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6화 (16/110)

#16. 라누아 (2)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바이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리아나를 품에서 떨어트릴 생각을 하는 대신 다시 과일 하나를 집어 그녀의 입술을 두드렸다.

빨갛게 상기된 뺨을 숨기지도 못하면서도 제 손에 들린 과일을 삼키고 입을 오물거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이 귀여웠다.

“어제처럼 앞뒤도 못 가린 채 덤벼드는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

“변명이지만 나도 처음이라 내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일 줄은 몰랐거든.”

“……저기.”

“응?”

“아까부터 처음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어떤 오해를 읽어낸 바이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처음이듯 나도 처음이었어.”

“바이샤……는 왕족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처음……?”

라젠의 왕족과 귀족들은 후손을 남기기 위한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는다.

코르티잔을 불러 유사한 행위를 흉내 내는 모습을 ‘보는’ 여자들과 다르게 남자들은 그들을 직접 안아 그 방식을 배우는 것이 보통의 방법이었다.

라젠의 왕족의 경우엔 코르티잔이 아닌 귀부인을 궁으로 몰래 불러들여 그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차이툰도 분명 방법은 다를지라도 후손을 남기기 위한 교육을 할 터였다.

거기다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눈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시선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흐릿하게 비치기는 했지만 거울 속 그의 곁을 맴돌던 많은 여성과 남성들의 모습이 세리아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런데 그런 그가…… 처음이라고?

물론 치아린에게서 그가 여자를 멀리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그 말을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인이 없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이라는 그의 말에 혼란스러운 눈빛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샤는 그런 세리아나의 입에 과일 한 조각을 더 밀어 넣으며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육은 받았어. 다만 나는 내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안지 않기로 헬라임 앞에 맹세했거든.”

바이샤는 그의 침실로 집요하게 숨어들었던 여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막의 여러 부족을 하나로 묶으며 생긴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었다.

쿠드라 아래 무릎을 꿇은 부족들은 각기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부족의 여인들을 바이샤의 침실로 밀어 넣었다.

왕의 옆자리를 자신의 부족 여인이 차지하게 된다면 어느 부족보다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물밑 싸움은 차이툰을 제외하고 사막의 가장 큰 부족이었던 시카, 바라, 라옴이 쿠드라 아래 무릎을 꿇으며 삼파전으로 변질되었다.

큰 부족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침실로 숨어드는 여자들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 집요함은 더욱 짙어져서 바이샤는 꽤 오랜 시간을 고생해야 했다.

‘목을 자를 수도 없고 말이지.’

각기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하나로 모으는 중이었다.

그럴 때 피를 볼 수 없어 참고 참아야만 했던 바이샤는 가장 집요하게 자신의 곁을 노렸던 아눌라의 아비이자 시카의 족장인 누라비가 라젠의 왕녀를 라누아로 삼자는 의견을 내었을 때 큰소리로 만세를 외칠 뻔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누라비의 진짜 속셈을 알 수 없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순간엔 의심보다도 기쁨이 더 컸었다.

“세리아나,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아주 감사하고 있어.”

“네?”

“뭐, 그런 게 있어. 자세히 설명하려면 복잡하니까…… 대신 오늘부터는 그 감사의 마음을 담아 부드럽게 하도록 노력해 보지.”

바이샤는 두 눈을 크게 뜬 세리아나를 보며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이번엔 한 번에 알아들은 듯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두려움과 약간의 기대감으로 흔들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세리아나를 품에 안은 채 식사를 마친 바이샤는 그 모습 그대로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겨 짧은 낮잠을 즐겼다.

그의 품 안이 불편한 듯 몸을 굳히고 있던 세리아나 역시 지난밤의 피로가 덜 풀린 탓인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조금 시간이 흘러 단잠에서 깨어난 바이샤는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그의 아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만 해도 발갛게 부어 있던 눈가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저녁엔 조금 덜 울릴 수 있으려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무리였다.

“익숙해지면 나아지겠지.”

몸으로 하는 것은 뭐든 빠르게 배우는 자신이었기에 바이샤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겁도 없이 제 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세리아나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비단 실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이대로 덮쳐 버리고 싶은데…… 세리아나 당신의 생각은 어때?”

“으응…….”

잠결에 들려온 대답에 순간 몸을 굳혔던 바이샤는 얼굴을 한쪽 손으로 가리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안으로 삼켰다.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물음에 타이밍도 좋게 잠꼬대를 흘리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그런 물음을 입 밖으로 뱉은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계속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곤란한데.”

오직 한 사람, 아내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그였다.

맹세에 따라 사랑해야 할 여인이 이다지도 흡족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지금도 이럴진대 정말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리아나, 당신을 하루라도 빨리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군.”

웃음을 가까스로 삼킨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둥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소곤거렸다.

긴 낮잠에서 깨어난 세리아나는 저를 웃는 얼굴로 내려보고 있는 바이샤의 얼굴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의 얼굴을 본다는 건 안 그래도 빠르게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에 좋지 못한 일이었다.

“오아시스를 보러 갈까?”

“네?”

“남은 3일 동안 침실에만 온종일 박혀 있는 것도 심심하니까. 물론 침실에만 있고 싶다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찬성…….”

“가, 가요! 오아시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꼬리를 늘리는 바이샤를 보며 세리아나가 빠르게 대답했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혹사시킨 탓에 온몸이 쑤셨고 아래의 둔통이 가시질 않아 딱딱한 곳엔 앉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단둘만 보내는 시간은 그녀의 심장에 이롭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버겁게 느껴질 때쯤 흘러나온 바이샤의 제안은 무척이나 반가운 것이었다.

세리아나의 대답에 웃음을 터트린 바이샤가 침대 옆의 협탁 위에 올려진 작은 종을 흔들었다.

맑은소리가 난다 싶더니 문가에서 치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나요?”

“내 라누아께서 오아시스를 보고 싶다 하시는군.”

“준비하겠습니다.”

“너와 카얀만 따라와. 다른 녀석들은 걸리적거려.”

“네”

치아린의 대답이 끝나고 곧이어 시녀들이 들어와 바이샤와 세리아나의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간편한 실내복에서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세리아나는 가벼운 단장으로 외출 준비를 끝마쳤다.

하얗기만 하던 실내복과 다르게 통풍이 잘되는 천 위에 갖가지 화려한 색의 실로 수를 놓은 외출복은 위와 아래가 붙어있는 원피스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햇빛에 약한 세리아나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긴 팔의 하얀 상의를 받쳐입고 그 위에 민소매의 원피스를 걸친 후 원피스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허리띠를 여러 번 둘러 묶었다.

머리 위에 올리는 베일은 생략했다.

치아린이 커다란 양산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결혼식을 마쳤으니 더는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심 시야를 가리는 베일을 불편하다 여겼던 세리아나는 그 변화를 무척이나 달갑게 받아들였다.

바이샤가 내민 손을 수줍게 붙잡은 세리아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 뒤를 카얀과 치아린이 뒤따랐다.

오아시스와 궁은 무척이나 가깝게 붙어 있어 오랜 시간을 걸을 필요는 없었다.

도착한 오아시스엔 언제 준비한 것인지 넓은 깔개가 미리 깔려 있었고 그 위로 몇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양산이 파라솔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이샤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세리아나가 얇은 가죽신을 벗고 맨발로 그 위에 올라앉았다.

미리 준비한 것이 분명한 크고 작은 쿠션들이 있어 두 사람은 마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앉아 오아시스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낮의 오아시스는 밤의 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지.”

“네, 정말……정말 아름다워요.”

잔잔한 오아시스 표면 위로 태양 빛이 부서지듯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며 감탄사를 흘렸다.

오아시스 반대편엔 푸른 잎들이 가득했고 그것을 배경으로 삼아 갖가지 동물들이 샘의 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는 풍경에 세리아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리고 바이샤는 자신이 사랑하는 오아시스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함께 좋아해 준다는 간지러운 감각에 조금 취할 것 같았다.

“다른 오아시스들도 이렇게 아름답나요?”

“사막의 오아시스는 전부 다 아름답지만 이곳만큼 아름다운 곳은 드물어.”

이만큼이나 큰 규모의 오아시스는 이 사막에서 무척이나 드문 것이었다.

거기다 싱그러운 녹색 잎을 자랑하는 식물들에 둘러싸인 오아시스는 더더욱 희귀했다.

사막에서 작물을 키울 수 있을 만큼 물이 풍부한 공간은 언제나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이들로 시끄러웠으나 그의 조상들은 언제나 훌륭하게 이 오아시스를 지켜 냈다.

그렇기에 이 오아시스는 차이툰의 자랑이자 바이샤의 자부심이었다.

“이곳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나?”

“벌써 사랑에 빠져 버린걸요.”

“다행이군.”

“저야말로 이 아름다운 오아시스를 보며 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라젠에서 세리아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은 모두 회색빛이었다.

진짜 색이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느끼기에 회색빛, 생명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이 오아시스는 달랐다.

마치 무지개를 부어 놓은 듯 온갖 색으로 빛나는 이곳엔 생명이 가득했다.

“이런 건 책으로만 읽어 본걸요. 바다 다음으로 궁금했던 게 오아시스였어요.”

정확히는 책과 거울로만 보았다.

그러나 책으로는 한계가 분명했고 거울에 비친 것은 지극히 일부였기에 상상조차 잘 할 수 없던 장소들이었다.

하긴…… 다 비추었다 하더라도 신경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거울이 비추어 주는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은 언제나 바이샤였으니까.

“바다를 본 적이 없나?”

“네, 거대한 강들이 모여드는 장소라고만 알고 있어요.”

“기회가 되면 바다에 함께 가보는 것도 좋겠군.”

“바다가 가깝나요?”

“가깝지는 않아. 하얀 사막을 지나야 하니 마음먹고 움직이지 않으면 가기도 번거롭지.”

“아……그럼 괜찮…….”

“하지만 나의 라누아께서 보고 싶다 하시면 얼마든지.”

번거롭다는 말에 언제나처럼 빠르게 포기하려던 세리아나는 뒤이어 들려오는 바이샤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감격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행동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바이샤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그녀를 받아들였다고 했지만 이런 배려가 뒤따른다면 얼마든지 그에게 이용당해도 좋았다.

‘아니,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바이샤의 곁이니까.’

세리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바이샤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곧 사막에 우기가 찾아올 것이다.

사막의 비는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다.

그 비가 그친 이후라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조만간 사냥대회였던가?”

“네.”

“그럼 바다로 갈 일정은 조금 더 미뤄야겠군.”

바이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냥대회라는 말에 이제껏 오아시스에 고정되어 있던 세리아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거울이 비춰 주던 모습 중에 분명 사냥을 하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보았던 탓이다.

혹시 그것이 지금 바이샤가 말하는 사냥대회의 일인가? 세리아나는 바이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라누아께선 사냥을 해 본 적이 있으신가?”

라젠에도 봄과 가을 두 철에 사냥대회가 벌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사냥은 온전히 남자들만의 것으로 여인들은 같은 사냥대회에 참석하더라도 안전한 장소에서 말을 몰거나 천막 안에서 쉬며 티타임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우기가 끝나고 열리는 사냥대회는 당신의 것이거든.”

“네?”

“쉽게 말하자면 라누아의 이름으로 열리는 여인들의 사냥대회라는 소리지.”

바이샤의 말에 세리아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냥 열리는 것도 아니고 ‘라누아’의 이름으로 열리는 사냥대회라니!

“사,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야 하는 건가요?”

사냥이다.

당연히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야 하는 일이었지만 세리아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로 라누아였으니까. 다른 이들이라면 요령껏 빠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라누아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그 행사에 불참할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은 시늉만 해도 상관없어.”

“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무척이나 상관이 있다며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사냥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설로 전해지는 라누아를 닮은 외모 때문이었다.

그 외모가 주는 상징성 외의 것은 불필요했다.

만약 그가 사냥대회의 우승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쿠드라. 그 사냥대회는 저의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라누아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냥이 아니니까.”

바이샤의 무심한 말에 세리아나는 아주 조금 상처 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그에게 이용당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 언제라고 그 잠깐 사이에 다른 욕심이 차올랐던 모양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라누아를 닮은 부분이 조금 더 있다면 쿠드라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그에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생전 해보지 못한 일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도전할 것이다.

세리아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 바이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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