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1화 (11/110)

#11. 사막의 신부 (6)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저은 세리아나가 바이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 결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차이툰이 왕녀를 요구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외에 들은 것은 들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국왕의 협박이 전부였다.

‘가짜 왕녀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어머니와 내 목을 직접 칠 것이라고 했었지……. 들킬 바엔 차라리 스스로 죽으라고 했었어.’

바이샤를, 차이툰의 사람들을 속이겠다고 결정한 것은 국왕과 라젠의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온전히 세리아나의 것이었다.

그것을 부당하다 여기면서도 세리아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라젠 왕실의 몇 명이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

“전대의 왕비님…… 그러니까 할머님께서 물려주신 것이라고 해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 초상화로만 뵈었지만요.”

“헬라임의 첫째, 사막의 여신인 라누아도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져.”

“네?”

“라누아는 차이툰의 여왕을 이르는 말도 되지만 새하얀 피부와 연두색 눈동자, 라일 꽃의 향기를 품고 있는 여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 어때? 대충 감이 오나?”

“저는…….”

“차이툰은 백 년 전 분열되었고 나는 그 조각난 사막을 하나로 모으려 하고 있어.”

“네, 알고 있어요.”

사막의 여러 갈래로 부는 바람을 하나로 모을 것이라는 예언을 타고난 적통 왕가의 핏줄이자 신의 자식이며 그 자체로 이미 신이라 불리는 남자. 바이샤는 백 년 만에 태어난 사막의 유일한 왕이었다.

사막을 건너오는 동안 치아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 세리아나는 조용히 바이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힘으로 정복하는 일은 쉬워.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론 미래를 장담할 순 없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군요.”

“그래.”

우습게도 세리아나는 그의 말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제 머리카락이, 눈동자가 라누아를 닮아 그의 곁에 올 수 있었다.

왕의 사생아로 태어나 그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 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응답하지 않던 신이 사실은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쿠드라의 곁에 전설 속 모습 그대로 나타난 라누아가 있다면…….”

“사막의 결합은 단단해지겠지.”

백 년 전 여러 개로 조각나 버렸지만 사막의 부족들은 여전히 헬라임을 섬기고 있었다.

그리고 헬라임의 자식이자 차이툰의 첫 번째 왕과 여왕이었던 쿠드라와 라누아의 전설을 듣고 자라났다.

옛 차이툰의 이름은 잊었지만 두 왕의 이름을 기억하는 그들에게 전설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세리아나의 존재는 여러 가지 의미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 분명했다.

“이용하기 위해 당신을 내 라누아로 맞이했다. 불쾌한가?”

“아니요.”

대답은 쉬웠다.

그의 물음에 생각이란 것을 할 필요도 없었다.

세리아나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고 또한 기뻐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것, 다른 사람도 아닌 바이샤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미소지을 수 있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바이샤는 웃으며 답하는 세리아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밝은 얼굴 그 어디에서도 거짓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제 쓸모에 오히려 감사하다 말하는 듯한 모습에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저를 이용하겠다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을 향해 저리 환하게 웃어 보일 수 있는 것일까?

“혹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나는 분명 이용하겠다고 했는데…….”

“아니요, 제대로 알아들은걸요.”

아주 잠깐,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반항 없이 그의 물기 어린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기댄 세리아나를 향해 웃음을 지운 진지한 얼굴로 바이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와 내 나라를 위해 강제로 당신을 데려왔어. 사랑과 축복만을 받아도 부족한 관계에 해야 할 짓은 아니지.”

“…….”

“부부가 되어야 하는 사이에 먼저 할 말은 아니지만…… 미안해.”

“저는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서 기뻐요.”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

“감사해요.”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바이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이샤는 자신의 얼굴에 그의 진심이 묻어나기를 헬라임께 기도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죽음이 찾아와 당신과 나, 둘 중 하나를 먼저 망자의 강으로 이끌더라도 나의 라누아는 오직 세리아나…… 당신뿐이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맹세가 너무나도 달아 세리아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같았고 전율이 이는 것도 같았다.

술에 취하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구름 위를 걷더라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바이샤의 목소리와 그의 두 손이 주는 온기에 취해 눈을 감고 있던 세리아나가 몸을 살짝 떨었다.

한밤중의 오아시스가 그녀의 체온을 야금야금 빼앗아 간 탓이었다.

“이만 돌아가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그녀를 지켜보던 바이샤가 손을 내려 세리아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물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빠른 움직임에 속절없이 허리를 내어 주고 만 세리아나의 얼굴이 다시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쿠드라, 내려주세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다시 쿠드라인가?”

“네?”

“좀 전엔 잘만 부르더니 모르는 척하는 건가?”

갑작스레 오아시스 안으로 이끄는 그의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과 그런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 바이샤의 모습 중 어느 것에 더욱 당황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세리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둘만 있을 때는 이름을 불러 줬으면 하는데.”

“네?”

“내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니 부탁드리지.”

“아, 저기…… 쿠드라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럼 나도 당신에게 허락을 구해야겠군.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나의 라누아?”

“네, 네. 물론……!”

“허락을 받아 다행이군.”

세리아나가 당황한 사이 가슴까지 차올랐던 물이 어느새 발목 아래로 내려왔다.

물속을 걷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긴 다리로 성큼 걸어 뭍에 닿은 바이샤는 아직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세리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작군.”

“네?”

“식사에 특별히 더 신경 써라 일러두지.”

“아뇨, 그러실 필요는…….”

“내 여왕의 일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냥 받아들여.”

“…….”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그녀를 이용하겠다 말했을 때도 웃던 세리아나가 묘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바이샤가 질문했다.

그런 그를 보며 잠시 망설이던 세리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부터 여왕이라고…….”

“응? 그게 이상한가?”

“보통은 왕비라고 하지 않나요?”

왕의 아내는 왕비라 불렸다.

그러니 사막의 왕 쿠드라의 아내인 라누아는 여왕이 아닌 왕비라 불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샤는 그녀를 비(妃)라고 부르는 대신 여왕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세리아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의문을 표시했다.

“라젠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은 차이툰이니까.”

“네?”

“쿠드라와 라누아 모두 헬라임의 자식인데 어떻게 한 사람은 왕이 되고 남은 한 사람이 비(妃)가 되겠어?”

“그런 건가요?”

“그런 거야.”

“뭐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쿠드라, 그만하시고 이제 라누아를 내려놓으시죠?”

멍한 얼굴로 바이샤의 답을 듣고 있던 세리아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치아린의 목소리에 자신이 아직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쿠, 쿠드라 내려주세요!”

“그럼 라누아께서 곤란해지실 텐데? 물에 흰 천이 젖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시나?”

순간 세리아나는 자신이 잠옷 차림으로 오아시스를 찾아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아래로 향한 시선 끝에 물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잠옷이 비쳤다.

“꺄악!”

몸을 바둥거리며 기어이 그의 품에서 벗어난 세리아나가 몸을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마른 등과 가느다란 허리가 젖은 천 너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바이샤는 치아린의 따가운 눈총에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쿠드라께서 이렇게 파렴치한 짓을 하실 줄 몰랐어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다만?”

“헬라임에 맹세하실 수 있으세요?”

“어째 가면 갈수록 말이 불충해지는군.”

“전 원래 이랬거든요?”

“카얀은 대체 너의 그 어디를 보고 반한 거지?”

“제 사랑하는 카얀의 시력엔 문제가 없으니 괜한 걱정은 마시고 앞에서 비켜 주세요. 라누아를 모시고 갈 수 없잖아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타월로 세리아나의 몸을 감싼 치아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럴 때의 치아린은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이샤가 순순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치아린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는데 괜한 시비를 사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라누아 이제 일어나셔도 괜찮아요. 타월을 챙겨 오길 잘했네요.”

“고마워, 치아린.”

“별말씀을요.”

치아린에게 기대어 일어난 세리아나가 타월의 앞부분을 단단히 여미며 곁눈질로 바이샤의 눈치를 살폈다.

알몸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다름없는 상황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럼 라누아를 부탁하지.”

“얼른 가버리세요.”

“라누아, 치아린의 뾰족한 가시를 조심하시길.”

“쿠드라!”

“하하하!”

세리아나와 치아린에게 유쾌한 얼굴로 인사한 바이샤는 그녀들이 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세리아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야?”

“잠자리가 불편하실까 싶어 살피러 갔더니 라누아가 안 계셔서요. 혹시나 해서 와봤죠.”

“그렇구나……. 정말 고마워.”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타월의 끝자락을 잡아 세리아나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던 치아린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나 오래 오아시스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것인지 손끝에 닿는 세리아나의 피부가 차가웠다.

사막의 밤은 낮과 달랐다.

차가운 밤바람만 걱정하면 될 줄 알았더니 오아시스에 풍덩 몸을 담그기까지 하다니! 바이샤야 원체 몸에 열이 많은 데다 한참 말을 달려 돌아온 직후이니 시원했을지 몰라도 연약한 그녀의 주인은 아니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라누아.”

“꺅!”

타월로 물기를 대충 제거한 치아린이 세리아나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마치 남자가 여자를 안는 듯한 자세였다.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지른 세리아나가 씨익 웃고 있는 치아린을 올려다보았다.

“무, 무겁지 않아?”

“너무 가벼워서 걱정인데요? 식사를 특별히 더 신경 쓰도록 할게요.”

바이샤가 뱉은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 치아린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세리아나는 그런 그녀를 감탄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방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다시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쿠드라께서 즐겨 마시는 차입니다. 라일 꽃으로 만들었어요. 우기 때 꽃을 피우는데 연보랏빛 꽃잎이 무척이나 아름답죠.”

“그렇게 아름다워?”

“오아시스 근처에서 자라는 꽃이니 곧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조만간 첫 번째 우기가 찾아오거든요.”

“기대된다…….”

“네, 충분히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러니 일단 오늘은 이만 주무세요. 내일부터 준비할 게 많아요.”

“결혼 준비 때문에?”

“네, 그런 이유로 아쉽게도 쿠드라의 얼굴은 당분간 보지 못하실 거예요.”

“아…….”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네요, 라누아. 너무 실망하시는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차이툰의 전통상 결혼식 당일이 될 때까지 신랑은 신부의 얼굴을 보아선 안 된다.

라젠에서 식을 먼저 올린 바이샤와 세리아나의 경우가 조금 특별할 뿐. 거기에 더해 평소엔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다니는 여자라 할지라도 결혼이 정해지면 그날부터 식이 열리는 날까지 베일 속에 얼굴을 가린 채 생활해야만 했다.

‘헬라임의 다섯 번째 자식 게하가 신부를 질투해 얼굴에 상처를 남긴다고 했던가?’

질투가 심한 여신에게서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전통이라고 했었다.

세리아나는 그것을 사막의 거친 바람으로부터 결혼식까지 신부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풍습이라 이해했다.

“서운하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결혼식까지 시간은 금방 흘러갈 테니까요.”

“응.”

“잠드는 데 도움이 되는 향을 피워 둘게요. 피곤하셨을 텐데 푹 주무세요.”

“고마워, 치아린.”

“안녕히 주무세요, 라누아.”

푹신한 이불 속에 누운 세리아나는 눈을 감고 바이샤를 떠올렸다.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죽음이 찾아와 당신과 나, 둘 중 하나를 먼저 망자의 강으로 이끌더라도 나의 라누아는 오직 세리아나…… 당신뿐이다.’

귀가 녹아내릴 듯한 바이샤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감히 그의 사랑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외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그녀를 아내로 삼아 존중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그의 책임감을 사랑으로 착각해 비참한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상관없어.’

그 착각 속에 질식해 죽어 버리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유일한 아내, 하나뿐인 라누아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세리아나는 습관처럼 자신의 비극적인 끝을 떠올리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마냥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픈 만큼 달콤하고 눈물이 흐를 만큼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불쌍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외사랑을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이루게 된 세리아나의 잠든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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