건 뭔가요?”
“아, 그건 직접 보는 게 좋을 거야.”
연둣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것을 확인한 바이샤가 웃는 얼굴로 다시 세리아나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수로에서 조금 빗겨 난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떠한 지표를 찾아볼 수 없는 길이었지만 바이샤는 익숙한 길을 걷는 듯 망설임 없이 발을 움직였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세리아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까먹을 때쯤 바이샤는 걸음을 멈추었다.
거대한 동굴 앞이었다.
세리아나가 눈을 크게 뜨고 안쪽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암흑만이 두 사람을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뭔가 있나요?”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해.”
“저 안으로요?”
“무서운가?”
“……조금이요.”
바이샤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세리아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만약 자신의 전사가 이런 위축된 모습을 보였더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전사가 아니더라도 사막에서 태어난 차이툰의 사람이 고작 이 정도의 어둠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매달려 긴장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티 내는 이가 세리아나였기에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그와 결혼한 이상 그녀도 사막의, 차이툰의 사람이었으나 세리아나에게만큼은 바이샤가 세워둔 모든 기준이 의미가 없어졌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세리아나 앞에 모든 경계를 허문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럼 잠깐 눈을 감고 있는 건?”
“눈을요?”
“약속하는데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멋진 장면을 보게 될 거야.”
아주 잠시 고민하던 세리아나는 곧 눈을 질끈 감으며 바이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의 가슴과 그의 왼쪽 가슴이 맞닿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얇은 옷감을 넘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고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알아보기 힘든 어둡고 어두운 길이었지만 마치 산책로를 걷는 것처럼 그의 걸음엔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던 세리아나는 어느 순간 바이샤의 걸음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아니면 잠시 쉬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눈뜨기를 망설이던 그때 바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나, 눈을 떠.”
“도착했나요?”
“그래.”
바이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크게 심호흡한 세리아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은 어느새 밀려나 주변이 환했다.
그와 마주 본 채 안겨 있는 자세인지라 바이샤가 걸어온 어두운 길 쪽으로 눈을 떴던 세리아나는 자신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푸른빛에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와아……!”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천장에 난 거대한 동공으로 환한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리만치 깨끗한 물이 가득한 호수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푸른색의 투명한 돌들이 벽과 호수 바닥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커다란 구멍으로 쏟아진 빛은 그 푸른 돌 사이사이에 뿌려져 동굴 안쪽을 푸른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라옴-디세나. 무슨 뜻인지 아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세리아나를 내려다보며 바이샤가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