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3화 (13/110)

#13. 사막의 신부 (8)

마음속으로 헬라임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며 잡념을 떨친 치아린이 세리아나의 손을 가볍게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전사들이 라누아가 타고 가실 가마를 들고 대기 중입니다.”

“……쿠드라께선?”

“이미 붉은 길 위에 오르셨다고 해요. 라누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이샤가 기다리고 있다.

그 말에 세리아나의 발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차이툰의 전통에 따라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전통을 알고 있는 것인지 그사이 보름달이 한번 떴음에도 거울은 그의 모습을 비춰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웠다.

그 잠깐 사이에 그리움이 이렇게 깊어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세리아나는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한 가슴을 한쪽 손으로 살짝 눌러 보았다.

그의 얼굴을 떠올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빠르게 심장이 뛰는데 얼굴을 직접 보게 되면 이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졌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어쩌지?’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그녀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보다도 그리움이 컸다.

무서웠지만 사랑이 더 강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궁의 문을 나서자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네 명의 전사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늘 그녀가 탈 가마를 짊어지기 위해 특별히 선별된 전사들이었다.

가마는 세리아나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세 사람이 엉덩이를 뭉개고 앉기에도 충분한 넓은 면적을 가진 붉은색의 가마엔 포장과 덮개가 없었다.

대신 세리아나가 앉을 자리엔 화려한 문양을 뽐내는 러그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보통의 가마와 또 다른 점은 가마채에 있었다.

전사들이 붉은 길 위를 걷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인지 양쪽으로 뻗은 네 개의 가마채는 보통의 것보다 두 배는 더 길어 보였다.

세리아나가 가마의 가운데 앉자 시녀들이 그녀의 옷자락과 베일을 정리했다.

머리에 쓴 베일이 어찌나 컸던지 가마 위에 앉은 그녀의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마 뒷부분은 가마의 바닥까지 닿아 있을 터였다.

그녀가 앉은 것을 확인한 후 전사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그것에 가마채를 걸었다.

그리고 다른 신호를 주지 않았음에도 안정적으로 가마를 들어 올린 네 사람은 마치 한 몸을 가진 사람들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를 태운 가마가 움직이는 길 위로 그녀가 처음 오아시스에 도착했던 날처럼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처 식이 치러지는 장소에 자리를 잡지 못한 차이툰의 백성들이 라누아를 외치며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다.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드디어 붉은 길과 그 길의 끝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 있는 바이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금사로 빽빽하게 수를 놓은 붉은 조끼와 붉은색 바지를 입은 바이샤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듬성듬성 땋아 그 끝을 금색 깃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길 끝에 선 그의 모습이 뿌연 베일 너머 선명하게 비쳤다.

“바이샤…….”

세리아나의 혼잣말이 그녀의 혀끝에서 작게 부서져 흩어진 순간 잠시 붉은 길 앞에서 멈춰 있던 다시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고귀한 길 위를 이동 중인 그들의 여신을 지켜보는 백성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환호를 대신했다.

‘이제 절반.’

조금만 더 움직이면 바이샤의 곁에 설 수 있다.

세리아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바이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일이 터졌다.

“꺄악-!”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 전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기도 했다.

세리아나는 자신의 몸이 앞으로 급격하게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삼켰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 천천히 가까워지는 붉은 길을 보며 세리아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붉은 길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치아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대로, 이대로 끝인가? 바이샤의 곁에 설 수 없어? 그의, 그의 하나뿐인 아내가 될 수 없는 걸까?

겨우 손에 닿을 듯 다가왔던 행복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절망감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언제나처럼 행복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끝난다?

‘……싫어!’

체념은 익숙한 것이었고 포기하는 것은 그녀의 삶이었다.

욕심은 사치였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바이샤를 만났고 기회를 얻었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세리아나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가마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느리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순식간에 제 위치를 찾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탄식이 그녀의 손아귀 힘을 앗아가는 듯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가마의 바닥이 넓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장자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바짝 주고 다리를 오므렸다.

붉은 길에 닿아선 안 된다.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그 이후의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은 저 붉은 길 위에 닿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발, 제발……!’

세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매달린 와중에도 평소에 바이샤를 흉내 내 활을 당겼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흉내 낸 덕분에 팔 힘을 조금 키울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버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그 증거로 힘을 잔뜩 준 손과 팔에 떨림이 심해지며 몸이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누가, 제발…… 도와줘!’

부서진 가마채, 한쪽으로 기운 가마. 멀쩡한 세 개의 가마채를 붙든 전사들이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애썼지만 중심을 잃은 가마의 부서진 한쪽 모서리는 붉은 길 위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위로 치솟은 반대편의 가장자리를 붙들고 있던 세리아나의 손이 미끄러졌다.

결국 힘이 다한 것이다.

세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제 몸이 바닥에 닿을 것이다.

붉은 길 위에 그녀의 하얀 베일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신의 분노를 산 부정한 여인이 되어 다시는 바이샤 곁에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남들이 들으면 너무 거창하다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세리아나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헬라임께서 내 곁에 선 라누아의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 손을 쓰신 모양이군.”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닿을 것이라 믿었던 몸을 뜨겁고 단단한 팔이 감싸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바이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쿠드라…….”

“다친 곳은?”

“어, 없어요.”

“다행이군.”

붉은 길의 한가운데, 길의 끝에 마련된 제단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바이샤는 짧은 순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기울어진 가마의 바닥을 타고 미끄러진 세리아나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가마를 치워라. 아무래도 헬라임께선 내가 라누아를 직접 모셔 오길 바라시는 듯하니.”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사건이었으나 웃는 얼굴로 세리아나의 몸을 고쳐 안는 바이샤의 표정과 목소리가 밝은 탓이었을까? 잔뜩 경직되어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빠르게 풀려가기 시작했다.

붉은 길에 닿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절망했던 세리아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이샤의 웃는 얼굴을 올려보고 있었다.

“조금 시선을 돌려주시는 게 어떠할지? 암만 나라도 그런 열렬한 눈빛을 받아버리면 부끄럽거든.”

“네? 아, 죄, 죄송……!”

“버둥거리면 떨어질걸?”

얇은 베일 하나로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몸부림치려던 세리아나는 이어진 바이샤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리아나는 어디든 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머리를 처박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리아나가 부끄러움으로 눈을 질끈 감은 사이 그녀를 품에 안은 바이샤는 착실히 걸음을 옮겨 붉은 길 끝에 마련된 제단에 다다랐다.

그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느끼고 눈을 뜬 세리아나는 제단 앞, 유독 하얗게 빛나는 깨끗한 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가마를 타고 이동해 저 돌 위에 발을 내렸을 것이다.

바이샤의 품에서 내려와 차가운 돌 위에 발을 내린 세리아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맨발로 붉은 길 위에 선 그를 마주 보았다.

“여기서부터는 함께 걸어야 해.”

“……네.”

그녀와 마찬가지로 손등을 붉은색 그림으로 물들인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포개듯 올린 세리아나는 점점이 놓인 돌을 계단처럼 밟으며 제단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높은 제단 위에는 신을 위해 피운 향이 하늘을 향해 기다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깨끗하게 씻은 나뭇잎과 붉은 염료가 담긴 작은 종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나뭇잎 위에는 밀랍 빛의 작고 둥근 구슬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바이샤를 따라 두 손을 합장하듯 모은 채 고개를 두어 번 조아리고 기다리자 맞은 편에서 검붉은 천을 온몸에 두른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진 손으로 지팡이를 쥔 채 나타난 여인은 하늘을 향해 세리아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말을 뱉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밀알을 바이샤와 세리아나에게 뿌린 후 이번엔 땅을 향해 빠른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치아린에게서 결혼식의 순서와 방식을 여러 번 설명 들었지만 듣는 것과 겪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세리아나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노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입 안쪽 살을 베어 물며 눈을 크게 떴다.

“헬라임께 라누아의 얼굴을 보이십시오.”

쇠를 긁어내는 듯한 노파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이샤와 마주 본 세리아나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어 냈다.

베일 아래 감춰져 있던 그녀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메마른 땅에 내려와 차이툰의 어린 백성들을 보듬었던 라누아가 바로 저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막의 전설을 들으며 자라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서 있던 노파가 손짓하고 세리아나와 바이샤가 제단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섰다.

노파는 종지 안에 담긴 붉은 염료에 엄지손가락을 담근 후 바이샤와 세리아나의 이마에 세로로 짧은 선을 그어 내렸다.

“두 분께 헬라임의 축복을…….”

그것까지가 노파의 일이었던지 고개를 숙인 노파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길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사람의 일이었다.

나뭇잎 위에 놓인 밀랍 색의 구슬을 집어 오른쪽 손바닥 위에 올린 세리아나와 바이샤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잡은 자세로 서로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을 쓰지 않고 상대방의 손 위에 올려진 구슬을 입으로 삼키자 얇은 막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달콤한 것이 흘러나와 두 사람의 입 안을 채웠다.

사막의 벌들이 만들어 낸 석청이었다.

미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꿀이 이렇게 깊은 맛을 낼 줄 몰랐던 세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라누아.”

“네, 쿠드라.”

모든 식이 끝이 났다.

세리아나는 제단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바이샤가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올렸다.

그리고 하얀 돌을 밟으며 제단을 내려오자 절대로 닿아선 안 되었던 붉은 길이 세리아나를 반겼다.

발바닥에 닿는 붉은 길의 감촉을 느끼던 세리아나가 작게 감탄했다.

‘진짜’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그의 옆자리는 오직 세리아나의 것이었다.

세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바이샤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가슴이 벅차오르고 만족감에 호흡이 가빠 왔다.

하얀 꽃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지만 세리아나의 눈에는 바이샤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 세리아나와 바이샤는 각자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두 사람은 그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앞으로 사흘간 공식적인 활동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응.”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어진 치아린의 설명에 세리아나는 얼굴을 붉히고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한 채 바이샤와 함께 이곳 ‘라누아의 방’에 사흘 밤낮을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들은 탓이었다.

“제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세요?”

“어떤 말?”

“쿠드라께서 한입에 삼키려고 하면 일단은 막아 보라고 했던 말이요.”

“치아린!”

놀리는 것이 분명한 치아린의 명랑한 목소리에 욕의를 걸친 세리아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래 봤자 귀 끝까지 붉게 물든 것을 숨길 수는 없었기에 치아린의 목소리에 웃음이 좀 더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도 그렇지만 라젠에서도 귀하신 분들은 미리 첫날밤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지요? 그때 배우신 대로만 하시면 문제는 없을 거예요.”

“으응…….”

그 순간 세리아나의 몸이 움찔거린 것을 치아린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혼식에 입었던 옷을 정리하느라 고개를 돌린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끝을 길게 늘이며 답하는 세리아나의 목소리를 부끄러움 때문이라 가볍게 넘겨 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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