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20화 (20/110)

#20. 사냥대회 (1)

차이툰의 사막엔 1년에 두 번, 늦봄과 겨울의 끝에 우기가 찾아온다.

그중 봄의 우기는 2~3개월간 길게 이어지는 겨울의 우기와 다르게 일주일 정도의 기간 동안 많은 비를 쏟아내고 끝이 난다.

사냥대회는 바로 그 여름의 우기가 끝난 이후에 열리는 행사였다.

그동안 치아린에게 활을 다루는 법을 배운 세리아나는 바로 내일로 다가온 사냥대회에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중앙정원의 한쪽에서 쉬지 않고 시위를 당기는 그녀를 보며 치아린이 괜찮을 것이라 도닥였지만 세리아나는 쉽게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라누아, 이번 사냥대회는 라누아께서 참석하시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어요.”

“응, 알고 있어.”

사냥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매일 들어왔던 말이었다.

오랜 기간 라누아 없이 열린 사냥대회에 드디어 라누아가 참석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라누아의 일을 배우기 시작한 세리아나는 그 역할 하나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라누아가 참여했던 사냥대회는 모두 라누아가 우승했다고 야안이 말했어.”

“그건…… 네, 그렇죠.”

“나는 우승을 하려는 게 아니야, 치아린. 쿠드라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을 뿐이야.”

차이툰의 모두가 그녀를 라누아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녀의 외모가 아무리 ‘여신 라누아’와 닮았다 한들 세리아나가 라젠의 왕녀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차이툰의 일부 부족들은 평야에 높은 벽을 세우고 그들을 야만족이라 서슴없이 비하하는 라젠의 귀족들과 왕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바이샤의 결정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세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하지만 바이샤의 선택을 의심하게 해서는 안 돼.’

조롱하고 경멸하는 눈빛은 라젠에서 질리도록 겪어 보았다.

그때를 떠올려 본다면 겨우 무시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시선쯤은 세리아나에겐 그 어떤 상처도 남길 수 없었다.

마지막 화살을 날린 세리아나가 화살이 빽빽하게 꽂힌 과녁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마음과 조급한 마음이 뒤엉켜 무리한 것인지 시위를 당겼던 팔이 아팠다.

곁에 다가온 치아린에게 자신의 활을 넘긴 세리아나가 따끔거리는 손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이 갈라져 피가 비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세요. 무리하다 탈이라도 나시면 사냥대회 자체에 참여하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응.”

세리아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치아린이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활을 바라보았다.

이번 사냥대회를 위해 바이샤가 직접 선물한 활이었다.

줌통이 시위 안쪽으로 굽어 있는 라젠의 활과 다르게 시위 바깥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활의 표면엔 아름다운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과분해…….”

“라누아?”

그녀의 모자란 실력에 비해 과하게 아름다운 활이었다.

세리아나는 다시 활을 쥐고 싶다는 충동을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라누아의 방 반대편, 쿠드라의 거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결혼식을 올린 이후 매일 함께하던 아침 식사를 오늘은 함께하지 못했다.

그에게 무척이나 바쁜 일이 생겨 식사를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차이툰에서 라누아의 일과 쿠드라의 일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어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 생긴 바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세리아나가 라누아의 일에 완전히 익숙해지면 바이샤 역시도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활을 놓고도 한참이나 바이샤의 그림자를 찾던 세리아나는 해가 진 이후에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땀에 젖은 몸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사이 낮의 뜨거운 바람은 사라지고 밤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첫 장마가 끝나고 아직 여름의 초입일 뿐인데 벌써부터 더위에 체력이 깎이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커다란 쿠션에 몸을 기대었다.

“오늘 밤은 찾지 않으시겠다는 쿠드라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

“너무 서운해 마세요, 라누아. 쿠드라께선 내일 사냥대회를 위해 일부러 찾지 않으시는 거예요.”

“쿠드라께선 이번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않으시잖아.”

“후훗, 오늘 밤 라누아의 침대에 쿠드라가 드시면 내일 말은 못 타실걸요?”

서운함에 저도 모르게 뾰로통하게 답했던 세리아나는 이어지는 치아린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보지 않아도 흑요석을 닮은 치아린의 검은 눈동자가 짓궂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카 열매를 갈아 만든 주스예요. 입맛이 없다고 하셔서 준비했습니다.”

세리아나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치아린이 노란 음료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더위에 입맛을 잃은 세리아나를 위해 바이샤가 직접 준비하라 명한 음료였다.

치아린은 저의 아내 앞에선 사나움을 숨기고 제법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바이샤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분께 그런 모습이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사막의 조각난 부족들을 모으는 방법으로 무력을 선택한 바이샤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쿠드라의 이름을 받고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동안 사막의 모래바람은 언제나 피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바이샤는 자신의 앞을 막는 것들에 자비가 없었다.

치아린은 그때의 서슬이 퍼렇던 바이샤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바이샤를 섬기는 카얀조차도 두려워했던 모습이었다.

그를 전쟁터에서 그것도 적으로 만난 이들이라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치아린, 추워?”

“네? 아, 네. 밤이 되니 좀 춥네요. 호호호.”

음료를 다 마시고 잔을 내어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보지 않기를 바란다.

치아린은 세리아나가 평생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바이샤의 모습만 보기를 원했다.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라누아.”

“응.”

“편안한 밤 되시길…….”

영원히 쿠드라의 사랑을 받으시길…… 치아린은 진심으로 소원하며 라누아의 거처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말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하는 밤이었다.

홀로 눕기엔 지나치게 넓게 느껴지는 침대 위가 낯설었다.

세리아나는 베게 하나를 집어 품에 안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 너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혼자인 게 당연했는데.”

그녀가 세리아나 피오르라는 이름으로 머물렀던 방은 낮에도 밤과 같이 어두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세리아나는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버티며 살아왔다.

평생 어둠 속에 묻혀 살 것이라 믿으며 우울하고 암울한 시간과 친구가 되려 노력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빛이 환한 밤에도 외로움을 느끼는구나.”

세리아나는 간사한 자신의 마음에 조소를 흘리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보름달의 환한 빛이 그녀의 방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응?”

달빛을 좇듯 시선을 옮기던 세리아나는 곧 그 빛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닿지 않는 방의 깊숙한 곳은 어두워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방 가장 안쪽의 어두워야 할 부분이 빛으로 가득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리아나는 의문의 빛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놀라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차이툰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빛을 낸 적이 없는 거울이 하얀 천을 뒤집어쓴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위를 벗어난 세리아나가 빠르게 거울을 덮은 하얀 천을 걷어 냈다.

빛으로 일렁이는 거울 위로 바이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바이샤…….”

세리아나는 꼬박 하루 만에 보게 된 그의 모습에 눈을 반으로 접어 웃으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거울의 차가운 표면이었으나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바이샤였다.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팔짱을 낀 채 모래사막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세리아나는 질문했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 그녀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거울은 바이샤만을 선명하게 비출 뿐 그의 주변에 선 인영은 흐릿하게 뭉개져 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카얀일까?”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바로 뒤에선 누군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 저렇게 가까이 설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그 적은 사람 중 세리아나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카얀 한 사람뿐이었다.

결혼식 이후 그녀가 라누아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이번 사냥대회가 더 중요한 거지만…….”

사냥대회는 그녀가 라누아로 차이툰의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첫 번째 공식 행사였다.

내일의 행사를 생각하니 다시 한숨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세리아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버리고 거울 속 바이샤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화가 났나요? 아니면 걱정? 바이샤, 무슨 일이에요?”

뒤에 선 누군가가 무슨 말을 전한 것인지 순식간에 일그러진 바이샤의 얼굴이 낯설었다.

세리아나는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의 근심이 사라지기를 기도했다.

거울이 비추는 시간대는 늘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에 지금 그의 모습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세리아나는 알 수 없었다.

“거기 당신 곁에 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화난 얼굴로 말 위에 올라 사막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바이샤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리아나가 중얼거렸다.

그가 향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 걸까? 그의 표정에 담긴 간절함의 이유는 무엇일까?

세리아나는 잔상을 남기며 흐트러지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훑으며 바이샤가 달려간 그 길 끝에 그가 원하는 것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 * *

사냥대회가 열리는 아침, 이른 시간에 라누아의 방을 찾은 치아린은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세리아나를 발견했다.

편안히 잠들기를 소원했지만 치아린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라누아.”

“저절로 눈이 떠졌어.”

답하는 세리아나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치아린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야단을 떨기엔 오늘의 일정이 너무 중요했다.

치아린의 시중을 받으며 세안을 끝낸 세리아나는 잘 먹히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켰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 이유로 식사를 건너뛰었다간 오늘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각오를 다지는 듯 식사를 마치는 세리아나를 보며 치아린은 오늘 챙겨야 할 물건에 소화제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녀들을 불러 빈 그릇을 치울 것을 명령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라누아.”

“노력해 볼게.”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세리아나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인 치아린은 단장을 끝낸 시녀들을 한발 물렸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고정한 후 그 위에 흰색의 터번을 둘렀다.

흰 천을 머리 위에 둘둘 감아 그 끝을 붉은색 보석 핀으로 고정해 놓은 터번이 세리아나와 잘 어울렸다.

좁은 소매 끝을 매만지고 가죽으로 만든 조끼가 단단히 여며졌는지를 확인하는 치아린의 손끝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리아나의 가느다란 허리에 감긴 허리끈을 점검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바지가 움직이기에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핀다.

마지막으로 세리아나가 신은 가죽신의 바닥이 튼튼한 것까지 확인한 치아린이 활짝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만점이라며 점수를 매겼다.

세리아나의 복장에 합격점을 준 치아린은 트레이를 들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 하나를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붉은 천이 깔린 트레이 위에 놓인 것은 세리아나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단검이었다.

날이 안쪽으로 살짝 굽은 형태의 단검은 손잡이와 검집에 화려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건……?”

“보시다시피 단검입니다. 사용하실 일은 없을 테지만 단단히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단검의 날을 확인한 치아린은 그것을 세리아나의 허리춤에 비집어 넣고 손잡이가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위치를 점검했다.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짝 빗겨나간 위치에 자리 잡은 단검이 배를 누르는 감각이 낯설어 세리아나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활로 사냥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치기는 했지만 날이 선 검을 몸에 지닌다는 것은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누아. 이것을 쓰실 일은 없을 거랍니다.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그럼 이것도 필요 없는 거 아닐까?”

“아뇨, 사용하는 것과 몸에 지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치아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검을 뽑을 때의 주의 사항을 세리아나에게 일러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옷을 점검했다.

“사냥대회는 2박 3일간 이루어집니다. 시종들 몇을 제외하고는 남자들은 대회 동안 일어나는 일에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고 말씀 올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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