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사냥대회 (9)
바이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약간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킨 세리아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이샤는 쿠드라로 시카의 누라비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요. 그것은 쿠드라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이행한 것이고 번복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맞나요?”
“그래.”
“저는 당신의 라누아로 그 약속을 존중해야만 해요.”
“그럴 필요 없어.”
그의 단호한 대답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이샤. 쿠드라의 약속이에요. 당신이 약속한 이상 저는 아눌라에게 함부로 벌을 내릴 수 없어요.”
만약 세리아나가 아눌라에게 벌을 내린다면 그것은 쿠드라의 결정에 반발하는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물론 세리아나와 바이샤는 차이툰의 서로 다른 부분을 맡고 있기에 서로 어긋난 의견을 내놓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지금은 두 사람이 같은 목소리를 내는 편이 좋았다.
차이툰의 백성들에게 괜한 불안과 혼란을 느끼게 할 필요가 없었다.
“시카의 힘이 필요하신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시카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런 약속을 하셨을 리가 없으니까요.”
조곤조곤 말을 잇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잔뜩 굳어 있던 바이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가기 시작했다.
가끔 그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때면 느끼기는 했지만 그의 아내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둘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빠르든 늦든 언제나 진한 입맞춤이 시작되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살을 섞느라 그녀의 영특함을 알아볼 시간이 적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내게 시카가 필요하므로 벌하지 않겠다?”
“당신께 필요하면 저에게도 필요할 테니까요.”
“그 말…… 제법 마음에 드는군. 그래서? 아눌라는 어떻게 할 거지?”
이제는 완전히 기분이 풀린 얼굴로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바이샤가 질문했다.
조금 전 딱딱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한껏 여유를 되찾은 그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살짝 미소지었다.
“이번 사고는 라누아의 이름으로 헬라임께 그 시작을 알린 사냥대회에서 일어났어요.”
“그래서?”
“책임을 져야지요. 람은 아눌라의 수하였어요. 그녀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아눌라도 책임을 지는 게 맞아요.”
“아랫사람의 잘못은 윗사람의 책임이니까.”
“네.”
공식적으로 아눌라를 벌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이 오직 세리아나 하나만을 다치게 하고 곤란하게 만든 것이었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아린이 다쳤고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쿠드라, 즉 바이샤의 위엄을 해치려 했다.
세리아나는 그 두 가지 만큼은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 아랫사람을 잘 단속하지 못한 죄를 물어 아눌라에게 조금 힘든 일을 부탁할까 해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부탁은 동등한 상대나 높은 이에게 청하는 것이니까.”
“아직…… 명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죄송해요.”
“괜찮아, 금세 익숙해질 테니. 그래 어떤 명령을 내릴 거지?”
“사냥대회가 끝나고 난 후 사막 곳곳의 오아시스를 돌며 씨를 뿌리는 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맞아. 오아시스의 규모를 키우고 사람과 짐승이 머무를 수 있는 땅을 넓히는 작업이지.”
짧은 우기 동안 몸집을 불렸던 오아시스 대부분은 빠른 속도로 마르며 본래의 규모로 돌아가 버린다.
그래서 오아시스 주변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게 해 다음번 우기에 그 식물의 뿌리가 물을 머금도록 하는 것이다.
봄의 짧은 우기 끝에 열리는 사냥대회는 씨를 뿌리기 전 헬라임께 땅의 자비를 구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그 작업을 맡길까 해요.”
“고작 그 정도 일을 맡기려는 건가?”
“혼자서요.”
“응?”
“아눌라 혼자서 그 일을 했으면 해요.”
쉽게 씨를 뿌리는 일이라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 그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사막 곳곳에 퍼져 있어 그 일을 하기 위해선 넓은 모래사막과 황무지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래서 보통은 사막의 전사 여럿이 구역을 나누어 그 일을 진행하곤 했었다.
“사막에서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거예요.”
“아니, 오래는 곤란하지.”
“네?”
“물이 마르기 전에 모든 오아시스에 씨앗을 뿌려야 하니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할 거야. 하하하!”
사냥대회를 마치고 우승자가 잡은 짐승으로 헬라임께 자비까지 구한 후 하는 일이다.
물이 마르기 전에 모든 오아시스에 씨를 뿌리지 못하면 그땐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에게 신벌이 내려온다 전해졌다.
그 사실까지는 야안에게 미처 배우지 못했던 세리아나가 슬쩍 바이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을 내리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고약한 인간이 된 것 같아 바이샤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면 나름 괜찮은 벌이군.”
“그런가요?”
“나라면 최소한 그 발목……에 족쇄라도 걸어줬을 거야.”
실은 발목을 자를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간 그의 여린 아내가 겁을 먹을지도 몰라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물론 바꾼 말도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그녀에게 족쇄를 달겠다는 건 일의 실패를 바란다는 소리였다.
헬라임의 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최소한’이라고 표현하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미소지었다.
농담으로 여기는 것이리라.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지만 모르는 척 그녀를 따라 웃어주었다.
“이제 조금 기운을 차린 건가?”
바이샤의 물음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잠들었다 깨어난 것처럼 목마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사이 바이샤가 아주 조금씩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의 입 안에 물을 흘려 넣어준 덕분이었지만 세리아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먹을 것은 챙기지 못했어.”
“괜찮아요.”
속이 좀 쓰리기는 했지만 라젠에선 드레스를 입기 위해 식사를 챙기는 시간보다 배고픔을 참아내는 시간이 더 길었던 세리아나였다.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그녀의 그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괜찮지 않은 상황에 습관처럼 괜찮다 답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라젠에선 왕녀에게 지나친 인내를 가르쳤군.”
툭 하고 뱉은 바이샤의 말에 세리아나의 몸이 한순간 굳어 버렸다.
라젠의 왕녀,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세리아나는 그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에게 버림받을까? 라젠의 다른 귀족들처럼 그도 그녀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러면…….
손과 발끝으로 몸의 온기가 죄다 빨려 나가는 느낌에 세리아나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어…….’
잊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그의 따뜻한 손길을 받는 동안 완전히 잊어버렸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자리는 그녀가 있을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세리아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떠는 세리아나의 귓가에 바이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걱정을 담은 그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자신은 왕녀가 아니라 고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백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상처가 아픈 건가? 왜 이렇게 몸을 떨지?”
“바이샤…….”
몸의 떨림이 심해지는 세리아나를 끌어안은 바이샤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걱정이 담뿍 담긴 그 손길에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루미어스 왕녀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는 이렇게 다정하게 등을 쓸어주었을 것이다.
그의 이런 다정함은 세리아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라누아’의 이름을 받은 여인을 위한 것이었다.
“좀 더…… 강하게 안아주세요.”
“내 라누아께서 어리광을 부리시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하게 끌어안아 오는 바이샤의 품에 안겨 세리아나는 눈물을 털어냈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이 행복을 누리다가 그에게 고백하자. 결과가 두려웠지만 그를 계속 속여서는 안 된다.
세리아나는 이 작은 욕심을 사막의 신께서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이샤의 걱정에 통증을 덜어주는 성분을 가진 연고를 한 번 더 상처 부위에 바른 세리아나는 그의 품에 안겨 어두운 사막을 이동하는 중이었다.
바이샤와 그녀, 그리고 죽은 라갈의 시체를 실은 말은 무겁다는 기색 하나 없이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삐이-”
아, 잠깐 잊을 뻔했다.
세리아나가 구하고 ‘아로’라고 이름 붙인 쿠락도 말의 머리 위에 앉아 두 사람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세리아나의 품에서 저를 떼어낸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바이샤의 손끝을 매섭게 쪼아 대던 아로는 그 모습에 놀라 자신을 야단친 그녀에게 살짝 토라져 있는 상태였다.
“아직 화가 났니?”
말의 머리 위가 불편하기도 하련만 용케 떨어지지 않고 고개를 획 돌리는 모습이 귀여워 세리아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바이샤의 몸에 상처를 냈잖아. 그러면 안 돼.”
세리아나는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은 바이샤의 팔을 살짝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정한 빛을 품은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처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괜찮아.”
“피가 비쳤는데…… 정말요?”
“뭐, 쿠락의 부리가 단단하긴 하더군.”
바이샤는 고삐를 잡은 제 손을 바라보며 심각한 척 얼굴을 굳혔다.
사실 쿠락이 그의 손가락에 남긴 흔적은 상처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절부절 그를 걱정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이 보기 좋아 그는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제가, 제가 잘 가르칠게요. 용서해 주세요, 바이샤.”
“쿠드라와 라누아의 몸에 상처를 내는 건 그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어.”
“네에…….”
“뭐, 그렇지만 내 라누아께서 이리 부탁하시니 이번은 넘어가 주지.”
순식간에 세리아나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지켜본 바이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저기, 오아시스가 보인다.”
“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멀리 조금씩 밝아 오고 있는 지평선의 끝에 푸르른 오아시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아시스의 궁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바닥에 엎드린 치아린을 우선 달래야만 했다.
바이샤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린 그녀가 절뚝거리며 다가오자 치아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런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의 눈물샘까지 터져 버렸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통곡하는 치아린과 걱정시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치아린, 분명 상처를 돌보라고 했을 텐데?”
“어쩜 그렇게 매정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쿠드라!”
“……걱정을 하는 거다만?”
“라누아께서 겨우 돌아오셨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울든가 화를 내든가 둘 중 하나만 하는 게 좋겠다.”
세리아나의 얼굴에 남은 약한 화상 자국과 양쪽 팔, 그리고 왼쪽 발목에 감긴 붕대를 살피며 제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훔친 치아린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명백하게 살의를 담고 있는 눈빛에 바이샤가 혀를 찼다.
제 주인을 걱정하는 것은 좋지만 저런 모습을 함부로 내보여서야 좋을 것이 없었다.
“내 라누아께서 겁먹으신다.”
“죄, 죄송합니다, 라누아!”
“나는 괜찮아. 나 때문에 치아린이…… 상처가…… 흑…….”
“라, 라누……아…….”
다시 울 것 같은 두 여인의 모습에 바이샤가 바닥에 앉은 세리아나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치아린을 달래느라 주저앉았던 탓에 그녀의 옷에 흙먼지가 묻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살짝 구긴 그가 그것을 털어냈다.
그리고 세리아나의 발긋하게 부은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얀.”
“네, 쿠드라.”
“내 라누아께서 잡은 사냥감이다. 조심스럽게 옮기도록.”
“네.”
“그리고 치아린.”
“……네.”
“너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라누아의 호위에서 빠진다.”
“쿠드라!”
“억울하면 빨리 나아서 복귀하도록.”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외치는 치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바이샤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본래부터 고집이 센 치아린이었다.
거기에 세리아나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진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몸을 움직일 것이 뻔했다.
그러다 덜 아문 상처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당신의 호위는 당분간 다른 전사들에게 맡기지.”
“네.”
“그리고 미안하지만 호위를 전담할 전사들의 선발을 서둘러야겠어.”
쿠드라에게 개인 호위대가 존재하듯 라누아를 위한 호위대 또한 존재했다.
다만 오랜 시간 라누아의 자리가 비어있어 대다수의 호위전사가 ‘후보’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선발을 서둘렀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내 잘못이야.”
“아니에요. 제가 천천히 고르고 싶다고 부탁드린걸요.”
호위를 전담할 전사들을 뽑는 것은 쿠드라와 라누아가 가진 수많은 권한 중 하나였다.
복잡한 것은 아니다.
직접 후보들을 살피고 그중 마음에 드는 자를 고르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오아시스에 머무는 동안 치아린 말고 다른 호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다 직접 전사를 골라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던 탓에 호위전사들의 선발이 미뤄지고 있던 참이었다.
“몸이 다 나을 때까진 우선 임시로 호위들을 붙이지.”
“네.”
어느새 라누아의 방에 도착한 바이샤가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세리아나의 두 발을 침대 위로 올리고 다친 발아래 쿠션을 받친 바이샤가 서둘러 치료사를 불러들였다.
바이샤의 명령에 기다리고 있던 치료사가 방으로 들어와 세리아나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얼굴과 양쪽 팔의 화상은 다행스럽게도 미미한 정도라 바이샤의 응급처치만으로도 거의 아문 상태였다.
그러나 라갈의 이빨에 당한 자리는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던 듯 그것을 살피는 치료사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