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30화 (30/110)

#30. 사냥대회 (11)

세리아나의 침묵에 아눌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명인지 말씀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아니면 제가 라누아의 속내를 전부 파악해 말씀을 올려야 하나요?”

“내 명이 무엇인지는 지금쯤 시카에 전해졌을 테니 그대의 아비에게 들으라.”

“직접 전할 수 없는 명이라니. 내키지 않는군요.”

“그대가 내키지 않는다 하면 내가 명을 거두고 사과라도 해야 하나?”

“그럴 리가요.”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사실 세리아나는 아눌라와 한 공간에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아눌라의 적의는 본래부터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시선에 예민한 세리아나를 아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이미 시카에 명을 전하셨다면 저는 어찌 부르셨나요? 시카의 아눌라는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세리아나는 아눌라에게 들키지 않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말처럼 세리아나는 아눌라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녀를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여기에 직접 부른 것은 이 말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 차이툰으로 와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

“나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내 사람만큼은 지키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거라고 믿는다.”

“글쎄요.”

“쿠드라께서 결정하셨으니 이번 일은 이대로 묻을 것이다. 하나,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쿠드라의 자비는 없을 것이고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을까?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바이샤의 것처럼 크고 단단했기를 기도하며 경고했다.

“라누아께서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시카는 쿠드라께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론 내게도 그 충성을 보였으면 하는군.”

“……물론입니다.”

마지못해 답하는 아눌라의 눈이 번뜩였다.

“그런데 라누아. 당신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하셨나요?”

“그래.”

“이미 당신 때문에 불행해진 자가 있다면요?”

세리아나는 숨을 삼켰다.

아까보다 날카로워진 아눌라의 눈빛이 그녀의 피부를 찌르고 할퀴는 기분이었다.

“라누아께 무례한 자, 그 자리에서 목을 잘라도 좋다는 쿠드라의 명이시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까지 모습을 숨기고 있던 세 번째 호위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눌라의 시선이 세리아나에게 닿지 않도록 선 전사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눌라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물러나거라.”

“네, 라누아.”

아눌라의 시선을 막아준 호위 전사를 물리며 세리아나가 티 나지 않게 심호흡했다.

만약 그 순간 숨어 있던 호위 전사가 앞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아눌라 앞에서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누가 불행해졌지?”

“그냥 여쭈어본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지는 않겠지만.”

“보상이라…… 알겠습니다. 잘 기억해 두지요.”

세리아나는 아눌라가 말한 ‘불행한 자’가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눌라가 말한 불행은 바이샤 곁에 서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바이샤는 그 누구도 마음에 품은 적 없다고 치아린이 말해주기는 했지만 그를 사랑하는 여인은 아눌라 외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자신으로 인해 그녀들이 불행해졌다 하더라도 바이샤의 옆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냥…… 내 사람들의 행복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니까.’

이기적인 생각이라 누군가는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인간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불행해진 이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주는 것뿐이었다.

아눌라가 저지른 죄를 이쯤에서 눈감아 주는 것 역시 그 보상과 조금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세리아나의 목숨을 노린 것은 바이샤를 사랑해서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다른 여인이 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 세리아나는 애써 아눌라를 이해하려 노력 중이었다.

“그럼 시카의 아눌라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라누아의 명을 하루라도 빨리 이행해야 하니까요.”

“……그래.”

“물러가기 전 제가 라누아께 충고 하나를 해드려도 될까요?”

“무엇이지?”

“쿠드라의 위엄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렇게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봐야 우스워 보일 뿐이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눌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세리아나를 비웃으며 라누아의 홀을 벗어났다.

세리아나는 그런 아눌라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들켰다. 그렇게 안간힘을 썼음에도 아눌라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바이샤처럼 행동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던 걸까? 이곳에서도 라젠에서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 아니야. 나는 이제 시작인걸.’

그녀는 라누아로 말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 그래서 흉내 내는 법을 택했다. 어설픈 시도였고 들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눌라의 비웃음이 가슴을 찌르는 듯했지만 세리아나는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야안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고 치아린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 배우면 된다.

‘나는 할 수 있어.’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을 비웃지 못하도록 열심히 배우자. 그래서 이 사막의 진짜 여왕이 되자. 세리아나는 주먹을 움켜쥐며 그렇게 다짐했다.

“라누아, 괜찮으십니까?”

“응, 나는 괜찮아. 혹시 치아린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분께선 열심히 회복 중이십니다.”

“응? 열심히?”

“네! 전투적으로 회복에 힘쓰시는 중입니다.”

호위들이 정식으로 선별되면 그들을 관리하게 되는 것은 치아린이었다.

쉽게 말해 예비 대장이라고 부르면 될까? 자신들이 상관으로 모시게 될 이의 소식쯤은 알고 있을 것 같아 가볍게 물은 것인데 조금 무서운 대답이 돌아와 세리아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대체 전투적으로 회복에 힘쓰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모르는 채 넘어가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제는 제법 쓸 만한 예감이라는 것도 가지게 된 세리아나는 다시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릴 리 없는 바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당신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그래서 누구도 감히 당신의 옆자리를 탐내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들 거예요.’

* * *

라누아의 홀에서 나와 곧장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아눌라는 누라비를 찾아갔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궁에서 온 서신을 읽고 있던 그는 말없이 딸을 맞이하며 곁에 서 있던 파라간에게 눈짓했다.

아비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빠르게 눈치챈 파라간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서신을 받아 제 누이에게 전달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당장이라도 허리에 걸친 채찍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아눌라의 성미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그 말라깽이 계집애가 시킨 겁니까?”

“아눌라, 말을 조심하거라. 라누아시다.”

“고작 라젠의 왕녀 따위를 라누아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눌라.”

낮은 목소리로 질책하는 아비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아눌라가 이를 악물었다.

파라간은 그녀의 손에 들린 두꺼운 종이가 구겨지는 것이 꼭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저딴 여자를 라누아로 맞이하라 쿠드라께 말씀을 올리신 거지요? 라누아의 자리는 제 것이었습니다!”

“차이툰 안팎으로 우리 시카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너를 라누아 후보에 올렸다간 쿠드라의 왕국에 분열이 생겼을 거다.”

“그깟 머저리들이 무어라 생각하든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써야 한다. 너는 시카의 후계자니까.”

“아버지!”

“잊지 마라, 아눌라. 너는 시카의 다음 족장이다. 어떤 것이 시카에 가장 이로운 선택인지를 생각해야 해. 그리고 또 잊지 마라. 우리는 쿠드라께 충성을 맹세했다. 모든 선택의 끝에는 그분과 차이툰이 있어야 한다.”

누라비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눌라는 밖으로 뱉어 내려던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그녀의 아비는 야망이 부족했다.

다른 부족들이 뭐라 지껄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쿠드라의 발등에 가장 먼저 입을 맞춘 이후 그분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된 것은 시카였다.

그리고 시카는 다른 부족의 머리 위에 서기에 충분한 공을 세웠다.

그렇다면 누려야 했다.

모든 것을!

‘쿠드라 아래 무릎을 꿇었다고 모두가 똑같은 신하는 아니야!’

그러나 바이샤는 거두어들인 부족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비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쿠드라께선 알고 계십니까?”

“무엇을?”

“그 희멀건 계집이 제게 이따위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아시냐는 말입니다!”

누라비는 눈을 매섭게 치켜뜬 딸을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아눌라의 죄를 덮기 위해 너무 큰 것을 잃었다.

왕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드러났던 분노가 떠올랐다.

이 일로 시카는 쿠드라에게 끊임없이 충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내쳐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딸은 그가 무엇을 희생해 그녀를 지켜 냈는지 알지 못했다.

쿠드라의 자비는 누라비에게만 약속된 것이었다.

누라비만이 자비를 청할 수 있었고 그가 죽으면 사라지게 될 크나큰 선물이었다.

따로 맹세한 것은 아니나 누라비는 그것을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부족이 알게 된다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아눌라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부려선 안 될 욕심을 부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카의 몰락을 불러오겠지……. 딸을 사랑하지만 시카를 망칠 수는 없었다.

“쿠드라께 말씀드릴 겁니다.”

“무엇을?”

“쿠드라께선 덮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을 내리다니! 이건 쿠드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겁니다. 용납할 수 없어요.”

그의 딸은 쿠드라가 시카를, 정확히는 자신을 ‘특별히’ 여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착각은 누라비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아눌라를 위해 슈라의 일을 덮었고, 사냥대회의 일을 덮었다.

그것 외에도 많은 것들을 시카가 아닌 딸을 위해 받아왔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아눌라가 착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눌라.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아라.”

“하지만 이건!”

“이번 일로 시카는 아주 큰 것을 잃었다. 더는 안 돼!”

왕과 여왕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라누아는 쿠드라와 자신 사이에 맺어진 약속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것은 누라비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저 쿠드라 곁에 세워 놓을 장식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라누아의 모조품’에 불과한 라젠의 왕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혼자 생각하고 움직인 건가? 아니면 쿠드라의 뜻이 담긴 움직임인가?’

그가 섬기는 왕은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다. 만약 쿠드라가 라누아를 움직여 무언가를 해볼 작정이라면? 그럼 그때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 있는가?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주변에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던 누라비는 진심으로 바이샤를 왕으로 섬기고 있었다.

‘차라리 라누아가 베푼 자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라누아의 시녀들 사이에 사람을 심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결과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의 벌로 모든 문제를 덮을 수 있다면 오히려 좋았다.

거기다 ‘라누아’가 무사히 돌아온 덕분에 또 하나 남은 라젠의 왕녀를 데려오기 위해 번거롭게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다. 누라비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얼굴을 구기고 있는 아눌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과 씨앗은 준비해 두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루트를 정리한 지도도 준비되었으니 당장 움직이거라, 아눌라.”

“…….”

“네가 들릴 오아시스마다 시카의 사람을 미리 준비해 두마. 말을 계속 바꿔 달리면 땅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씨앗을 전부 뿌릴 수 있을 거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눌라…….”

“막지 마세요. 아버지의 첫 번째 자식이 미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파라간이 건넨 지도를 거칠게 낚아채고 몸을 돌린 아눌라를 보며 누라비는 신음을 삼켰다.

제 간절함이 딸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아 속이 답답했다.

“파라간.”

“네.”

“이런 내가 한심해 보이느냐.”

“……사랑이 모든 것의 답이 아님을 배우고 있을 뿐입니다.”

아들의 냉정한 대답에 누라비는 차마 그의 눈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아 버렸다.

딸을 살리고자 아들의 마음을 죽여 버린 것이 자신이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그날로 돌아가더라도 그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파라간.”

“네.”

“아눌라는 이 시카의 후계자다.”

“알고 있습니다.”

“너의 선택은 아눌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곧 시카를 위한 길이니까.”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간.”

“…….”

“만약 너의 저울에 시카와 차이툰이 오른다면…… 너는 차이툰을 택하거라.”

눈을 감고 있음에도 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누라비는 피부를 따끔하게 찌르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그 선택이 결국 시카를 살릴 거다.”

“……네.”

파라간은 그걸 제일 잘 알고 있는 당신은 어째서 매번 시카가 아닌 아눌라를 선택하느냐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 대신 아비가 원했을 말을 대신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아들의 붉은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누라비는 순종적인 아들을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라비는 그의 딸을 사랑했고 그의 아들을 믿었다.

아직 어린 막내는 제 몫을 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나 장성해 파라간과 같이 그의 누이를 섬기리라. 그의 바람이었고 소원이었다.

누라비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루기 어렵지 않은 소원이라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선 그것이 가장 이루기 어려운 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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