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냥대회 (3)
세리아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뻣뻣하게 몸을 굳힌 채 두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시카의 여인들의 비아냥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나타나 람의 목에 검을 겨눈 낯선 이의 행동은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거기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 검은 람에게 겨누었으면서 아눌라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라하 님, 라누아께서 보고 계십니다. 검을 내려주세요.”
“라누아 앞에서 함부로 놀린 혀는 검과 다른가? 내가 보기엔 그쪽이 더 라누아께 위험한 거 같은데?”
“자라하 님, 그만…….”
“비겁한 침묵자가 오늘따라 말이 많군. 슈라의 이름을 방패로 삼을 수 있는 건 단 한 번뿐이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니면 그 방패, 오늘 쓸 건가 하누?”
아눌라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우울한 인상의 미인이 입을 열었지만 자라하라고 불린 이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세리아나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얼굴을 굳힌 아눌라가 그런 자라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점점 날카롭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에서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리아나는 두 주먹에 힘을 주고 배에 힘을 줬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은 거두는 것이 좋겠구나.”
“라누아께서 원하신다면.”
다행히 검을 쥐고 있던 여인은 세리아나의 말에 따라 순순히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눌라를 향한 시선까지 거둔 것은 아니었기에 주변의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고 날카로웠다.
“시카의 람, 이번 한 번은 너의 무례를 용서하마. 아눌라, 너의 사람들과 함께 물러가는 게 좋겠어.”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끝까지 자라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인 아눌라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자 그 뒤를 람과 하누가 허겁지겁 뒤쫓았다.
세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한 세리아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첫날부터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라누아.”
“아니, 오히려 그대의 도움을 받았어.”
아눌라를 끝까지 노려보고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려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바라의 자라하, 라누아께 늦은 인사를 올립니다.”
어느새 세리아나 뒤로 물러나 있던 치아린이 귓속말로 그녀가 바라의 족장 타람의 첫 번째 자식임을 알려주었다.
사막의 여러 부족 중 시카, 라옴과 함께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바라는 국경과 가까운 곳에 터를 잡은 탓에 라젠과는 특히나 사이가 좋지 못한 사막의 부족 중 하나였다.
피오르 백작가의 서재에서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린 세리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어나도 좋아.”
“감사합니다, 라누아.”
세리아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자라하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눌라의 초콜릿 색 피부보다 조금 더 밝은색의 피부와 허리까지 닿는 검은 고수머리, 그리고 파란 눈동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제일 처음 느낀 것은 그녀의 키가 꽤 크다는 것, 그리고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가 무심하다는 점이었다.
어떠한 적의도 호의도 찾아볼 수 없는 자라하의 눈동자에 세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게도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라누아.”
“무엇을?”
“모든 것을요. 특히나 저 아눌라가 여기에 있으니 모든 것이 더 위험해졌죠.”
“아…….”
세리아나는 아눌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사람들 무리 가운데에 서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누가 보았다면 이 무리를 이끄는 이가 아눌라라고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시카의 아눌라는 욕심이 많고 포악하지만 그것을 감출 만한 머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질이죠.”
아눌라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자라하의 무심한 눈동자에 짙은 살의가 담기는 것을 목격한 세리아나는 무언가 두 사람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초면에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에 세리아나는 궁금증을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았다.
“자라하, 저희와 함께 움직이시겠습니까?”
“사양합니다, 치아린 님. 제가 함께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 같군요.”
치아린의 제안을 단번에 사양한 자라하가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빛이었다.
“당신에게 이분은 섬겨야 하는 신이겠지만 내게는 아직 아무런 의미가 없으신 분이니까요.”
“그럼 아까는 왜 나서셨나요?”
“내게 의미가 없다고 감히 라누아께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는 꼴을 지켜보는 것은 헬라임에 대한 모독이니까요. 더불어 그 입을 놀린 녀석이 아눌라의 멍청한 개였으니 나설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따라붙는 말이 길어지시네요.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죠.”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웃음기가 묻어나는 치아린의 말에 무덤덤하게 답한 자라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와 답했지만 치아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라하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치아린과 궁의 시녀들 외엔 다른 이들과 교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던 탓에 궁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아눌라처럼 자신을 적대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말처럼 다른 목적이 있었다곤 해도 자신의 편에 서서 아눌라를 쫓아주고 걱정의 말을 건네는 자라하의 모습에 아주 작은 위안을 얻은 것이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했으니 내게 호의가 있어 그런 것이라 믿어도 될까?”
그래서였을까? 평소 낯선 이에게 먼저 다가간 적이 없는 세리아나가 호의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자라하에게 말을 건넸다.
“……라누아의 뜻이 그러시다면 얼마든지.”
“고마워.”
세리아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답하던 자라하는 잠시 침묵하다 아눌라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막의 밤은 춥습니다. 최대한 당신의 종과 함께 움직이시길…… 그리고 한마디만 덧붙인다면, 조심하십시오, 라누아. 차이툰에선 이혼과 재혼이 금지되어 있지만 딱 한 가지 경우에 한해선 그것들이 허락되니까요. 아마 아눌라가 노리는 것이 그 경우일 겁니다.”
“그게 무슨……?”
“당신의 종께 듣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정중하게 인사하며 물러가는 자라하를 바라보던 세리아나가 치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남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리아나의 눈빛을 받는 치아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완성된 천막 안으로 세리아나를 이끈 치아린은 두꺼운 깔개와 쿠션이 놓인 자리에 그녀를 앉힌 후 차가운 음료 한 잔을 먼저 내어놓았다.
뜨거운 바람을 맞느라 말라 버린 세리아나의 입 안을 시원한 박하 향이 씻어내려 주었다.
“아까 자라하의 말, 무슨 뜻이야?”
“그…… 이혼과 재혼이요?”
“일단은 그것부터.”
난처한 듯 볼을 긁으며 세리아나 맞은편에 앉은 치아린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주인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시는 것처럼 차이툰은 이혼과 재혼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요. 금지된 만큼 결혼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죠. 결혼식을 올리셨을 때 야안이 신을 향해 올렸던 축언을 기억하시나요?”
“응.”
“그건 단순한 축언이 아니라 신께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가 되었다고 알리는 의식 중에 하나예요. 신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인 영혼은 살아서는 절대로 헤어질 수 없죠.”
“그 말은…….”
“네, 이혼과 재혼이 허락되는 경우는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죽었을 때뿐이에요.”
치아린의 말을 들은 세리아나는 좀 전에 자라하가 남기고 사라진 말이 경고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불어 조심해야 할 것이 ‘사람’이라는 것도……. 그녀는 아눌라를 조심하라고 말해준 것이다.
“아눌라가 날…… 죽이려 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
“경고지만 그 대상이 아눌라라면 충분히 주의해야겠죠.”
“말도 안 돼…….”
자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세리아나로서는 절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눌라가 라누아의 자리를 욕심내는 것은 바이샤에 대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서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니…… 왕비의 자리를 욕심내던 그녀의 어머니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누아.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응…….”
“무언가 더 걱정되는 게 있으신가요?”
“걱정이라기보다는…… 헬라임께 인사를 올렸음에도 자라하는 날 아직까진 인정하지 않은 거지? 자라하 같은 이들이 많을까?”
“……무례하게도 신에게 증명을 바라는 이들이 있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불충한 생각을 품은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런데 왜 내게 경고해 준 걸까?”
“아마도 아눌라 때문일 겁니다.”
“아눌라와 사이가 나빠?”
“나쁘다기보다는 원수 사이죠.”
“원수?”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빈 잔에 다시 음료를 채우며 치아린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쿠드라께서 사막의 바람을 한데 모으기 전까지 사막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살아왔어요. 목적을 위해 척을 지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부족들 각각의 방식으로 살아온 거죠. 그중 시카는 사막에서 유목을 택한 부족이었어요.”
물과 풀이 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던 시카는 사막의 대부분의 부족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이 있는 곳엔 다른 부족들이 터를 잡고 있었고 그 물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시카 부족은 사막의 여러 부족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곧 귀중한 정보가 되었다.
시카의 족장 누라비는 그 정보를 가지고 바이샤 앞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고 바이샤는 그 정보를 이용해 사막의 통합을 앞당길 수 있었다.
“그런 누라비를 두고 뒤에서 욕하는 이들은 꽤 있어요. 쿠드라께서 아껴 사용하는 이라 앞에서 말은 함부로 못 하지만요.”
“그것 때문에 아눌라와 자라하가 원수가 되었다고?”
“아뇨, 그건 그냥 대외적인 이유죠.”
“그럼?”
“저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슈라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 들었어요.”
“슈라?”
“시카의 슈라, 아눌라의 사촌입니다.”
세리아나는 새롭게 등장한 이름에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카의 그것도 아눌라의 사촌 때문에 자라하와 아눌라가 어떻게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슈라라는 사람도 이번 사냥대회에 참가했어?”
“아니요. 그녀는 참가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죽었으니까요.”
치아린의 대답에 세리아나는 마음 한구석을 갉아먹기 시작한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자세한 이유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그 죽음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사냥감의 숨통을 죄는 올무처럼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왜, 죽었는지…… 이유를 물어도 괜찮을까?”
“시카 부족에서 밝히기론 낙마였습니다.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즉사, 그게 끝이었어요.”
“자라하는 그걸 믿지 않는 거구나.”
“아마,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어째서?”
“그녀의 승마술은 차이툰에서도 손꼽혔으니까요.”
“…….”
“시카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의 사람들도 의문을 품었지만 쿠드라께서 그 사건을 시카의 누라비에게 일임하겠다고 못 박으셨기에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어요.”
스멀거리며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던 불쾌한 감각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는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던 아눌라의 눈빛을 떠올렸다.
“설마…… 아눌라가…….”
“짐작뿐이랍니다, 라누아.”
“자라하는 확신을 하고 있는 거네?”
“아마도요.”
세리아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천막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자신의 활을 바라보았다.
바이샤가 그녀에게 선물해 준 활을 보고 있으려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고작 반나절 만에 그가 그리워질 줄 알았다면 거울이라도 챙겨왔을 것을…….
“치아린.”
“네, 라누아.”
“나는 쿠드라께 약속을 했어.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
“내 실력이 모자란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서 그런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치아린이 힘들어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어.”
“라누아…….”
“내 걱정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지만…… 치아린 부탁해. 나는 쿠드라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반드시 그리하실 겁니다, 라누아.”
“고마워 치아린.”
사냥 대회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필 줄 알았기에 그녀가 이 대회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사냥감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빈손으로 돌아가 조롱을 받더라도 바이샤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싶었다.
“사냥은 언제 떠나?”
“언제든지 자유롭게 시작하시면 됩니다. 라누아께서 선언하신 그 순간부터 이 대회는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럼 지금이라도 나가면…….”
“아직 해가 뜨겁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바람에 적응하시려면 시간이 걸리니 조금 천천히 움직이시는 건 어떠세요?”
“그래도 괜찮을까?”
“네, 어차피 사막의 짐승들은 대부분 야행성이라 지금 나가봐야 움직이는 것도 별로 없거든요.”
물론 사막의 사냥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성과를 올릴 테지만 세리아나는 아니었다.
거기다 지금 나가면 아눌라와 동선이 겹칠 위험도 있었다.
괜히 같이 움직여 빌미를 내어주는 것보다는 아눌라가 그녀의 추종자들과 거점을 떠난 이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쉬세요, 라누아. 해가 기울면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고마워.”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치아린은 세리아나가 겉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고 그녀가 자리에 눕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천막을 빠져나왔다.
결혼식 때 세리아나의 가마에 장난질을 쳐놓은 것처럼 이번엔 말의 고삐나 안장에 장난질을 쳐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녀는 금세 잠든 듯 조용해진 세리아나의 천막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말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사냥대회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치아린은 무사히 바이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말하던 세리아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