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32화 (32/110)

#32. 두 번째 오아시스(2)

치아린이 물러가고 세리아나의 이마와 양쪽 볼에 쉼 없이 입을 맞추던 바이샤는 부끄러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아내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조금씩 오르던 살이 사냥대회 이후 급격하게 다시 내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심은?”

“함께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 라누아께선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해주시는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알아. 그냥 라누아께서 하는 모든 말이 내 마음에 차는 것이겠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는 세리아나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춘 바이샤가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시녀들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점심으로 먹기에는 조금 과한 양이었다.

“당신이 아직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한 것 같아 준비할 수 있을 만큼만 준비했어. 조금씩 먹어보고 맛있는 걸 찾으면 좋겠군. 너무 과일만 먹어도 몸이 축나니까.”

“감사해요.”

“너무 무리해서 먹지는 말고. 그러다 체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여전히 세리아나를 품에 안은 채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위치에 있는 접시를 두 사람 앞으로 당기며 바이샤가 말했다.

그의 배려에 가슴 안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던 세리아나는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지쳐 버렸다.

아주 조금씩 접시 위의 음식을 오물거렸지만 접시의 수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그녀 기준으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탓에 호흡까지 조금 거칠어진 세리아나를 바이샤가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항복인가?”

“어제보다 더 많이 먹은걸요.”

“속이 더부룩하진 않고?”

“조금 움직이면 소화가 되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마치 그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놀란 세리아나가 저도 모르는 사이 손을 뻗어 바이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바이샤?”

“식후에 가벼운 산책 어때?”

“산책이요?”

“단둘이서만.”

만약 치아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단호하게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라고 답하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걱정했듯 세리아나는 단 한 번도 바이샤의 말을 거부해 본 적이 없었다.

치아린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그게 조금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바이샤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물어오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어버린다.

문제는 바이샤도 세리아나의 그런 문제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갈까?”

제대로 된 허락의 말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안은 채 성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그러했듯 자연스럽게 문이 아니라 오아시스로 향해 난 창문 쪽으로 걸어간 그는 가벼운 동작으로 창문을 넘어 오아시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리아나도 그런 그의 움직임이 익숙한 듯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어제와 같으면서도 다른 오아시스의 풍경을 살피고 있었다.

“어?”

그러다 어느 순간 주변의 풍경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리아나가 깜짝 놀라 바이샤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설명하는 대신 그녀의 머리에 입술 꾹 눌러 입을 맞출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당신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오아시스에 아직 그런 곳이 남았나요?”

“설마 이제껏 보아온 부분이 오아시스의 전부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의 말에 세리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바이샤가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가는 곳은 치아린에겐 비밀이야.”

“……위험한 곳에 가나요?”

“세리아나, 나의 여왕. 당신은 당신의 남편을 아직도 모르는군. 이 오아시스에 내게 위험한 게 있을 것 같나?”

“아니요.”

세리아나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살짝 미간 사이를 찌푸렸던 바이샤는 그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금세 기분이 풀린 듯 미소지었다.

세리아나와 함께 있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아직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치아린이 들으면 상처도 다 아물지 않은 당신을 데리고 거기까지 움직였냐며 한 일주일 정도는 쉬지 않고 잔소리할 것 같아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일주일…… 네, 절대로 말 안 할게요.”

이 부부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치아린의 잔소리를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싫어하는 쪽은 바이샤였고 세리아나는 조금 무서워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치아린의 애정 어린 잔소리만큼은 되도록 피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오아시스를 건너갈 거야.”

“네?”

“바위산에 있는 두 번째 오아시스, 보고 싶지 않아?”

어느 장소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품에서 내려놓으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방에서 창을 통해 곧장 이동한 탓에 두 사람은 모두 맨발이었다.

세리아나는 발바닥 아래 부드럽게 뭉개지는 젖은 모래를 느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창가에서 바라보던 오아시스와 다르게 키 큰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장소였다.

다른 말로 하면 무언가를 숨기기 딱 좋은 위치랄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세리아나는 바이샤가 수풀 사이에 숨겨놓았던 어떤 것을 끌고 나오는 것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배?”

폭이 좁고 기다란 조각배였다.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저것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어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배 안에 쌓인 낙엽과 마른 풀잎을 제거한 바이샤가 배를 오아시스 위에 띄웠다.

“세리아나, 이리로.”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조금 망설이던 그녀가 곁으로 다가오자 바이샤는 한쪽 팔을 세리아나 무릎 뒤에 넣어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세리아나가 깜짝 놀라 바이샤의 얼굴을 끌어안아 버렸다.

“적극적인 건 마음에 들지만…… 앞이 안 보이는데?”

“앗! 죄, 죄송해요!”

“너무 갑자기 멀어지지는 말고. 그러다 떨어질지도 몰라.”

“네, 네…….”

세리아나의 두 손이 자신의 어깨를 꽉 붙든 것을 확인한 바이샤가 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오아시스의 수면이 그의 움직임에 급하게 일렁이며 위에 비친 햇빛을 잘게 쪼개었다.

물이 어느 정도 깊어지자 세리아나의 옷자락이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인 바이샤가 뱃머리를 몸에 바싹 붙이듯 붙잡아 당겼다.

그리고 세리아나의 몸을 조심스럽게 배 안쪽에 내려놓은 후 자신은 배의 끝머리 쪽으로 다가가 순식간에 배 안으로 뛰어올랐다.

좁은 배 위에 오르는 동작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여 그것이 별것 아닌 듯 느껴질 정도였다.

“이 배는 뭔가요?”

배가 뒤집힐까 조심스럽게 움직여 바이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세리아나가 옷자락으로 그의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으며 질문했다.

사막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굵은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파서 만든 배는 이 사막의 오아시스에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직접 만든 거야.”

“직접이요?”

“바닷가에 떠밀려 온 통나무 하나를 주웠거든. 바다를 가로지르는 무역선에서 떨어져 나온 게 아닐까 싶지만…… 어쨌든 주인 없이 떨어져 있길래 주워다가 배를 만들었지.”

장정 두 사람이 붙어야 간신히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의 두께를 가진 통나무를 짊어지고 옮기느라 카얀과 함께 고생했던 것을 떠올린 바이샤가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하필이면 호위전사들까지 물리고 카얀과 단둘이 나섰던 길이라 교대할 인원도 없이 이 두꺼운 나무를 들고 몇 날 며칠을 걸어야만 했었다.

“사막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반을 잘라 한쪽은 속을 파내고 겉을 깎아 배를 만들고, 남은 한쪽으로는 노를 만들었지.”

세리아나의 젖은 소매에 입을 맞춘 바이샤가 앉은 자세 그대로 배의 가운데 부분으로 움직였다.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는 세리아나의 몸을 돌려 그녀의 등이 자신의 가슴에 닿도록 끌어안은 바이샤가 오직 그만을 위해 만든 듯 보통의 것보다 한참은 더 길고 두꺼운 노를 배의 바닥에서 집어 들고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굴 태울 생각이 없어서 일인용으로 만들었거든.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네, 저는 괜찮아요.”

노 하나를 양쪽으로 부지런히 저어 배를 움직이는 바이샤의 움직임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세리아나가 답했다.

그녀는 지금 노를 세게 움켜쥔 거친 저 손이 자신을 어루만질 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힘을 주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저를 품을 때마다 세리아나는 마치 그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아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혼자 상상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까. 그냥 아주 잠깐 상상만 하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욕심을 부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녀는 혼자만의 작은 욕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두 손을 모아쥐고 일부러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평소 두 사람이 치아린 몰래 산책을 즐기던 오아시스의 가장자리가 멀리 한눈에 들어왔다.

바이샤는 사방이 트인 공간을 좋아했다.

그의 호위를 맡은 전사들이나 카얀에겐 불행한 일이었으나 바이샤는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궁 안이 아닌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세리아나와 함께하는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분에 세리아나는 그녀의 방에 난 창을 통해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길지 않은 길을 이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발로 걸어서 움직여 본 것은 몇 안 되지만 오아시스로 향하는 길에 난 작은 풀 하나하나의 이름을 알았고 어제는 맺히지 않았던 꽃망울이 오늘은 꽃을 피웠다는 사소한 변화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세리아나가 모르고 있는 것은 그녀도 누군가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 뿐이었다.

“도착했군.”

세리아나가 익숙한 장소를 눈으로 훑는 사이 작은 배는 목적지에 도착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이샤는 품에 안고 있던 세리아나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배에 올라탈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배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배가 멈추기는 했지만 바이샤의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는 그 상태로 뱃머리를 잡고 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배를 천천히 끌며 걸어가는 바이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모래톱까지 걸어 나온 바이샤는 배를 물 밖으로 완전히 끌어낸 후 그때까지도 얌전히 배 안에 앉아 있던 세리아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반항하듯 작게 몸을 바둥거렸다.

“왜 그러지?”

“무거워서 힘드실 거예요.”

“당신의 몸이 무겁다는 건 동의 못 하겠는데? 아직도 한참은 더 살이 올라야 해.”

그의 말에 곧장 움직임을 멈추고 제 발끝을 바라보는 세리아나를 보며 바이샤는 그녀 모르게 이맛살을 구겼다.

그의 아내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누군가의 명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여성의 발언권이 약한 라젠이라지만 일국의 왕녀가 가지기엔 어딘가 미심쩍은 모습에 잠시 눌러두었던 의문이 다시 머리를 치켜들었다.

‘아직 멀었던가?’

라젠의 수도에는 금화와 보석을 밝히는 이들이 많아 스며들 구멍은 많았다.

그러나 단절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사람을 심고 원하는 만큼의 정보를 모으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놓쳤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그가 놓친 그 무언가가 세리아나의 과거에 있고 그것이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뒤늦은 생각이지만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세리아나의 과거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로도 짐작할 순 있는 사실이었지만 차이툰을 야만족의 국가라 매도하는 라젠에서 선뜻 내어놓은 왕녀의 처지라는 것이 뻔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미리 생각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바이샤는 세리아나에게 라누아로서 그녀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고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리라 맹세했다.

그의 존중과 최선은 그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이샤는 최대한 빠르게 그가 놓치고 만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오아시스의 숲속을 헤치며 걷던 바이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세리아나를 한쪽 팔로 옮겨 안았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바위산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거친 산을 오르기 위해서라면 세리아나를 내려놓는 것이 더욱 좋은 방법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작은 발이 땅에 닿는 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허락했다 치더라도 오아시스 근처의 단단한 평지만 허락했을 뿐 그녀가 다친 다리를 움직여 직접 바위산에 오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세리아나는 자신을 안은 채로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한 바이샤에게 질문했다.

그의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그의 목을 바짝 끌어안은 덕분에 세리아나의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이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 바위산에 두 번째 오아시스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네, 치아린과 야안에게 들었어요. 신성한 곳이라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라고…….”

“거기에 가는 중이야.”

“네?”

아무렇지도 않게 행선지를 밝히는 바이샤의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성지이자 금역.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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