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27화 (27/110)

#27. 사냥대회 (8)

눈을 감았다 느리게 뜨며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행복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이렇게 다시 바이샤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혹시나 꿈일까 싶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세리아나가 몸을 돌리려 하자 바이샤가 가볍게 그 움직임을 막았다.

“바이샤?”

“가만히, 계속 움직이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

혼내는 듯한 말투에서 웃음이 묻어났다.

바이샤의 그런 반응에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던 세리아나는 두 팔과 한쪽 다리에 감긴 하얀 붕대를 발견하고 살짝 몸을 떨었다.

정신적으로 압박당하고 상처를 입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육체적으로 위협에 노출되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양쪽 팔과 얼굴엔 약한 화상, 발목은…… 라갈에게 당한 거겠지.”

세리아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양 볼과 콧등 위에 끈적한 연고가 느껴졌다.

아마 양쪽 팔에 감긴 붕대 아래에도 같은 연고가 발려져 있을 것이다.

“화상은 심하지 않지만 발목은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해. 간단하게 소독하고 약을 바르기는 했지만 감염되었을 수도 있…… 세리아나?”

그녀의 상처에 관해 설명하던 바이샤는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여 버린 세리아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처가 불편한 걸까? 바이샤는 조심스럽게 세리아나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한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의 입을 벌려 억지로 약을 먹이고 시간이 꽤 흘렀다.

혹시 통증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 걸까? 걱정으로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세리아나?”

“보, 보지 마세요.”

“아프면 약을 한 번 더…….”

“아뇨, 아뇨. 아프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 얼굴 보지 마세요.”

바이샤의 재촉에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세리아나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모닥불의 빛이 비쳐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바이샤의 얼굴에 살짝 짓궂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나는 내 라누아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제발 바이샤.”

“보여주지 않을 건가?”

그의 목소리에 두 손바닥 아래에 감춘 세리아나의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과 다르게 연고를 치덕치덕 바른 얼굴을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죽다 살아났다는 안도나 그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보다도 그 부끄러움이 더 커서 세리아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삐이-”

그때였다.

그녀가 정신을 놓으려 할 때마다 경고하듯 날카롭게 울던 새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린 세리아나가 주변을 살폈다.

쓰러질 때 품에 안겨 있었으니 자신의 몸에 깔려 어딘가를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이샤, 혹시 새 한 마리를 못 보셨나요? 까맣고 꽁지깃 하나가 빨간…….”

“흠, 내가 부탁할 땐 가만히 계시더니…… 이건 또 새로운 기분이군.”

“네?”

“아니야, 당신이 찾는 쿠락은 저기에 있어.”

바이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하얀 천을 온몸에 칭칭 감은 새 한 마리가 푸르릉 소리를 내며 귀를 터는 말의 안장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제대로 펴지지 않는 한쪽 날개가 불만인 듯 날카롭게 울던 새는 세리아나가 깨어난 것을 알고 그녀의 곁으로 오고 싶은 것인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직 어린 녀석이 날개를 다쳤더군. 둥지를 옮기는 시기에 낙오됐거나 버림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쿠락이라고 하나요?”

“사막에 사는 매의 한 종류야. 십 년 넘게 사막에서 목격했다는 말이 없어 멸종한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런 녀석을 내 라누아가 품고 있었다니 놀랍군.”

“귀한 새였네요.”

“세리아나,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귀하지.”

“네?”

“쿠락은 옛날 지상에 처음 내려왔던 라누아가 전령으로 부린 새니까.”

바이샤는 그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세리아나를 보여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저의 얼굴은 보지 않으려 하면서 새의 작은 울음소리에 곧장 반응하던 그녀의 모습에 느꼈던 서운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

“내 라누아 덕분에 이렇게 쿠락을 다시 보는군.”

쿠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나는 바이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새가 울었지만 그보다 먼저 바이샤의 입술이 세리아나의 입술에 닿았다.

갈라진 입술을 혀로 핥고 가볍게 빨아들이는 동안 젖은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짙어졌다.

혀를 섞는 깊은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입술을 핥는 것만으로도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열감이 치솟아 올랐다.

“여기까지만 하지.”

“아…….”

“그런 얼굴 하지 마. 세리아나 당신보다 내가 더 아쉬우니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낸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다시 품에 안았다.

가슴에 닿은 작은 등과 하얀 어깨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양쪽 팔과 발목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 그의 라누아에겐 부드러운 치료와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따금 부는 모래바람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두 사람을 감쌌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가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어제까지 절망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밤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세리아나.”

“네.”

“이번 일은…….”

바이샤는 망설였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거침이 없는 그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쳐 있는 세리아나에게 진실을 말해 줘도 될까? 곱게 자란 것이 분명한 그의 라누아가 과연 제 목숨을 노리고 일을 꾸민 자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러나 그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세리아나가 겪은 일이다.

누군가의 악의로 상처 입었고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세리아나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었다.

“이번 일을 저지른 건 아눌라일 거야.”

“…….”

세리아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믿었던 일에 배후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으나 그 배후가 아눌라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오아시스로 돌아가 보게 될 죄인은 시카의 람이 될 거야.”

“어째서요?”

“유일한 증거가 죄인이 람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

“이번 일은 그렇게 정리될 거다. 람은 죗값을 치를 것이고 아눌라는 무탈하겠지.”

“그렇군요.”

“이유는 묻지 않나? 억울하지 않아?”

“억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바이샤가 그렇게 하겠다 결정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답하는 세리아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바이샤는 그녀가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강한 힘으로 세리아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시카의 누라비에게 세 번의 자비를 약속했다.”

“네.”

“그가 나의 전사들이 전장에서 헛된 목숨을 버리지 않도록 도왔기 때문이야.”

모두가 바이샤를 쿠드라라고 부르며 신으로 섬기지만 그 스스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신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그는 사막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사막의 하나뿐인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그를 따르는 전사들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명예를 아는 그의 전사들이 바이샤의 명령이라면 죽음을 불사할 것이란 것을 안다.

그래서 바이샤도 그들과 함께, 그들의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명예로운 자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바이샤는 그런 전사들의 목숨이 헛되이 버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랬기에 시카 전부를 자신에게 바치고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춘 누라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누라비는 예상대로 유능했다. 그 덕분에 전사들이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기뻐 상을 내렸다. 실수였다.

“누라비는 그중 두 번의 기회를 모두 아눌라에게 썼어. 물론 본인은 그렇지 않다 시치미를 떼지만 모든 것이 아눌라의 잘못을 덮기 위한 일이었다는 걸 나도 알고 누라비도 알고 있지.”

“딸을 아끼는군요.”

“지나치게 아끼고 있지. 아마 자신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 그의 행동이 시카에겐 독이 될 것이라는 걸.”

바이샤는 누라비의 그런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아비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아눌라가 부러웠다.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무한한 애정을 받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세리아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해 보려 했다.

“쿠드라인 나는 약속을 번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 나는 침묵할 거야.”

“이해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내 라누아께선 시카에 그 어떠한 자비도 약속하지 않으셨지.”

“네?”

“나는 안 되지만 당신은 얼마든지 아눌라를 벌할 수 있다는 소리야.”

보지 않아도 세리아나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싱그러운 연둣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붉은 입술도 살짝 벌린 채 살짝 굳어 있을 것이다.

바이샤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세리아나의 작고 동그란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죄인은 람이라 하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눌라를 벌해도 되나요?”

“나는 여기서 끝내겠다고 했지만 당신은 약속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의 목숨을 노린 죄인을 벌하는 것은 당연해.”

바이샤는 담담하게 답하며 누라비와 아눌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루 부족을 굴복시키지 못한 현재 시카의 누라비는 아직 그 쓸모가 남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가장 아끼는 딸, 아눌라. 제 딸의 성미를 알고 있는 누라비는 세리아나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눌라를 떠올렸을 것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있었지만 급하게 바이샤를 찾아와 고개를 숙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말의 엉덩이에 박혀 있던 화살은 조작된 증거다.

그러나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밝혀낼 길이 없었다.

말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오아시스로 가져온 것이 시카였으니까. 화살을 쏠 때부터 람의 것을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바꿔치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말은 람의 화살이 박힌 채 오아시스에, 바이샤의 손안에 들어왔다.

그의 침묵이 세리아나에게 도움이 될지 독이 될지 알 수는 없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라누아가 하고자 하면 이루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바이샤는 누라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척 굴면서 첫 번째 자식의 일 앞에서는 다시 없을 멍청이가 되어버리지.’

람이 죄인이라는 것이 이 일이 곧 아눌라의 소행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누라비도 그것을 안다.

그런데도 순순히 람을 바치겠다는 건 자신을 머저리로 알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화를 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첫 번째 자식을 지키겠다는 소리였다.

‘아눌라보다는 둘째 파라간이 더 쓸 만하지만…… 누라비가 아눌라를 포기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겠지.’

그러니 당분간은 내버려 둘 것이다.

‘가만 내버려 둬도 자멸할 것 같으니까.’

시카 부족 내에서 아눌라에 대한 평판은 바닥이었다.

누라비가 아눌라를 지나치게 아끼고 감싸기에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 후계자에 대한 불만은 이미 시카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우루를 굴복시키거나 누라비가 제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쳐낼 것이다.

아쉬울 것은 없었다.

미리 봐둔 후계자감도 있으니까. 바이샤는 파라간을 떠올리며 그쪽이 좀 더 제 입맛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신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슈라의 일로 아눌라나 누라비에 대한 불만도 클 테니 더 협조적으로 굴지도 모르지.’

아눌라와 두 살 터울인 파라간의 나이가 세리아나와 같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바이샤는 입맛을 다셨다.

적어도 스물은 되어야 제 아비의 자리를 넘볼 수 있을 것이다.

귀찮은 장로들의 불평불만쯤은 자신이 막아줄 수 있으니 딱 스물.

‘그때까지 자멸하지 않는다면 직접 끌어내리면 될 일.’

그 전에 누라비가 정신을 차리고 후계자를 바꾼다면 더 좋겠지만…… 바이샤는 생각에 잠긴 듯 미동도 없는 세리아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경우의 수를 세었다.

물론 그 수들의 결론은 ‘아눌라를 치워버린다’로 동일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신은 과정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왕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바이샤는 한숨을 삼켰다.

“치아린은 괜찮은가요?”

“응? 아아, 그대의 종은…… 몇 군데 상처를 빼면 괜찮아.”

“다행이에요. 만약 치아린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참아줄 수 없었을 테니까요.”

“설마 아눌라를 용서할 생각인가?”

그것은 좋지 않다.

바이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굳혔다.

두 사람에게 자비라는 덕목은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그것을 하극상을 벌인 죄인에겐 베풀 필요가 없었다.

가장 위에 선 두 사람이 상과 벌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혼란이 생긴다.

그런 일은 막아야만 했다.

“세리아나.”

“아뇨, 용서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럼 아까의 말은 무슨 뜻이지?”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몸을 돌려 자신과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처음 보는 단호한 얼굴을 한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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