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라누아 (1)
세리아나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고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을 간신히 움직이던 그녀는 허리를 단단히 감싼 낯선 온기에 몸을 살짝 굳혔다.
“아……!”
눈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허리를 감싼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지난밤의 기억이 몰려들었다.
세리아나의 몸 곳곳을 쓰다듬던 뜨겁고 거칠었던 손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닿아 왔던 입술. 그것을 떠올린 순간 세리아나의 온몸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런 거였구나.’
부끄러움과 함께 찾아온 작은 깨달음이었다.
결혼으로 맺어진 남자와 여자가 함께 보내는 밤이 이렇게 뜨거운 것이었다니! 세리아나는 두 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짝 쓸어내렸다.
‘이런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떻게 헤어질 수 있는 거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 차이툰과 다르게 라젠은 이혼이 자유롭게 허락된 나라였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도 왕비의 자리를 욕심낼 수 있었다.
세리아나는 정략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라젠의 귀족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밤을 함께 보내고도 헤어질 수 있다니…… 모든 사람의 상황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는 세리아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일어나야 할 텐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간신히 끊어 낸 세리아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한낮의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얇은 커튼이 바람에 살랑일 때마다 푸른 하늘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세리아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간신히 움직여 바이샤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팔뚝 때문에 몸을 뒤척이는 것도 힘들어 우선은 이 팔만이라도 벗어날 요량이었다.
그러나 지난밤 혹사당한 몸이 문제인지, 그녀보다 두서너 배는 두꺼운 바이샤의 팔뚝이 문제인 것인지 세리아나가 암만 힘을 주어 보아도 그의 팔은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았다.
침실에 함부로 들어올 사람은 없을 테지만 조바심이 났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엉망진창일 제 모습이 머릿속에 빤히 그려져 마음이 더욱 급했다.
하다못해 세수만이라도 하고 바이샤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아침부터 부산하군.”
“헉!”
바이샤의 팔과 씨름하던 세리아나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잠든 척 상황을 모면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얕은수는 바이샤에게 통하지 않았다.
마치 귀여운 재롱을 보는 듯 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바이샤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계속 잠들어 있을 작정인가? 물론 나는 좋지만 당신은 힘들어질 텐데?”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이야.”
“네에…….”
몸을 더욱 바짝 붙이며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를 지분거리는 바이샤의 모습에 다시금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가늘게 떨리며 늘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바이샤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바이샤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세리아나의 하얀 어깨를 아프지 않게 살짝 물고 핥은 후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자세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의 단단한 몸을 타고 흘러내린 얇은 이불이 그의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이불을 당겨 가슴을 가린 세리아나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하얀 등을 가리듯 흘러내렸다.
바이샤는 머리카락 너머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뽀얀 피부와 그 위에 남은 지난밤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처음 느껴보는 만족감과 새로운 갈증이 그를 삼켰다.
지난밤의 세리아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라일 꽃의 향기가 여전히 침실 안을 맴도는 것 같았다.
“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세리아나가 곧이어 찾아온 통증에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낯설고 격렬했던 지난밤의 움직임 덕분에 근육통이 온 모양이었다.
거기다 은밀한 아래쪽의 통증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세리아나를 바라보던 바이샤가 짓궂은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가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알몸인 탓이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항의하려는 순간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몸을 이불째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자, 잠깐만요! 쿠드라 왜, 왜 갑자기……?”
“씻어야 하니까?”
“네?”
“같이 씻을까?”
잠시 바이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세리아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귀 끝을 물들였던 붉은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둥근 어깨까지 스며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크게 웃음을 터트린 바이샤가 조심스럽게 세리아나를 내려놓으며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새신부를 이 이상 부끄럽게 만들 수는 없지.”
미리 준비된 깨끗한 물이 채워진 욕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바이샤는 욕조 근처의 가림막에 걸린 커다란 수건으로 아래를 대충 가리며 말을 이었다.
“치아린을 불러 줄 테니 기다려.”
“쿠드라께서는……?”
“이름.”
“네?”
“여긴 단둘뿐이니 이름을 부르는 편이 좋지 않겠어?”
“아……바이샤, 바이샤는 어디서?”
“나는 내 방에서 씻으면 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씻도록 해. 식사는 같이하도록 하지.”
“네.”
여전히 이불을 몸에 두른 채로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나의 볼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춘 바이샤가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세리아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세수도 하지 못하고 바이샤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말았다.
부끄러움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 열이 올랐다.
지난밤에 서툰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아침에는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버리다니…….
세리아나는 치아린이 들어와 아침 인사를 건넬 때까지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옷을 갈아입은 바이샤가 방을 찾았을 때 세리아나는 겨우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바이샤에게 엉망인 제 모습을 보였다는 부끄러움이 간신히 사라진 후, 욕의를 갈아입으며 제 몸을 얼룩덜룩 뒤덮은 흔적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중간 과정이 있기는 했다.
다행히 그것을 모르는 척 시중을 들어준 시녀들과 치아린 덕분에 간신히 진정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말끔한 얼굴로 음식이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웃고 있는 바이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세리아나?”
“네, 네?”
“입에 맞지 않나?”
저도 모르게 바이샤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리아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 앞의 접시를 눈짓하는 바이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세리아나는 차이툰에 온 이후로 부쩍 말을 더듬고 작은 일에도 깜짝 놀라 반응하는 스스로가 너무 멍청해 보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뇨. 맛있어요.”
바이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맛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혹시 별로였나?”
“……네?”
“어젯밤에 내가 별로여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해서. 우는데도 달래기는커녕 멈추지 않았으니까.”
“네?”
“조언을 듣기는 했는데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거든.”
본능을 따르면서 이성을 잃지 말라니. 카얀의 그 말이 겪어 보니 더 말이 안 되는 미친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바이샤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미친 듯이 허리를 놀렸던 지난밤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건 그냥 이성을 찾아볼 수 없는 짐승의 움직임이었다.
“무슨……?”
“나도 처음이라 당신에게 배려가 필요했다는 걸 이제야…….”
“바, 바이샤!”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리아나는 점점 이어지는 바이샤의 말에 간신히 본래의 색을 찾은 얼굴이 다시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듯 그의 말을 막았다.
겨우 진정시켜 놓은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세리아나?”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은 바이샤가 그녀 곁으로 바짝 붙어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싫었나?”
“아뇨!”
큰 소리로 튀어나온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마주한 호박색 눈동자에 홀려 버리고 말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과 뜨거움 숨결이 그녀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시, 싫지 않아요.”
가까스로 시선을 아래로 떨군 세리아나가 답했다.
“그런데 왜 나를 보지 않지?”
“……부끄러, 워서…….”
“뭐?”
“너무 부끄러워서…….”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린 세리아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바이샤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어쩐지 그가 미워질 정도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 수 있는 걸까?
밤을 함께 보낸 부부는 본래 이런 대화를 나누나? 그렇다면 세리아나는 ‘보통’의 아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세리아나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 리 없는 바이샤는 그녀의 작은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온 대답에 걱정스러움에 구겨졌던 얼굴을 펴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밤을 보낸 후 그는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흡족한 사람이었다.
전쟁으로 지쳤던 그의 백성들이 세리아나를 향해 환호하는 것을 보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 라누아라 생각했지만 지극히 사적인 부분까지 이렇게까지 만족스러울 줄 몰랐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군.”
“…….”
“부끄러울 정도로 좋았다니 더 다행이고.”
“…….”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리아나의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당긴 바이샤는 그녀의 몸을 손쉽게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지만 그의 아내는 너무 가벼웠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살이 조금만 더 오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이샤는 자유로운 한쪽 손을 움직여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리아나의 입술 위로 가져갔다.
그때까지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세리아나는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차가운 감촉에 살며시 눈을 떴다.
달콤한 과일 향기가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먹기 좋게 다듬어진 과일로 다시 입술을 두드리는 바이샤의 모습에 홀린 듯 입술을 벌려 그가 건넨 과일을 삼켰다.
“고기는 입에 맞지 않는다지?”
“……네, 조금…….”
차이툰의 고기는 라젠에 비해 누린내가 강했다.
그것을 강한 향신료로 감추기는 했지만 그 향신료마저 세리아나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 그녀는 이제껏 납작하게 구운 빵과 채소, 약간의 과일로만 식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살을 찌우기는커녕 더 빠지겠군. 아니 확실히 더 빠졌어.”
“그래도 과일들은 잔뜩 먹고 있어요.”
“그런가?”
“……네.”
입 안에 든 것을 삼키기가 무섭게 새로운 과일을 내미는 바이샤 덕분에 세리아나는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야만 했다.
사막의 과일들이 전부 이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라젠에서 먹던 것에 비해 월등히 달고 즙이 많은 과일은 세리아나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아니 이것이 입에 맞지 않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맛있게도 삼키는군.”
“아, 죄송해요. 저만 먹고 있…….”
“그럼 내게 좀 나누어 줄 텐가?”
“네? 그럼요. 함께 먹으려고 가져온 음식인데요.”
세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과일이 잔뜩 쌓여 있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다른 것 없이 과일만 먹어도 배가 충분히 부를 것 같았다.
그녀는 바이샤가 내민 과일을 다시 받아먹으며 자신도 그가 하는 것처럼 과일을 먹여 주어야 하는 걸까? 잠깐 고민했다.
“그럼 사양 않고…….”
“네, 얼마든……읍!”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는 만큼 먹으라 뱉으려던 말이 입 안에 들어온 과일과 함께 뭉개졌다.
미처 닫지 못한 세리아나의 입술 사이로 파고든 바이샤는 과일과 함께 그녀를 맛보듯 집요하게 입술을 붙이고 세리아나의 입 안을 휘저었다.
맞붙었다 떨어지기 시작하는 입술 사이로 달콤한 과일의 즙과 함께 뜨거운 숨이 흘러넘쳤다.
호흡이 모자라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어 뒤통수를 단단히 붙든 바이샤를 벗어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몽롱한 눈빛을 하고 숨을 길게 내쉬는 세리아나의 입술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바이샤는 촉촉하게 물든 그녀의 붉은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짧게 입을 맞추었다.
“확실히 맛있군. 당신이 나누어 줘서 그런가?”
바이샤는 부끄러움에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 세리아나의 턱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지난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녀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돌았다.
겨우 하룻밤 만에 거리감이 사라졌다.
아니 가지고 있기는 했던가? 스스로가 낯설어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