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사막의 신부 (4)
아눌라가 방을 나간 후 세리아나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고 있었다.
그래 그녀는 전쟁의 전리품이었다.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치아린의 호의에 잊고 있었던 사실을 아눌라를 통해 깨닫게 된 세리아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머니 말씀처럼 난 멍청한 게 분명해. 바이샤의 신부가 된다는 생각 말곤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어.’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빨리 파악해야 했다.
그녀의 실수는 그녀뿐만 아니라 라젠에도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거기다 그 잘못이 반복된다면 그의 곁에 있을 수도 없게 된다.
“라누아? 괜찮으세요? 식은땀이……!”
“아니, 아니야……. 피, 곤해서 그래.”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깨끗하게 씻으시고 마사지를 받으시면 피곤이 금방 풀리실 거예요.”
“……고마워.”
세리아나에 대한 걱정으로 아눌라에 대한 분노를 빠르게 정리한 치아린이 짧게 두 번 손뼉을 치자 방의 오른쪽 쪽문을 통해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눈 아래의 얼굴을 검은 베일로 가린 시녀들은 치아린의 작은 수신호를 따라 능숙한 솜씨로 목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몸을 담그기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목욕물이 준비되고 시녀들의 손아래 어느새 알몸이 되어 버린 세리아나가 욕조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꽃잎이 뿌려진 욕조 안에서 좋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라르망의 꽃잎입니다. 그 향을 깊이 들이마시면 피로를 푸는 데 도움을 주죠.”
치아린은 얇고 하얀 욕의를 시녀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시녀의 도움을 받아 품이 넓은 욕의를 걸친 세리아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이툰에선 욕조에 띄운 꽃잎이나 허브에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욕의를 입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막에서 자라는 것들은 암만 아름다워도 가시를 지니고 있거든요.”
“전부 가시를 지닌 거야?”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이 조심하기에도 좋아요. 정말 대부분이 다 가시를 두르고 있거든요.”
“그렇구나.”
그녀의 손에 이끌려 욕조에 몸을 담근 세리아나는 물에 젖은 얇은 욕의가 피부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작은 욕조 안에도 물결은 이는 것인지 꽃잎과 함께 물을 따라 움직이는 얇은 천이 피부에 닿아 간질거렸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욕조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으니 시녀 하나가 다가와 세리아나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씻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성기게 땋은 머리카락 위로 붉은 꽃잎 몇 개가 달라붙어 묘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마르기만 한 줄 알았더니.’
치아린은 젖은 욕의 아래 드러난 세리아나의 몸이 완연한 여성의 곡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사막의 뜨거운 햇볕에 익숙지 않은 세리아나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을 감싸는 옷을 입었던 탓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었다.
차이툰의 여자들처럼 튼튼해 보이는 몸은 아니었지만 가느다란 목과 도드라진 쇄골, 아담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이루는 선이 아름다웠다.
납작한 아랫배와 그 아래 길게 뻗은 다리는 어떠한가!
욕조의 가장자리를 잡은 세리아나의 손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하나씩 톡톡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치아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탓에 다른 여인들을 보며 그 미모에 감탄해 본 일이 없는 치아린이었다.
그러나 욕조 안에 누운 세리아나는 그녀의 감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쿠드라께서 사랑으로 맞이한 라누아는 아니지만 분명 좋아하게 되실 거야.’
치아린은 바이샤를 떠올리며 확신했다.
쿠드라이기 이전에 바이샤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려 자라 온 친구였다.
나이 차가 있음에도 동년배의 친구, 아주 가끔은 오빠처럼 느껴지는 그는 저돌적인 성향을 지닌 사내였고 그 성향은 한 가지에만 통용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바이샤는 입버릇처럼 말해 오곤 했다.
자신의 사랑은 오직 라누아에게로만 향할 것이라고. 올해로 스물다섯, 한창 혈기왕성한 연령대의 남자였지만 바이샤는 제 맹세를 지키기라도 하듯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아눌라가 몸을 몇 번이나 던졌지만 모두 무시하셨지.’
조금 전 라누아를 찾아와 무례를 범한 아눌라를 떠올리니 다시 이가 갈렸다.
‘누라비에게 진지하게 경고하는 것이 좋겠어.’
자식의 무례는 부모의 책임이었다.
자신을 은연중에 제 종처럼 여기고 쿠드라의 침실로 숨어들기를 서슴지 않았던 아눌라였다.
거기에 더해 조금 전 그녀가 보인 모습은 치아린이 보기에 위험수위를 충분히 넘어서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눌라뿐만 아니라 시카 부족 역시 바이샤의 눈 밖에 나게 될 것이다.
시카 부족은 바이샤에게 아직 쓸모가 남아 있는 부족이었다.
그가 사막을 완전히 통일할 때까지는 이용할 패를 최대한 많이 남겨둬야만 했다.
“라누아, 물이 식기 전에 몸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응.”
아눌라에 대한 생각을 저편으로 밀어버리며 치아린은 세리아나에게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딴 여자보다야 눈앞의 제 주인에게 집중하는 것이 백만 배는 더 이로운 일이었다.
그날 밤, 세리아나는 아직은 어색한 자신의 방 창문에 기대어 달이 비추는 오아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아눌라를 만나 얻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그녀의 잠을 앗아가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세리아나는 피오르 백작가에 홀로 남은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엘라이어는 라젠의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백작가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세리아나는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거로 상처받는 사람은 아니지만…….’
왕의 아이를 태중에 품은 엘라이어가 백작과 결혼해 백작 부인이 된 것은 피오르 백작의 전처가 죽은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저택의 그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와 결혼하는 대가로 백작의 작위를 받은 피오르 백작도 마찬가지여서 엘라이어는 백작가에 들어간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백작과 동침한 적이 없었다.
거기다 어머니를 잃은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루카르도는 매일매일 제 아비를 향해 악을 쓰고 새어머니가 된 엘라이어에게 날을 세웠다.
마치 두 사람이 제 어미를 빼앗은 것처럼 화를 냈었다.
후일 왕의 명령 때문에, 그리고 가문을 위해 아버지가 백작위를 받고 엘라이어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비에 대한 화를 어느 정도 거두기는 했다.
그러나 백작 부인에 대한 적의는 여전해서 그는 그녀의 딸인 세리아나까지도 미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전혀 상대해 주지 않았으니까, 나에게 풀 수밖에 없었을 테지.’
세리아나는 루카르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암만 악을 쓰고 화를 내고 모욕을 주어도 어머니는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루카르도를 무시했다.
그녀에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백작의 아들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화가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라고 부르며 주변을 맴도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세리아나는 그 사실을 일곱 살에서 여덟 살로 넘어가던 시기에 알게 되었다.
태어나 가장 많은 눈물을 쏟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백작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움츠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멀리 루카르도의 모습이 보이면 몸을 돌려 달아났다.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화가 된다는 사실이 서글퍼 매일매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들키게 되면 더 미움받게 될까 봐 아무도 모르게 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러다 바이샤를 만나게…… 아니 보게 된 거니까 나쁜 일은 아니었을 거야.”
매일 울기만 하던 아이는 거울 속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참는 법을 알게 되었고 혼자 감정을 추스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차가운 거울의 표면에 맺힌 남자의 모습은 너무 눈이 부셨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사랑이 되었다.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는데…….”
그런데 그랬던 자신이 바로 그 남자, 바이샤의 아내가 되다니.
이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으면 대체 무엇을 기적이라 불러야 할까?
세리아나는 밤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오아시스를 내려보며 빨리 시간이 흘러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창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오아시스라고 했었지?”
생각이 흘러 오아시스에 닿았다.
세리아나는 목욕 시중을 받으며 흘려들었던 치아린의 말을 떠올리며 잠깐 시선을 내려 자신이 걸친 것을 바라보았다.
목욕을 하기 위해 입었던 투박한 욕의만큼이나 가볍고 새하얀 잠옷이었다.
라젠과는 다르게 여자의 몸을 옥죄이는 속옷이 없는 것은 반가웠으나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잠옷 안쪽에 걸친 것은 아래의 속옷 한 장이 전부였다.
쉽게 말하자면 알몸 위에 얇은 천 하나를 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외출에는 절대 적합하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오아시스 주변은 경계가 삼엄하다고 했으니까…….”
궁 뒤편에 닿아있는 오아시스는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장소였다.
바위산의 또 다른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사막의 백성들에게 차별 없이 나누어졌지만 궁과 맞닿은 오아시스는 달랐다.
헬라임의 자식인 쿠드라와 라누아를 위한 곳. 그리고 경계가 가장 삼엄해 불순한 목적을 가진 이가 접근할 수 없는 곳. 라누아의 방이 오아시스에 접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잠깐만 보고 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세리아나는 손끝으로 잠옷을 살짝 쓰다듬고는 커다란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라젠에 있을 때의 세리아나였다면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사막의 낯선 공기가 세리아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설픈 동작으로 낑낑거리며 커다란 창문을 넘어 방을 빠져나온 세리아나는 얇은 실내화 바닥으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거진 풀숲 가운데 오래전부터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 듯 풀이 자라지 않은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야가 밝아졌다.
“와아…….”
하늘의 둥근 달을 담고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였다.
창문 너머로 바라만 볼 때도 크다 느꼈으나 가까이에서 본 오아시스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세리아나는 눈앞에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했던 바닥이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모래로 바뀌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워…….’
아름다웠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사람이 아닌 신의 손길로 만들어진 장소가 이러할까?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세리아나는 저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 바람이 오아시스의 수면을 어루만지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달그림자가 일렁이고 풀잎들이 바람에 춤을 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나가 이곳 오아시스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거울 너머 바이샤는 종종 오아시스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다.
그것은 달이 뜬 저녁일 때도 있었고 해가 쨍쨍한 낮일 때도 있었다.
어느 때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치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기도 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오아시스의 전체적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세리아나는 자신의 상상력이 무척이나 빈약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름 책을 많이 읽어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 왔지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세리아나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오아시스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신발을 신은 채 오아시스에 몸을 담그는 건 금지되어 있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세리아나가 당황한 얼굴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주변을 살폈다.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홀린 듯 걸어 오아시스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그녀로선 살짝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내 라누아께선 밤 산책을 즐기시나 보군”
물결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세리아나는 오아시스 안쪽에서부터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달그림자가 진 얼굴 속 강렬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세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수영 쪽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
“쿠, 쿠드라…….”
조금 전까지 수영을 즐긴 듯 바이샤의 검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짙은 색 살결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쩐지 묘한 색기를 풍기는 모습이었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흐르는 물방울을 좇아 저도 모르게 시선을 움직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에 젖은 남자의 몸이 주는 아찔한 시각적 충격에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이 떨려왔다.
“라누아?”
“저는…… 그러니까…… 자, 잠깐만 오아시, 스를 보고 싶어서…….”
“아, 밤 산책이셨군.”
오아시스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세리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장에선 벗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리아나에게 그런 바이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