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두 번째 오아시스(1)
상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아물어 갔다.
세리아나는 많은 이들의 보살핌 속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크게 다쳤던 치아린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고 호위전사들도 정식으로 붉은색 베일을 받아 얼굴을 가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적어도 세리아나가 느끼기엔 그랬다.
“그렇게까지 노력하실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응?”
새장 안에서 울고 있는 아로를 달래고 있던 세리아나가 치아린의 혼잣말에 반문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음을 알아차린 치아린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라누아. 혼잣말이었어요.”
“그래?”
세리아나는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 고개를 끄덕이며 따져 묻지 않았다.
그 모습에 새어 나올 뻔한 한숨을 가까스로 삼킨 치아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라누아는 완벽할 필요가 없었다.
완벽해지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라누아는 라누아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막에서 쿠드라와 더불어 가장 완벽한 존재였다.
그녀의 주인은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다른 곳에서 나고 자라셨으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실 거야.’
지금 그녀의 주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치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삐이-”
“답답하니? 잠깐 나와 있을까?”
좁은 새장 안에서 두 발로 콩콩거리며 뛰고 있는 쿠락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에게 칭얼거리듯 세리아나 앞에서 울어댔다.
세리아나는 그런 쿠락, 그러니까 이젠 아로라는 이름을 가진 새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낮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계속 바이샤의 손을 쪼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삐, 삐-!”
“새장이 싫으면 바이샤에게 상냥하게 굴어야 해, 아로.”
마치 세리아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끝에 부리를 비비는 아로를 치아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주인 앞에서 본색을 숨기는 건 바이샤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저 라누아의 전령이라 불리는 새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쿠드라를 경쟁 상대로 생각한 모양인데요.”
“그럴 리가.”
“사내의 질투는 제법 유치하답니다, 라누아.”
“아로는 아직 어리잖아. 그리고 쿠드라께서 질투라니…….”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린 세리아나 곁으로 검은색으로 온몸을 칭칭 감싼 시녀 하나가 다가왔다.
그녀가 아로에게 주기 위해 따로 손질한 고기를 담은 작은 접시를 건네자 세리아나가 웃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쿠드라께서 유치한 일을 하실 리 없어.”
“라누아께선 쿠드라를 너무 좋게만 보세요. 암만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지만…… 라누아께선 쿠드라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구요.”
“그게 문제가 돼?”
“네! 문제가 됩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주기만 하지 마시고 받아오기도 하셔야죠! 그렇게 무작정 퍼주기만 하시면 조만간 라누아의 가슴속이 텅하니 비어 버릴 게 분명해요.”
“야안은 마음이라는 건 한껏 퍼주어도 늘 새롭게 채워지는 것이라고 하던걸.”
“할망구가 무슨 헛소릴!”
아로에게 잘게 자른 고기 한 조각을 핀셋으로 건넨 세리아나가 그런 치아린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리아나는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내어줄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사막에서의 조난이, 그리고 아눌라의 도발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기회라는 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에게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가짜라도 이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그 마음을 표현할 기회와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고기를 조르는 아로에게 고기를 하나를 더 넘겨준 세리아나는 애교를 부리는 아로의 작고 둥근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오아시스의 궁으로 돌아온 아로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치료사의 말에 따르면 둥지를 옮기는 시기의 어린 새라고 했다.
아마 날개를 다쳐 이동 능력을 잃은 아로를 어미가 포기한 것이리라. 세리아나는 이것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어린 생명을 돌보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쿠락은 ‘라누아의 전령’으로 불리는 새였기에 아로를 거두겠다는 세리아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사소한 문제라면 바이샤와 아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다치지 않은 한쪽 날개를 파닥거리며 세리아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아로는 바이샤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다툰다고 해봐야 아로가 일방적으로 덤벼들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삐이- 하며 우는 아로를 품에 안고 달래는 세리아나 덕분에 바이샤와 아로의 다툼은 무승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약은 녀석.”
“누구? 아로가?”
“네.”
“오해야, 치아린. 아로는 그냥 조금 똑똑한 것뿐인걸.”
세리아나의 대답에 치아린이 결국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낮에는 어쩔 수 없이 세리아나와의 시간을 나눠 쓰고 있지만 밤에는 절대로 그 시간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바이샤 덕분에 매일 밤 아로를 돌보는 것은 치아린의 몫이었다.
저 작고 사나운 새가 밤이면 얼마나 고집불통으로 구는지 알고 있는 치아린은 제 주인의 품 안에서 애교를 떠는 아로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본디 쿠락은 밤에 활동한다.
그러나 저 작은 새는 본능을 어기고 낮에 깨어 제 주인에게 아양을 떨고 밤엔 수면 부족의 까칠함을 전부 치아린에게 풀고 있었다.
그러니 이가 갈리지 않겠는가?
아로뿐만 아니라 바이샤도 세리아나 앞에서는 제법 얌전한 척 굴고 있었다.
그 사나운 왕께서 그의 여왕 앞에서만은 어찌나 부드러운 사내가 되는지…… 아마도 라누아께선 사나운 짐승을 얌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닐까?
치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치아린?”
“때로는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응?”
“그나저나 라누아. 오늘도 활 연습은 쉬시는 건가요?”
“아, 응. 쿠드라께서 무리를 하니 상처가 더디게 아무는 거라고 하셔서…….”
“진짜 속내는 그게 아니겠지만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얼굴을 붉혔다.
치아린이 알고 말한 것인지 그냥 해보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찔리는 것이 있었다.
[당분간 활 연습은 그만둬. 다른 곳에 체력을 낭비하니 상처가 더디게 아무는 거야. 활쏘기에 할애할 체력이 있다면 나에게 양보하라고. 당신의 남편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는 거…… 알아?]
며칠 전, 세리아나의 귀 끝을 아프지 않게 앞니로 물며 음흉한 속내를 훤히 드러냈던 바이샤를 떠올리니 온몸에 열이 올랐다.
호박색 눈동자 가득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지만 두 손은 얌전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더랬다.
등 뒤로 닿은 그의 욕망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바이샤는 귀 끝을 깨무는 것 외엔 그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내도 조만간 끝이 날 것이다.
세리아나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는 발목을 바라보았다.
흉은 남았지만 거의 다 아문 상처에선 이제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쿠드라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어여쁜 분을 곁에 두고 얌전히 주무시기만 하시다니. 이런 곳에서 쿠드라의 인내심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되네요.”
세리아나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없는 치아린은 목욕 시중을 들며 보았던 세리아나의 깨끗한 피부를 보며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
첫날밤 이후 바이샤가 라누아의 방을 찾을 때면 세리아나의 피부는 늘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기에 짐작 못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오늘은 무엇을 하실 건가요? 오늘은 야안의 수업도 없는데요.”
온몸을 붉게 물들인 세리아나의 상태를 모르는 척 치아린이 질문했다.
“쿠드라께서 점심 이후의 시간을 비워두라고 하셨어.”
“흐음, 뭔가 불길한데요?”
“응?”
“아니요. 어렸을 적부터 쿠드라께서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으면 가끔 이렇게 느낌이 오곤 했거든요. 한동안은 얌전했는데 말이죠…….”
마치 말썽꾸러기 막냇동생을 대하는 듯한 치아린의 말투에 세리아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아로가 꽁지를 살랑거리며 다가와 부리 끝을 그녀의 손가락에 비비기 시작했다.
세리아나의 관심이 제게서 멀어지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라누아, 따라 해보세요. 싫어요.”
“치아린?”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시,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이건 왜?”
“오늘 쿠드라께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방금 따라 하신 그대로 말씀하세요.”
치한을 쫓을 때나 쓸법한 말을 알려주며 바이샤에게 써먹으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치아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오늘은 한숨을 자주 내쉬는 것 같았다.
“라누아는 쿠드라의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셔서 문제라구요.”
“……그건…….”
“네, 네. 라누아께선 쿠드라를 너무 사랑하시어 그러시는 거죠. 평소 때라면 저도 말리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라누아께선 활을 잡는 것도 금지당하신 휴식이 필요한 환자랍니다. 쿠드라께서 라누아께 나쁜 일을 하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다 나으실 때까지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
“…….”
“그러니 오늘 쿠드라께서 무엇을 하자 하시면!”
“싫, 어요?”
“그리고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네, 잘하셨어요!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세리아나는 대답하는 대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치아린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치아린은 거짓말이라도 그러겠다 대답하지 못하는 세리아나를 보며 다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다.
순진한 그녀의 주인이 오늘도 쿠드라에게 휘둘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치아린. 또 라누아께 내 험담을 하고 있었나 보군.”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조아리는 시녀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는 세리아나 곁으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매섭게 눈을 치켜뜬 아로를 달랑 들어 치아린의 품으로 던져 버렸다.
“털갈이도 간신히 끝낸 어린놈이 누구를 탐내는 건지.”
세리아나 곁에 털썩 주저앉아 보란 듯이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품으로 끌어당긴 바이샤가 미소지었다.
세리아나 앞에서 사납게 구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은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바이샤를 노려보는 아로와 그런 작은 새 한 마리와 다투려 하는 바이샤를 번갈아 보며 치아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바이샤에게 유치한 면이 있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탓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새 한 마리와 세리아나를 나누어 가지기 싫어 저리 심술을 부리는 모습까지 보게 될 줄은 몰라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쿠드라. 남자의 질투는 보기 흉하답니다.”
“내가 새 한 마리를 상대로 질투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려구요?”
“그럴 리가. 절찬리에 질투 중이니 저 건방진 새를 데리고 물러가도록. 나는 내 라누아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당당한 얼굴로 저와 아로를 쫓아내려 하는 바이샤를 보며 치아린은 아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위가 지위이고 태어나고 자란 환경 탓에 그가 다소 뻔뻔한 성격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기에 더 있었다간 무슨 불충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으니 물러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아로도 챙기고.”
“……네.”
바이샤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리아나에게 한 번 더 주의하라고 경고할 생각이었던 치아린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을 선택했다.
일단 가증스러울 정도로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아로를 제 방에 데려다 놓은 다음, 카얀을 만나 지금 일을 설명하고 하소연을 할 생각이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방을 나오자마자 부리로 날 쪼는 건 반칙이다?”
“삐이-!”
“……빨리 카얀을 만나야겠어.”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당장 세리아나에게 저를 데려다 달라는 듯 부리로 그녀의 팔뚝을 쪼기 시작한 아로를 보니 어쩐지 억울해졌다.
심술을 부린 건 바이샤인데 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억울하면 빨리 나으렴. 그럼 네 날개로 날아 라누아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더불어 바이샤의 팔뚝을 지금처럼 콱콱 쪼아줘도 좋고. 어린아이 몸통만 한 단단한 팔뚝에 암만 사납게 부리질을 해봐야 스치는 흔적 하나 남지 않을 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로의 사정이었다.
“쥬드.”
“네, 치아린.”
치아린의 부름에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라누아의 홀에서 세리아나의 호위를 맡았던 전사 중 한 사람이었다.
붉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치아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제 위치에 익숙해졌나?”
“네, 모두가 숙지했습니다.”
“좋아, 쿠드라께서 라누아와 시간을 보내고자 하신다. 쿠드라의 호위전사들과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경호하도록 해.”
“네.”
“쿠드라의 명이 있어 나는 자리를 비울 거야, 내가 없으면 네가 머리다. 알고 있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라누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여. 내게 사람을 보내는 건 그다음이야.”
“네.”
쥬드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치아린은 방 안쪽에서 들려오는 세리아나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치아린의 모든 것은 세리아나를 위한 것이었고 그녀가 그녀의 주인을 향해 존경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만 좀 쪼아. 내게 상처라도 남으면 그길로 라누아께 달려가 네가 한 짓을 전부 고할 테니까.”
“삐이-”
“얄미운 녀석, 바로 멈추네. 너 사실 여우로 태어나야 했던 거 아니니?”
“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눈을 반짝이는 아로의 턱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은 치아린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누아는 쿠드라의 곁에 있으니 안전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움직이는 치아린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