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21화 (21/110)

#21. 사냥대회 (2)

세리아나는 마치 결혼식을 준비하던 그 날처럼 앞으로 그녀가 겪게 될 일을 다시 일러주는 치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2박 3일간 치러지는 사냥대회는 오아시스의 외곽에서 진행된다.

대회에 참석한 여인들은 사막에서 생활하며 대회가 끝나는 날까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대회 기간 동안 먹고 자며 휴식을 취할 거점 한군데를 정해놓고 이후의 행동은 모두 자율에 맡겨졌다.

원한다면 대회 동안 거점에 돌아오지 않고 사냥감을 찾는 것도 가능했다.

정해진 구역에 사냥감을 미리 풀어놓고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하는 자가 우승하는 라젠의 사냥대회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차이툰 사냥대회의 특별한 점을 꼽아본다면 대회 동안 사용할 화살의 수가 10발로 정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사막의 여신 라누아가 헬라임께 바칠 사냥감을 활로 잡은 것에서 시작된 사냥대회였기에 활 이외의 다른 도구로 사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오직 10발의 화살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각각 사용하는 화살마다 개인의 방식으로 어떤 표식을 남기게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쓰는 것을 막기 위함이죠.”

치아린은 화살 깃의 가장 끝부분에 붉은 점을 찍어놓은 자신의 화살과 깃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세리아나의 화살을 나란히 들어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붉은색은 신의 것이기에 아무나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쿠드라와 라누아, 그리고 두 분의 인정을 받은 소수의 사람만 쓸 수 있죠.”

궁을 지키던 수호전사들의 허리띠가 붉은색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아린이 평소 어깨에 두르던 붉은색의 베일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닌 물건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치아린도 허리띠가 붉은색이구나.”

“네, 제가 라누아의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라누아께선 모르실 거예요.”

자랑스러운 듯 웃으며 말하는 치아린을 보며 세리아나는 자신이 걸친 옷을 내려다보았다.

터번을 고정한 핀과 마감이 잘된 가죽조끼를 제외하곤 온통 하얀색이었다.

붉은색이 신의 것이라면 세리아나 역시 붉은색 옷을 입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눈빛으로 그렇게 묻고 있는 세리아나를 보며 치아린이 미소지었다.

“신은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누아.”

“응?”

“붉은색을 걸치지 않아도 라누아는 라누아라는 뜻이랍니다.”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하게 답하며 치아린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익숙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문 역할을 대신하는 여러 겹의 천이 젖혀지며 바이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란 것은 세리아나뿐이었다.

그녀는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시녀들과 치아린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치아린이 라누아를 섬기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몸을 단련해 왔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꾸준히 단련해 온 덕분에 바이샤의 접근을 쉽게 알아차린 것이겠지. 그런데 시녀들도 치아린과 마찬가지로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녀들 또한 치아린처럼 어느 정도 몸을 단련해 왔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도 어울리는군.”

“그런가요?”

세리아나는 치아린과 단둘이 남게 되면 시녀들에 관해 물어야겠다 생각하며 바이샤를 향해 미소지었다.

지난밤, 거울 속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와는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는 ‘진짜’ 바이샤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 거울 속 그는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거울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거울 속 그가 부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기를 기도하며 떠오르는 해를 지켜보아야만 했었다.

“긴장했나?”

“조금이요.”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몸을 가볍게 당겨 품에 안았다.

라젠에 숨어든 쟈캄을 통해 그녀에게 활을 가르친 스승을 찾으려 한 시도는 실패했다.

스승은커녕 그녀가 활을 배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활을 쏘는 병사 근처로도 가본 적이 없다 하니 책을 보고 혼자 활을 배웠다는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라젠에 차이툰의 활쏘기를 알려줄 책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차이툰이 분리되고 100년, 국경을 넘나드는 교역은 중단된 지 오래고 라젠은 차이툰을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야만인의 활 쏘는 법을 책으로 남겨 가지고 있다?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어딘가 찜찜함이 남았지만 바이샤는 사냥대회를 위해 오아시스의 궁을 떠나야 할 세리아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의 아내는 차이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약한 여인이었다.

어설픈 부분을 교정하며 고작 며칠 활을 당긴 정도로 그녀가 이번 사냥대회에서 무언가를 이룰 것이라 그는 기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마 그의 그런 생각에는 다른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치아린.”

“네, 쿠드라.”

“너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심려 마시길. 이 치아린이 있는 한 그 누구도 라누아께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래.”

평소라면 짓궂은 농담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무겁게 이어지는 대화에 바이샤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가 몸을 굳혔다.

두 사람이 농담을 잊을 만큼 이번 행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잘할 거예요. 저도, 치아린도…….”

“믿지.”

“네.”

그의 품에 안긴 채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샤는 그런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터번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갈까?”

“네.”

바이샤가 내민 손을 잡으며 세리아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궁의 정문 앞, 커다란 공터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이들은 바이샤와 세리아나가 함께 등장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느낀 세리아나가 움찔 몸을 떨자 바이샤가 잡고 있던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긴장하지 말라는 뜻일까? 장난스러운 그 작은 손짓에 긴장을 푼 세리아나가 바이샤를 향해 고마움을 전하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두 사람이 선 자리가 높았던 탓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그런 미소를 목격할 수 있었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그녀의 미소에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노리기라도 한 듯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살짝 앞으로 밀어 모두가 볼 수 있는 자리에 서도록 했다.

라누아의 이름으로 열리는 사냥대회였으니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은 세리아나의 몫이었다.

세리아나는 궁의 지하에서 나와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야안을 발견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대신했던 것은 야안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늙은 여인은 새로운 라누아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서 새로운 라누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라임의 첫 번째 은혜가 사막에 뿌려졌다. 땅은 비옥해졌고 곳곳에서 생명이 싹트리라. 이에 나, 세리아나 쿤 라누아가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으로 고한다. 가장 크고 기름진 짐승을 잡아라. 첫 번째 계절에 처음으로 잡은 가장 큰 짐승을 헬라임께 바쳐 그분의 은혜를 우리가 기억하노라 고할 것이다!”

야안에게 배우고 치아린과 함께 연습했던 말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위엄이 부족하지는 않았을까? 목소리가 저 끝까지 닿지 않았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던 찰나 라누아로서 처음 입을 연 세리아나의 모습에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바이샤는 선언을 마친 세리아나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라누아의 승리를 기원했다.

모두가 말에 오르고 세리아나 역시 계단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말 앞에 섰다.

바이샤는 그녀를 직접 안아 안장 위에 오르도록 도운 후 세리아나의 뺨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무운을 빌지.”

“무사히 돌아올게요.”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부드럽게 미소짓는 세리아나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의 이별이었다.

세리아나는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며 무리의 선두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치아린이 바짝 붙어 따랐다.

사냥대회의 시작이었다.

* * *

오아시스의 울창한 숲을 벗어난 차이툰의 여인들은 황무지 한가운데 마치 산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의 그늘 아래 거점을 마련했다.

커다란 차양을 치고 각자가 생활할 공간을 정리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능숙해 보여 세리아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라누아.”

“응, 그리고 신기해.”

“라젠의 여인들 사이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일 테니까요. 차이툰의 여인들에겐 익숙한 일이랍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야?”

“네, 저들에게 맡기세요.”

대회에 참가한 여인들이 각자 자신이 지낼 천막을 치는 것과 다르게 세리아나가 머무를 천막은 따라온 시종들이 설치하는 중이었다.

평평하게 다진 땅 가운데에 어린아이 팔뚝만 한 두께의 아주 기다란 장대를 여러 개 묶어 똑바로 세우고, 바깥쪽에 정사각형 형태로 허리까지 오는 상대적으로 짧은 말뚝을 박은 후, 가운데의 기둥과 말뚝 사이에 튼튼한 밧줄을 연결하는 시종들의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밧줄을 친 후 그 위에 염소의 가죽과 털을 이용해 만든 덮개를 올린답니다. 그 후에 내부에 화로를 들이고 깔개를 깔 거예요. 간단하지만 주방도 설치될 거고 욕조도 들어갈 예정이랍니다.”

“너무, 큰 게 아닐까?”

“무슨 말씀이세요, 라누아. 준비 기간이 짧아 겨우 이 정도로 그친 거랍니다. 선대 라누아께선 이보다 몇 배는 더 큰 곳에서 지내셨다고 야안이 말해줬는걸요.”

천막이라기보다는 이동식 가옥에 가까운 그것은 열 명 이상의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가 생활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이 치는 천막이 작게는 둘, 크게는 네다섯 명의 사람이 함께 지낼 만한 크기를 가진 것과 비교해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치아린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종들을 보며 못마땅한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내년에는 좀 더 제대로 된 거처를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라누아.”

“아니, 아니야. 정말로 충분해.”

진심으로 자비를 구하는 치아린에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 답하던 세리아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굳혔다.

“라누아께선 검소한 생활을 즐기시나 보군요. 그게 아니면 자신이 누려도 괜찮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현명함을 갖추신 거겠죠.”

아눌라의 목소리였다.

“시카의 아눌라,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시카의 람,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시카의 하누,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세리아나가 몸을 돌리자 아눌라와 그녀를 따라온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아눌라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당황한 듯 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라누아께선 저희의 인사를 받지 않을 생각이신가 봅니다.”

“아눌라, 말을 고르는 데 신중해야 할 것 같군요.”

“라누아의 종께선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계시네요. 꼭 제가 당신의 주인에게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이죠.”

“아눌라!”

“그만, 치아린 그만해. 시카의 아눌라, 람, 하누. 고개를 들어도 좋아.”

자신이 걸린 일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치아린을 달래며 세리아나가 손을 살짝 움직였다.

명백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그 손짓에 아눌라의 눈빛이 순간 사나워졌다.

그러나 곧 능숙하게 그 눈빛을 지운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많이 익숙해지신 것 같습니다, 라누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렇지요, 라누아께서 해야만 하는 일이죠. 버겁더라도 말입니다.”

“……무슨 뜻이죠, 아눌라?

아눌라의 웃음 섞인 말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린 치아린이 앞으로 나섰다.

세리아나가 그녀를 달래기는 했으나 아눌라의 말에 담긴 비아냥을 참아 넘길 수는 없었다.

거기다 계속 세리아나가 상대하도록 내버려 두기엔 웃는 얼굴로 적의를 교묘하게 포장하는 아눌라는 그녀의 주인에겐 아직 버거운 상대였다.

“어머, 치아린 님.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거 아닌가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치아린 앞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며 말을 받은 건 짧은 단발머리를 색색의 실로 땋아 장식한 여인이었다.

조금 전 자신을 람이라 소개한 그녀는 웃는 얼굴로 세리아나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노골적인 그녀의 비웃음에 치아린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시카의 람. 나는 시카의 후계자에게 물었다.”

“아눌라 님의 말을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나섰답니다.”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아눌라 님은 라젠에서 곱게만 자란 왕녀님이 사막에서 고생하시는 거 같아 걱정하신 거랍니다. 사냥대회만 하더라도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해서 저희도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어차피 우승자는 정해져 있는데 일부러 위험한 곳에 나오실 이유가 없잖아요?”

걱정하는 척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말을 했지만 결국 세리아나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적의에 민감한 세리아나는 아눌라뿐만 아니라 람 또한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카의 여인들은 말을 경솔하게 뱉는 나쁜 버릇을 가졌군.”

“치아린 님, 저는 순수하게 걱정을 하고 있는…… 힉!”

“어디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너였구나.”

치아린이 람의 멱살을 잡으려 움직이기 전 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람의 목에 날카로운 검을 겨누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날붙이가 목 지척으로 다가온 것을 느끼고 몸을 굳힌 람이 눈알을 굴려 검을 겨눈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카의 후계자는 생각할 머리도 없는 것을 수족으로 달고 사나?”

“자, 자라하 님.”

“닥치렴, 네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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