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막의 신부 (5)
‘그냥 방에 있을걸!’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괜한 호기심에 이끌려 행동한 결과 세리아나의 심장은 지금 터져나갈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분명 얼굴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세리아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방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중이었다.
“내 라누아께선 조금 더 경계심을 기르는 것이 좋겠어. 여기가 안전한 곳임에는 분명하나 사막의 밤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거든.”
“네, 죄송…….”
“아직 잘 몰라 그러신 것일 테니 내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
“아……감사…….”
“딱히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도 아니지.”
“…….”
세리아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바이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여기서 그에게 무슨 말로 답하든 멍청한 대답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 입을 다무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갑자기 조용해지시는군. 놀라셨나?”
“조금……이요.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서…….”
“전하지 말라 했어.”
“네?”
“낯선 여정이었을 테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
“그런데 이렇게 밤 산책을 즐기고 계실 줄 몰랐군.”
바이샤가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그는 달빛 아래에서도 확연하게 티가 나는 붉은 얼굴을 감추려 애쓰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라젠에서 보았을 때와 비교해 별다르게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달빛 아래 창백하게 보일만치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어 인형처럼 보이던 그녀의 외모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군’
그에게 마지막까지 반항하고 있는 우루 부족의 문제를 전부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기습작전에 능한 우루는 사막에 남은 마지막 조각이었고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부족이었다.
바이샤가 사막의 왕이라는 것을, 쿠드라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그들을 처리하고자 나선 길이었으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런 그를 맞이한 치아린은 세리아나에 대한 칭찬을 끊임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호들갑을 떠는 치아린의 모습에 익숙한 바이샤가 움찔할 정도로 열성적인 태도였다.
칭찬으로 시작해 칭찬으로 끝나는 말을 들으며 대체 그 작은 여자가 치아린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궁금해지는 것도 잠시……. 도무지 끝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치아린의 말에 질려 오아시스로 도망쳤다.
제대로 된 길로 가라는 잔소리를 무시하고 궁의 벽을 타고 올라 지붕을 내달렸다.
오아시스로 가는 그만의 지름길이었다.
잔소리의 마지막에 라누아의 잠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불경스러운 소리가 섞여 있었던 것 같았지만 무시해 줬다.
가끔은 이런 자비도 필요한 것이다.
다시 벽을 타고 내려와 오아시스에 몸을 던졌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그가 헤엄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러길 잠시…… 물 위에 가만히 누워 달을 올려다보았던가? 하얀 달이 한껏 치솟았던 짜증을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우루도 결국 그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그가 타고난 예언이었고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였으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바이샤는 그렇게 마지막 짜증을 털어버리고 오아시스를 벗어나려 했다.
만약 그때 홀린 듯 오아시스로 향하는 세리아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대로 제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막에 대한 거부감은 없고 오히려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던가?’
바이샤는 오아시스로 도망치기 전 치아린이 끊임없이 떠들어 대던 말 중 쓸 만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세리아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전설로 전해지는 라누아의 외형과 꼭 닮은 외모 외에도 이용할 부분이 있는 여자였다.
‘가문이나 부족의 힘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차이툰의 정세에 어둡고 아직은 라누아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알지도 못한다.’
아무런 힘도 없는 타국의 여인. 라누아로 썩 어울리는 조건은 아니었지만 바이샤는 라누아를 닮은 세리아나의 외모만큼이나 그 조건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거기다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도 못하는 여인이다.
그가 이용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라누아였다.
사실 쿠드라와 라누아의 힘이 동등한 차이툰에서 그가 세리아나를 이용한다는 것은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 라누아의 자리가 비어 있었던 상황과 바이샤가 받은 예언, 그리고 그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전대 라누아의 종이 제 주인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꾸려 했으나 그것은 진짜 라누아의 힘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이툰의 백성은 자리를 비운 라누아보다 자신들 앞에서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며 예언대로 사막을 정복하기 시작한 쿠드라에게 열광했다.
눈에서 먼 신의 힘보다 바로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검 앞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그것은 궁 안의 사정도 마찬가지인지라 본래 제 주인 외의 다른 이의 명령은 듣지도 않고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을 라누아의 종, 치아린도 지금은 바이샤의 명에 따르고 있었다.
새로운 라누아가 등장한 이상 치아린과 라누아를 섬기는 신관들에게 쿠드라가 미치는 힘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차이툰의 모든 것이 바이샤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샤는 제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는 세리아나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주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사랑으로 맺어져도 버티기 버거운 자리를 자신이 좀 더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타국의 힘없는 여인을 데려온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바이샤는 자신의 라누아에게 조금은 유순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수영할 줄 아나?”
“네? 아, 그게…….”
“할 줄 모르는군.”
“……네…….”
자신감 없는 태도로 흡사 죄를 지은 것처럼 시선을 돌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이 조금 못마땅하다 느낀 순간 바이샤는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르쳐 주지.”
“네?”
“이제부터 이 궁에서 살게 될 텐데 기왕이면 오아시스를 완벽하게 즐기며 살아야지. 싫나?”
“아뇨, 그게 아니라…… 치아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온 거라서요. 혹시나 저를 찾기라도 하면 미안해서…….”
“……경계심은 부족하지만 배려심은 갖춘 것 같아 다행이군.”
거절하는 말에 혹여 바이샤의 기분이 상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세리아나는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치아린이라면 더더욱. 당신은 나의 라누아고 이 차이툰의 여왕이다. 무엇이든 당연하게 행동해. 그것을 두고 트집 잡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진짜…… 아니, 정식으로 라누아가 된 건 아니니까요.”
진짜가 아니라면 가짜. 세리아나는 자신이 가짜 왕녀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아내라, 라누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샤의 생각은 세리아나와 다른 듯했다.
물론 그는 세리아나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세리아나가 자신의 자격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불쾌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나의 여왕, 나의 라누아라 말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진짜와 가짜를 판단하지?”
“……네?”
“내가 당신을 라누아로 맞이한 그 순간부터 당신은 라누아고 나의 아내다.”
“하지만 차이툰의 신…… 그러니까 헬라임께…….”
“우리의 헬라임께선 그렇게 꽉 막힌 분이 아니야. 적당한 유연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지.”
카얀이 들었다면 신께 올리는 말씀으로는 경박하다 고개를 저었을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 없었고 바이샤의 눈앞에 서 있는 이는 헬라임의 자비가 어디까지 닿는지 알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권리만을 당연히 누리라는 것이 아니야. 의무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한다는 말이니 너무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니, 이 말이 더 부담스러운가?”
“……감사해요.”
“그 인사는 이번까지만 받지. 자 그래서…… 수영은?”
“아……!”
다시 손을 내미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는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에 거절할 용기를 조금 얻은 것이다.
그녀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모으며 바이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장 수영을 배우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은 궁에서의 첫날이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셨지만 그래도 치아린에게 미안한걸요.”
“그래? 그럼…… 잠깐 발을 담그는 것 정도로 하지.”
“네?”
거칠어 보이는 손이 세리아나의 손을 낚아챘다.
순간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던 세리아나는 그의 커다란 손이 생각보다 부드럽게 자신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껏 오아시스를 찾아왔는데 그 모습을 눈으로만 담는 건 너무 아깝잖아?”
“자, 잠깐만 바이샤! 신발, 신발이요!”
“아, 그렇군.”
걸음을 멈춘 바이샤가 짓궂은 미소를 띤 채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한 세리아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바이샤의 모습에 짧게 비명을 질렀다.
“꺅!”
“겁먹을 필요는 없는데.”
“뱌이샤, 잠깐만……!”
그의 어깨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안겨 발버둥을 치느라 발끝에 걸려 있던 신발이 손쉽게 벗겨졌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바둥거리는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린 바이샤는 성큼 발을 놀려 오아시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발은 해결했으니 문제없지?”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질문하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악의 없는 그러나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한 그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을 뿐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차가운 거울 너머 바라보기만 했던 남자가 순식간에 한 호흡 거리로 다가와 있었다.
거리뿐만 아니다.
심지어 그의 품에 안겨 있기까지 했다.
세리아나는 무거운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풀벌레가 우는 소리보다도 크게 들리는 제 심장 소리에 놀라 숨을 삼켰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네?”
“빤히 바라보시기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서.”
“아! 죄, 죄송합……꺄악!”
뱌이샤의 얼굴이 가까웠다.
고개를 돌려 마주 본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세리아나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렀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몸을 크게 뒤로 젖힌 탓에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바이샤도 그녀가 그렇게 놀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순간 그녀의 허리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런. 괜찮나?”
“쿨럭쿨럭, 네, 흡, 괘, 괜찮…… 쿨럭.”
고작 무릎 높이의 물에 빠진 것이지만 추락하듯 떨어진 탓에 세리아나의 모습은 좋게 봐주어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던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내민 바이샤의 모습에 다시 얼굴을 붉혔다.
눈치도 없이 계속해서 기침이 튀어나왔다.
“내 라누아께서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시는군. 아니면 평소 버릇이신가?”
“그건…… 아니에요. 그저 당황해서…… 그랬어요.”
“그럼 내 잘못이군.”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손을 잡아 손쉽게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물에 젖은 천이 살갗에 달라붙어 몸이 무거워졌다.
세리아나는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지는 바이샤의 손이 이끄는 대로 조금 더 깊은 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왕 젖은 참이니…… 달이 뜬 밤에는 오아시스의 물이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지거든.”
“……그런가요?”
“사막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지만 오아시스의 물은 천천히 데워지고 천천히 식거든. 조만간 치아린이 찾아올 테니 그때까진 이렇게 있지.”
아무런 말로 남기지 않고 혼자 움직인 그녀를 치아린이 어떻게 찾는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세리아나는 일단 그 의문을 속으로 삼켰다.
바이샤가 그렇다고 하니 그녀는 그냥 믿으면 될 것이다.
바이샤는 오아시스의 물이 세리아나의 가슴 위까지 차오른 이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발아래 간지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 거대한 샘의 보이지 않는 물결일 것이다.
세리아나는 달을 등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이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선 사과를 하지.”
“네?”
“누구의 귀도 닿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그 과정에서…… 내가 좀 무례했어.”
“아니요!”
“응?”
“아, 저…… 그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라 확신한 세리아나가 고개를 숙여 바이샤의 눈을 피했다.
어쩜 이렇게 바보 같고 멍청한 모습만 골라 그에게 보여주는지……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바이샤는 멀리 오아시스를 감싼 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림자라 부르는 호위전사들이 차마 오아시스의 안쪽까지는 따라오지 못하고 수풀의 그림자에 숨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훈련을 받아 멀리서도 소리를 듣고 들리지 않는다면 입술의 움직임이라도 읽어 낼 이들이었지만 눈과 귀가 있어도 무엇을 듣고 보았는지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바이샤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세리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라누아로 받아들인 이유,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