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막의 신부 (7)
멀게만 느껴졌던 결혼식 날짜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결혼식에 입을 옷을 맞추고 결혼식의 순서를 익히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사이 시간이 그만큼이나 흘러가 버린 것이었다.
쿠드라와 라누아의 결혼식에 차이툰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어떤 실수도 모자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주먹을 불끈 쥔 치아린은 세리아나 이상으로 기합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라누아, 결혼식 순서는 전부 기억하고 계시죠?”
“응.”
“안 되겠어요! 다시 한번 순서를 살펴보시는 게……!”
“진정해, 치아린. 오늘만 해도 다섯 번 넘게 살펴봤는걸.”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응?”
“후우, 제가 라누아께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치아린의 등을 가볍게 도닥이며 세리아나는 그녀의 방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화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샛노란 포닐 꽃이 가득 꽂힌 화병은 결혼식을 축하한다며 아눌라가 가져온 선물이었다.
“누라비에게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세리아나의 시선이 아눌라의 선물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치아린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포닐 꽃의 꽃말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한 자의 눈물’이었다.
그녀가 없는 틈을 노려 저딴 것을 ‘축하 선물’이라 건네고 간 아눌라의 행동에 치아린이 이를 갈았다.
“아눌라는 바이샤, 아니 쿠드라를 사랑하는 걸까?”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는 장소에선 쿠드라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치아린의 충고를 떠올린 세리아나가 서둘러 호칭을 정리했다.
쿠드라뿐만 아니라 라누아의 이름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니 앞으로 그녀가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바이샤와 단둘이 있는 순간뿐일 것이다.
“혹시 내가 그녀의 자리를 빼앗은 건…….”
“절대로 아니니 안심하세요, 라누아.”
치아린이 단호하게 답했지만 세리아나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런 세리아나를 보며 치아린이 다시 이를 갈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저 꽃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결혼 선물로 들어온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식이 끝날 때까지 내쳐서는 안 된다는 전통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치아린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서 있는 시녀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경고였다.
또다시 아눌라를 이 방 안에 들였다간 용서하지 않겠다는 치아린의 눈빛에 시녀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라누아.”
“……응.”
“쿠드라에게 라누아는 이 세상 단 한 분뿐이십니다.”
라누아가 단 한 사람인 것이지 사랑이 단 하나라고는 하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가까스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벌써부터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곁에 그의 아내로 머무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던 주제에 욕심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바이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러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 왔지만 세리아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
그가 나를 라누아라 불러주는 것에 만족하자. 그 이상은 안 돼. 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니지요?”
“으응? 아니야. 그냥 내일 결혼식을 생각했어.”
어머니조차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아린은 달랐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세리아나의 안색을 살피고 기분을 살폈다.
어렸을 때도 받지 못했던 세심한 보살핌을 지금에 와서야 받고 있었다.
“절대로 붉은 길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했었지?”
“……네. 헬라임께 고하기 전까지는요. 정식으로 라누아의 이름을 받고 쿠드라와 함께 제단을 내려온 이후에야 밟을 수 있는 길이에요.”
찜찜한 듯 미간 사이를 구기면서도 치아린은 착실하게 세리아나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붉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헬라임의 아들인 쿠드라와 딸인 라누아뿐으로 신의 자식이 아닌 이들이 붉은 길을 밟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만약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가 붉은 길을 밟게 된다면 신의 분노를 사 온갖 부정한 것들에 휩싸여 살아가게 된다고 했다.
그런 여인은 당연하게도 라누아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쿠드라와 라누아의 결혼식을 보러 온 이들은 그 길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붉은 길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붉은 길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가마를 짊어진 전사들은 붉은 길 밖에서 라누아가 탄 가마를 어깨에 멘 채 제단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제단에 오르기 전까지 절대로 붉은 길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몇 번이고 강조하는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로라도 그 길을 밟아 바이샤의 곁에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밟지 않을게.”
결혼식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 저녁 향유에 몸을 절이다시피 마사지를 받아야 했던 세리아나는 머리를 맑게 해주는 향냄새를 맡으며 개운하게 눈을 떴다.
어스름한 새벽 오아시스의 물을 마시러 온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응.”
가림막 너머 들려오는 치아린의 목소리에 가볍게 답한 세리아나는 시녀들이 준비한 깨끗한 물로 얼굴을 씻어 졸음을 쫓았다.
시녀들을 물리고 침대에서 일어난 세리아나가 창가로 다가가 섰다.
키가 높은 나무가 없어서인지 오아시스의 반짝이는 표면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늘……!’
그녀는 새벽빛을 반사하는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바이샤를 떠올렸다.
그의 하나뿐인 라누아, 그의 유일한 아내.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무거우면서도 부드러웠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이에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치아린의 손에 이끌려 높이가 낮은 소파에 앉은 세리아나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금을 이용해 테두리를 화려하게 장식한 반투명한 유리그릇 위엔 갖가지 과일들이 먹기 좋은 형태로 잘려 담겨 있었다.
오아시스에서 자라난 열매는 라젠에서 먹었던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았다.
그녀가 베어 문 자리에서 노란 과즙이 넘쳐 그녀의 하얀 손가락과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에는 맞으세요?”
하얀 면을 끊어 만든 손수건으로 세리아나의 팔과 손에 흐른 과즙을 닦아 내며 치아린이 질문했다.
세리아나는 작은 입을 부지런히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연두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을 확인한 치아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내려앉았다.
“살이 더 빠지신 거 같아요.”
“괜찮아.”
우습지만 배고픔은 라젠의 귀족 여성들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허리둘레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허다한 곳이 라젠의 사교계였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그들 중에서도 더욱 가혹한 환경을 버텨 내야만 했던 귀족 영애였다.
어머니의 감시 아래 연회가 있기 일주일 전부터 단식을 해야 했던 과거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세리아나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치아린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아아, 제 주인께선 어찌 이리도 고우신지. 새신부만 아니었다면 홀랑 납치해서 저만 보고 또 봤으면 좋겠네요.”
“치아린은 늘 말을 재미있게 해.”
“진심인걸요?”
세리아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린 치아린은 부지런히 세리아나의 시중을 들며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눌라가 걸렸다.
누라비에게 후계자를 단속할 것을 다시 경고하긴 했지만 보란 듯이 포닐 꽃을 선물한 그녀가 이 결혼식이 무사히 치러지도록 협조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치아린?”
“아, 다 드셨나요?”
잠시였지만 말이 없어진 치아린의 상태가 이상한 듯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인 치아린이 양이 별반 줄어들지 않은 유리그릇을 눈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다가와 빠르게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사량이 좀처럼 늘지를 않으시네요.”
“아…… 미안.”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니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 주세요, 라누아.”
왕녀라는 고귀한 신분에 맞지 않게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뱉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긴 치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주인은 높은 신분의 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쉽게 하곤 했다.
‘처음엔 겁을 먹은 건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치아린은 빠르게 고개를 저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중요한 건 결혼식이었다.
거기까지만 생각한 치아린이 곁에 선 시녀를 향해 작게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욕조가 준비되고 따뜻한 물이 준비되었다.
가볍게 몸을 씻어 낸 세리아나는 시녀들과 치아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결혼식에 입게 되는 옷은 평소 그녀가 입던 옷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소매가 짧고 몸에 찰싹 달라붙는 흰색의 상의는 가슴 아래, 명치 부근에서 끊어져 판판한 배를 모두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평소 배꼽 위까지는 가려 줬던 옷에 비해 지나치게 짧은 상의였다.
품이 넉넉하게 만들어진 하얀 하의는 양옆에 달린 끈을 허리에 감아 묶는 것까지는 같은 모습이었지만 바지 끝단 부분을 발목 위에서 모아 끈으로 묶은 것은 평소와 다른 방식이었다.
훤히 드러난 배가 신경 쓰인다고 여길 때쯤 시녀들이 기다란 베일을 가져와 세리아나의 몸 위에 두르기 시작했다.
금사로 촘촘하게 수를 놓은 새하얀 베일이 세리아나의 허리를 한번 휘어 감고 아래로 늘어져 마치 치마처럼 퍼져 내렸다.
“결혼식을 끝마친 이후부터 두 분이 함께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선 붉은색 옷을 입게 되실 겁니다.”
신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기 전이었기에 당장은 붉은색을 몸에 걸칠 수 없다는 치아린의 설명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갖춰 입은 후엔 머리였다.
애교머리를 조금 남기고 옆 이마와 귀 옆머리를 땋아 가르마 없이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한데 모아 높게 묶은 후, 다시 다섯 갈래로 나눈 머리카락을 촘촘히 땋았다.
그리고 그것을 비틀어 동그랗게 말아 올린 후 금으로 만든 뒤꽂이를 모아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나뭇잎 모양으로 만들어진 머리핀을 여러 개 꽂아 틀어 올린 머리카락 주변을 장식하자 세리아나의 머리카락이 마치 지금 막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보였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치장은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발찌를 착용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라누아, 손을…….”
치아린의 말에 따라 세리아나가 두 손을 내밀었다.
치아린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양쪽 손을 한데 모아 잡은 후 그 손바닥에 이마를 살짝 대었다 떼어 냈다.
그리고 곁에 선 시녀가 내어준 작은 접시에 담긴 붉은 염료를 작고 가느다란 붓의 끝에 묻혀 세리아나의 손등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넝쿨이 자라나는 것처럼,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붉은색의 염료는 세리아나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손목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양손 모두에 그림을 그려낸 치아린이 이번엔 세리아나의 양쪽 발등에 이마를 붙였다 뗀 후 그곳에도 손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는 보석 없이도 얼마든지 몸을 화려하게 꾸밀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빠르게 말라 피부에 스며든 붉은 염료를 바라보는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붓을 내려놓은 치아린이 염료가 마르길 기다려 얇은 링 팔찌 서너 개를 세리아나의 양쪽 손목에 채워 주었다.
그녀가 손을 닦으며 물러나자 시녀들이 허리와 어깨에 둘렀던 것과는 또 다른 베일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길고 넓었던 직전의 것과 다르게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베일은 금사를 이용해 테두리에 수를 놓고 네 귀퉁이에 금빛 술을 단 형태였다.
시녀들은 그것을 세리아나의 머리 위에 씌웠다.
얇은 천 너머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앉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베일의 네 귀퉁이에 달린 술은 아마도 얇은 베일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하는 추 역할을 하는 듯했다.
“아름다우세요.”
“고마워.”
이제는 이동할 시간이었다.
라젠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이 가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입 안이 바싹 말라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약식으로 치렀던 첫 번째 결혼식 때보다도 더 긴장한 듯 발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되세요?”
“으응…….”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아시죠? 붉은 길은 쿠드라와 함께 제단에서 내려오기 전까진 절대로 밟으시면 안 돼요.”
“응. 알아. 알고 있어.”
치아린의 당부에 세리아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에 잔뜩 긴장한 세리아나에게 더 이상의 경고는 소용이 없을 것 같다고 치아린은 생각했다.
‘아눌라가 조용한 게 너무 수상해.’
할 수만 있다면 결혼식을 조금 늦추고 아눌라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누아…….”
“괜찮아, 치아린. 결혼식 순서랑 주의 사항은 몇 번이고 외우고 또 외웠는걸.”
“……네.”
불안을 애써 누르며 치아린이 미소지었다.
지금부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헬라임이 그녀의 딸, 라누아를 보살피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