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8화 (18/110)

#18. 라누아 (4)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능청을 떨면서 점점 더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눈물이라도 흘릴 듯 눈꼬리를 내리며 애원했다.

은밀한 손길에 지난밤의 일이 떠올라 다시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모두 물러가고 방에 남은 것은 바이샤와 세리아나, 두 사람뿐이었다.

바이샤는 넓은 소매 안쪽을 더듬는 손을 그대로 둔 채 남은 한쪽 손을 움직여 세리아나의 상의 안쪽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소풍을 위해 입었던 원피스는 이미 갈아입은 후였다.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옷은 바이샤의 손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거침없이 파고든 손이 부드러운 살을 움켜쥐고 비비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뜨거운 숨과 얕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쿠드라, 제발…….”

“이름.”

“바……이샤.”

주저하면서도 확실하게 그의 이름을 내뱉는 입술에 바이샤가 입을 맞췄다.

뜨겁기보다는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러다 착실하게 세리아나의 호흡을 앗아가는 입맞춤이었다.

어설프게 그 움직임을 따라 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세리아나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미 옷은 흐트러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뜨겁고 거친, 그리고 단단한 손이 세리아나의 몸 위를 유영하듯 움직였다.

부드러운 손길에 입에서 절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 신음은 바이샤의 입 안에서 전부 부서져 사라져 버렸다.

점점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그의 어깨를 세지 않게 두드렸다.

세리아나의 숨을 마지막까지 삼키던 바이샤가 그 움직임에 입을 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든 것을 삼키고 싶었지만 가늘게 떨리던 세리아나의 목소리가 그의 이성을 뒤늦게 붙잡았다.

“침대로 가지.”

낮게 잠긴 바이샤의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떤 세리아나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의 흐릿해진 시야 너머 평소보다 어둡고 짙은 색으로 물든 호박색 눈동자가 비치고 있었다.

* * *

신방에 들고 사흘째 아침, 세리아나는 드디어 라누아의 거처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 본능에만 의존했던 바이샤는 금세 완급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그 결과 세리아나는 첫날밤처럼 쉽게 기절하듯 잠들 수 없었다.

오늘 아침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바이샤의 품을 간신히 벗어난 세리아나는 아래의 불편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치아린을 따라 걷는 중이었다.

중앙정원을 지나 궁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하나둘씩 창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촛불이 피워진 어두운 길을 걸으며 세리아나는 지금 가는 곳이 ‘지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치아린?”

“네, 라누아.”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거야?”

“알아차리셨군요.”

치아린은 상냥한 어조로 답했다.

지금 그들이 찾아가고 있는 이는 전대 라누아의 종, 야안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주인을 대신해 라누아의 일을 대신해 오고 있다는 그녀는 세리아나와 바이샤의 결혼식 때 신을 향해 축언을 올리던 바로 그 노파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제단 위에 올라 바이샤와 세리아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그녀가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전대 라누아의 종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던 그녀는 치아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야안은 어떤 분이셔?”

“제게는 아주 무서운 분이시죠.”

조금 뒤의 만남이 걱정스러워 세리아나가 질문하자 치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웃고 있는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누아. 제게는 무서워도 당신께는 세상 다시 없을 만큼 부드러운 분이실 테니까요.”

치아린의 장담에 세리아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치아린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차이툰에서의 생활 대부분을 아직은 치아린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세리아나는 의심 없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라누아.”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듯 치아린이 몸을 살짝 틀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겹의 천으로 입구를 막았던 궁의 다른 방들과 다르게 색색의 유리구슬을 엮어 만든 발을 늘어놓은 방 안쪽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먹지 마세요. 기도 시간이라 그런 거예요.”

“기도를 방해해도 괜찮을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것. 귀한 분을 모셔왔으면 냉큼 안으로 안내하지 않고 뭐 하는 짓이냐!”

“……보셨죠? 전혀 문제 될 것 없으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안에서 들려온 노성에 어깨를 움츠렸던 세리아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치아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기 어린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익숙한 듯 발을 걷은 치아린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세리아나는 방 안 한가운데 앉아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하얀 면포를 끊어 만든 커다란 베일을 온몸에 두른 늙은 여인은 앉은 자세로 세리아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땅에 닿을 듯한 모습에 깜짝 놀란 세리아나가 서둘러 그녀 곁으로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다리가 불편해 귀한 분을 앉아서 뵙습니다.”

“그만 고개를 드세요.”

“감사합니다. 라누아.”

허리를 세운 야안이 세리아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력이 좋지 못한 탓인지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한 발짝 더 가까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세리아나의 배려에 눈을 살짝 크게 떴던 노파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참으로 고운 분이 오셨습니다.”

“야안이 보는 것보다 배는 더 고우신 분이지요.”

“저 뿔난 망아지가 라누아를 잘 모시고 있는지 걱정이군요.”

“어머, 저는 엄청 잘하고 있거든요?”

“시끄럽다. 쫑알쫑알 입만 움직이지 말고 귀하신 분이 앉을 자리나 마련하거라.”

“말은 거칠어도 속은 깊은 분이니 놀라지 마세요, 라누아.”

“저 입방정을 고치기 전엔 내가 눈을 감지 못할 거야…….”

“백 년 만년 살 거라는 소리를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두 여자의 정신없는 공방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손에 이끌려 푹신한 방석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었다.

사이가 좋은 것인지 좋지 못한 것인지……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리아나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늙은이가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용서하십시오.”

“아, 아니요. 그냥 치아린과 사이가…… 참 좋은 거 같다고……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앞길 모르는 망아지가 라누아께 흠뻑 빠졌다 하더니 이리 마음이 고운 분이라 그러했나 봅니다.”

“젊은 처자를 망아지라고 부르는 건 좀 그만둬요, 야안!”

“시끄럽다! 냉큼 나가서 차나 끓여 와! 네 주인께 대접할 것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내게 칭찬 들을 생각일랑 말고!”

“누가 고약한 할망구의 칭찬이 듣고 싶대요! 금방 다녀올 테니 딱 기다려요!”

어떻게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는 걸까? 세리아나는 바람처럼 밖으로 달려나가는 치아린의 흔적을 눈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놀라셨습니까?”

“네, 조금…….”

“오래 살다 보니 괴팍한 말이 절로 나오는 고약한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저 착한 것이 제 장단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기십시오.”

“네.”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답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야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검버섯이 핀 주름진 손이 조심스럽게 세리아나의 손을 도닥였다.

“멀리서 오셨다지요?”

“라젠에서 왔어요.”

“사막을 건너는 게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뇨, 다들 배려해 주셔서…… 솔직히 말하면 즐거웠어요.”

“다행입니다.”

도닥이는 손길에 긴장이 조금씩 풀려갔다.

그것을 느낀 듯 야안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전대 라누아의…… 그러니까 쿠드라의 어머니를 모시던 분이라고만 들었어요.”

세리아나의 대답에 야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때는 총명하게 빛났을 것이 분명한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 회한이 서리는 것을 바라보며 세리아나 역시 걱정스러운 듯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라누아의 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치아린은 늘 자신을 ‘라누아의 종’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그 종이라는 것이 ‘시녀’를 부르는 다른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카얀도 자신을 쿠드라의 종이라 말하는 것을 들은 이후로 그것에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오던 참이었다.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네?”

“처음 이 사막에 내려와 나라를 만든 쿠드라와 라누아가 처음으로 구한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자는 두 신의 첫 번째 백성이 되었고 자신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딸을 신의 종으로 바쳤습니다.”

“…….”

“그것이 ‘우리’의 시작입니다. 이후 새로운 쿠드라와 라누아가 나실 때마다 첫 번째 백성들은 그분들을 위한 종을 바쳤습니다. 종은 오로지 주인만을 섬기는 존재, 주인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자들입니다.”

세리아나는 야안의 말을 들으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무언가 이상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다시 눈앞의 세리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야안이 서글프게 미소지었다.

“저는 정확히 전전 대의 라누아를 모셨던 종입니다.”

“…….”

“전대의 종은 라누아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무슨……!”

“실은 저도 그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 주인께서는 따라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야안의 말대로라면 치아린 역시 세리아나의 죽음과 동시에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야안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종은 오직 주인을 위해 삽니다. 그러기 위해 결혼할 수 없고 자손을 남길 수도 없습니다. 종의 모든 것은 오로지 주인 하나만을 위해 쓰여야 하니까요.”

“마, 말도 안 돼…….”

“삶도 죽음도 모두 라누아만을 위해서……. 그렇기에 보통은 부모의 것을 물려받을 수 없는 둘째가 종으로 바쳐집니다.”

대체 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야안은 침착했다.

이 자리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오직 세리아나 한사람뿐이었다.

“안 돼요. 치아린은…… 치아린은!”

“그 아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고 받아들였고 그러겠다 맹세까지 했지요.”

“그럴 순 없어요!”

세리아나는 라젠을 벗어나, 이곳 차이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타났기에 다른 사람이 불행해졌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라누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십시오, 라누아.”

“안 돼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치아린이…….”

“라누아께서 라누아로 정해지기 전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입니다. 그러니 그리 눈물을 흘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 알고도 저를 그렇게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고? 늘 곁에서 웃으며 보살펴 주었다고? 세리아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뭐예요 야안! 라누아를 울리다니! 노망이라도 난 거예요?”

눈물을 떨구고 있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죄스러운 마음에 치아린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나 때문에 치아린이…….”

“세상에 라누아! 울지 마세요. 저 괴팍한 노인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라누아가 사과하실 만한 일은 없어요.”

“하지만 나 때문에 치아린은…… 치아린은!”

“아아, 그 이야기를 들으셨군요.”

세리아나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알아차린 치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주인을 살짝 끌어안았다.

치아린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부드러운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며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저는 당신을 섬기기 위해 태어났답니다. 제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니 울지 마세요, 라누아.”

“하지만…….”

“저도 카얀도 다 알고서 받아들인 일이에요. 결혼을 못 하는 건 좀 아쉽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다행인걸요. 카얀을 두고 저만 결혼하지 못하면 억울할 뻔했는걸요.”

“치아린…….”

단순히 그 문제만을 가지고 세리아나가 눈물을 터트린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치아린은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세리아나를 달래고 있었다.

“결혼할 수 없을 뿐, 사랑까지 금지된 건 아니랍니다. 저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고 넘치도록 사랑받고 있어요.”

부드러운 치아린의 목소리에 세리아나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치아린은 저의 주인의 마음씨가 고운 것에 감사하며 그녀의 여린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야안 또한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치아린과 눈을 마주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번 대의 라누아와 그녀의 종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야안은 마음 한구석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후련하게 입을 열었다.

“늙은이 때문에 라누아의 눈물이 터졌으니 쿠드라의 심기가 불편하시겠습니다.”

“그래도 라누아께서 여기에 걸음 하시는 건 막지 못하실 거예요.”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와…… 방금 전에 라누아를 울렸다고 자책하시던 분이 뻔뻔도 하셔라!”

“늙으면 느는 것이 뻔뻔함 뿐이다. 그러는 너는 그리 젊으면서 이 늙은이만큼이나 뻔뻔해 어찌할 거냐.”

“모함하지 마세요!”

다시 말로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며 울음을 전부 그친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말싸움하는 와중에도 저를 살뜰하게 챙기는 치아린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여기서 더 울어 봤자 해결될 일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해……. 무엇이든 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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