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9화 (19/110)

#19. 라누아 (5)

세리아나는 라누아라는 이름만 받았을 뿐 아직까지 라누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해야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불행해져서는 안 돼.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내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만큼이라도 지킬 힘. 그만큼의 힘이 필요해.’

세리아나는 거창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 그저 나를 아껴 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이었다.

조건 없는 호의와 관심은 일찍이 받아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에 세리아나는 그것을 돌려주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의 이러한 바람은 책이나 사람으로부터 학습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선한 마음씨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새빨개진 눈가를 손으로 거칠게 닦아 낸 세리아나가 허리를 세워 앉으며 야안과 치아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세리아나는 차분히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직도 눈가가 발긋하네요, 속상해라.”

“라누아의 고운 피부는 염소 가죽처럼 질긴 네 피부보다 연약하니 어쩔 수 없지.”

“저도 한 피부 하거든요?”

치아린은 야안과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으며 세리아나의 얼굴에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 냈다.

짧은 사이 쏟아낸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던지 흥건하게 젖은 뺨에 연보랏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

“라누아, 카얀과 저는 아주 나중에 헬라임의 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세리아나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사이 세리아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정리한 치아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때가 되면 쿠드라와 라누아께서 저희 결혼식의 하객이 되어 주시겠어요?”

차이툰의 전통에 대해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헬라임의 품이라는 것이 죽음 이후를 말한다는 것을 세리아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올리는 결혼식. 세리아나는 다시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아린의 머리 위에 베일을 올리는 일은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어…….”

“어머, 기뻐라.”

지금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약속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눈물을 안으로 삼킨 세리아나가 다시 눈을 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치아린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라누아가 되어야 한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치게 할 수는 없었다.

치아린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라누아가 되고 싶었다.

“정리되신 모양입니다.”

“네.”

야안은 흐릿한 눈을 곱게 접어 미소지었다.

“치아린이 라누아를 이곳으로 모신 이유를 아십니까?”

“아뇨. 라누아의 일을 배우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만 했을 뿐이에요.”

본래 그녀에게 라누아의 일을 일러줘야 할 전대의 라누아는 일찍 죽었고 그녀의 종 또한 이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전대 라누아만큼이나 그 일을 잘 알고 있는 이가 세리아나를 가르쳐야 한다.

세리아나는 야안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라 생각했다.

“총명하신 분을 라누아로 모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누구나 그리 생각했을 거예요.”

“겸손은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가져야 할 미덕이지요. 그러나 라누아께선 가지실 필요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안의 목소리가 바뀐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치아린이 한발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을 곁눈질한 세리아나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신은 수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행하는 모든 일은 옳은 것이고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

“쿠드라와 라누아는 그런 신의 자식이자 또 하나의 신이 되십니다. 그러니 쉬이 자신을 낮추셔선 안 됩니다.”

“……응.”

이제껏 말을 높이던 세리아나가 짧게 답하는 것을 들으며 야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쿠드라께선 사막의 가장 뛰어난 전사이십니다. 모든 전사의 선두에서 그들을 이끄는 자이며 동시에 경외 받는 태양 같으신 분이지요.”

“태양…….”

거울이 보여 주던 모습 중 그러한 장면이 있었다.

끝도 없는 모래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던 바이샤. 내리쬐는 태양도 그를 지치게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가 태양이었던가? 세리아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야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라누아께선…… 무어라 설명해 드려야 이해가 쉬우실까? 아! 이리 말할 수도 있겠군요. 라누아께선 지키는 자 되십니다.”

“지키는 자?”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보통 왕과 왕비를 빗대어 말할 때는 백성들의 아비나 어미라는 말을 선택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왕을 가장 뛰어난 전사라고 말한 시점에서부터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라젠에서 왕이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켜지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네, 지키는 자. 쿠드라께서 사막의 전사로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 낸다면 라누아께선 그 백성들의 여기를 지켜 내는 분이십니다.”

야안의 손가락이 세리아나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주름진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세리아나가 두 손으로 가슴 위를 살짝 내리눌렀다.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 아래 느껴졌다.

“마음을 지키는 거야?”

“네, 사막의 백성들이 안쪽에서부터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 주는 기둥이 되는 거지요.”

“아…….”

“쿠드라께서 칼로 피를 뿌린 자리에 자라난 원한을 보듬어 안는 것 또한 라누아께서 하실 일입니다.”

세리아나는 라누아가 맡은 부분이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이라고 이해했다.

검을 쥔 쿠드라와 꽃을 쥔 라누아. 두 사람이 정치와 종교를 나누어 안과 밖에서 이 차이툰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라누아께선 어두운 밤에 홀로 뜬 달과 같은 분이십니다. 사막의 모든 것이 라누아를 사랑하고 그 자애로움에 기대기를 원합니다.”

“내가……할 수 있을까?”

라누아의 삶은 이제까지의 그녀의 삶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정말로 그 무거운 기대들을 짊어질 수 있을까? 세리아나는 두 손을 모아쥐며 야안을 바라보았다.

“이 늙은 종, 야안이 남은 모든 시간을 바쳐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뿐인 종, 치아린이 남은 생을 모두 바쳐 라누아를 도울 것입니다.”

야안과 치아린이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며 세리아나 앞에 맹세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세리아나가 살아오며 만난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했을 뿐 도우려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이러한 믿음과 기대를 걸어준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았었다.

“열심히, 열심히 할게.”

“잘하실 겁니다.”

처음엔 바이샤 곁에 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리아나는 자신을 믿어 주는 이들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의 생각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그 마음에 또 하나의 마음이 더해진 것이다.

바이샤의 곁에서 그의 아내이자 사막의 여왕으로 살아갈 그녀의 인생에 앞으로 더 많은 생각과 마음이 더해질 것이다.

누가 알려 준 것은 아니었으나 세리아나는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점점 더 무거운 것을 짊어질 그녀의 곁에 이 사람들이 함께할 것이다.

“고마워.”

세리아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일 것이다.

껍데기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완벽한 라누아가 되어 보일 것이다.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세리아나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후로 세리아나는 부지런히 야안의 처소에 들러 라누아의 일을 배웠다.

차이툰의 고대문자를 익히는 것은 조금 어려웠으나 차이툰의 전설을 듣는 것은 즐거웠다.

그녀가 특히 좋아한 것은 오아시스와 관련한 이야기였다.

“정말로 이 오아시스가 ‘라누아’의 눈물로 만들어진 건가요?”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바이샤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사흘에 한 번씩, 가끔은 이틀에 한 번씩 그와 밤을 보내는 동안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품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몸을 붙여오는 그녀의 모습에 바이샤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흘렸다.

“이 메마른 사막에서 말라 죽어가는 인간들을 보며 하늘에서 라누아가 흘린 눈물이라고 하더군. 야안이 알려 줬나?”

“네! 이곳 쿠드라의 오아시스가 사막에 처음으로 생긴 오아시스라고도 알려 준걸요.”

“뭐, 어디까지나 전설이 그렇다는 거야.”

“바이샤는 믿지 않나요?”

“글쎄…….”

말꼬리를 흐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바이샤는 품에 안긴 세리아나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의 오아시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 기대듯 누워 있는 탓에 오아시스의 수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옛날이야기 같은 건 안 좋아하는 편이라.”

“안 믿는 거로군요.”

“반반이야.”

바이샤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전설을 그다지 믿지 않는 사내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 사막의 바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모를까. 그는 그러한 목적으로 맞이했던 세리아나의 턱을 당겨 살짝 입을 맞추었다.

“활은 잘 배우고 있나?”

“네, 치아린이…… 음…… 잘 알려주고 있, 어요…….”

세리아나는 허리를 지분거리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 바이샤의 손길에 몸을 살짝 떨었다.

모르는 척하기엔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한 손길이었다.

“바, 바이샤…….”

“왜 그러지?”

“그러니까 손이……손을 좀…….”

이대로 침대에 눕게 되면 해가 뜰 때까지 시달리게 될 것이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 오늘은 일찍 자두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바이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을까?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던 세리아나의 머릿속에 오아시스가 떠올랐다.

“오, 오아시스!”

“또 전설 이야기인가?”

“아뇨! 오아시스 수면이 마, 많이 내려갔다고……! 물이 부족한 건 아닌가 해서…….”

“아아, 그게 걱정인가 보군.”

속이 빤히 보이지만 넘어가 주겠다는 뜻이 분명한 그의 미소에 세리아나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확인해 볼까?”

“네?”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품에는 세리아나가 안겨 있었다.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나는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겁먹은 듯 바이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세리아나가 자신의 목을 단단히 감싸 안은 것을 확인한 바이샤는 성큼 걸음을 옮겨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오아시스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작은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는 부드러운 모래펄 위에 세리아나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정말 수면이 많이 내려갔네요.”

“이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지. 작은 오아시스라면 바닥을 보이고 있을 거야. 우기 직전의 가뭄은 자비가 없거든.”

“그렇군요.”

잠옷의 끝자락을 모아 한 손에 쥔 세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어 쪼그려 앉았다.

수면이 많이 내려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크고 넓은 오아시스 수면 위로 달빛이 조각나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기로 했던 것을 잊고 있었군.”

세리아나가 오아시스에 도착한 첫날을 떠올리며 바이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용케 알아들은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때? 배워 볼 텐가?”

“가르쳐 주실 건가요?”

“나의 라누아께 수영을 가르칠 영광을 주시니 기쁘군.”

작은 기대로 반짝이는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를 보며 바이샤가 손을 내밀었다.

웃는 얼굴로 말없이 내민 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은 세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발을 벗고 그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샘에 몸을 담갔다.

시원한 오아시스의 물이 천천히 차올라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물장구치는 법부터 알려 주지.”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두 손을 잡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이끌었다.

이내 발을 첨벙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수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매달려 천천히 몸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물 아래에서 다리를 놀리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친 기색을 내보이는 세리아나의 두 손을 잡아당겨 자연스럽게 품에 안은 바이샤가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천천히 익숙해지며 배워 가면 되니까.”

“네.”

“그래도 처음치고는 제법 잘 따라오고 있는 편이야.”

작은 칭찬에도 크게 기뻐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멋쩍은 듯 슬쩍 시선을 돌렸던 바이샤는 오늘따라 달이 무척이나 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바이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더 빛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바이샤…….”

“응?”

“아……그게…….”

순식간에 치밀어오른 말이 턱 아래 걸려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분위기에 취해 하마터면 그에게 사랑한다 고백할 뻔했다.

감히 가짜 따위가 당신께 사랑받고 싶노라 그렇게 외칠 뻔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입 안을 벗어나려는 말을 삼켰다.

뾰족한 가시를 삼킨 듯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 경솔한 말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야만 했다.

“세리아나?”

“당신께…… 꼭 필요한 사람이 될게요. 바이샤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세리아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뱉으며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바이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는 다짐했다.

분에 넘치는 것을 욕심내지 말자,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렇게 평생을 살자.

그녀는 그렇게 다짐하며 부디 자신의 욕심이 커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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