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사막의 신부 (2)
치아린은 물기가 도는 연두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 주인의 새하얀 손을 붙잡았다.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고 무거워졌다.
이 분위기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치아린은 제 주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꼴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쪽 눈을 찡끗하며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건 그렇고 라누아, 너무하세요.”
“응?”
“쿠드라에 대한 라누아의 마음이 너무 투명하게 비쳐서 제가 다 부끄럽잖아요.”
살짝 어두웠던 얼굴이 다시금 붉은빛으로 물드는 것이 반가워 치아린은 계속해서 세리아나를 놀려댔다.
이리 순진해서야 바이샤에게 한입에 잡아먹히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조만간 다가올 두 사람의 초야가 조금 걱정되었다.
아니 확실히 걱정이다.
그녀가 아는 바이샤라면 이 순진한 라누아를 뼛속까지 핥아 한입에 홀랑 삼켜 버릴 것이 분명했다.
“라누아.”
“응?”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듣고 꼭 명심하세요.”
“뭐, 뭔데?”
갑작스럽게 다시 진지한 얼굴로 변해 버린 치아린을 바라보며 세리아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라도 말입니다. 쿠드라께서 한입에 삼키시려고 하면 일단은 막아 보세요.”
“한입?”
“먼저 시집간 제 언니의 말이 초야에 여인이 기세를 잡지 못하면 끝이라고 하더군요.”
“저기…… 치아린?”
“한 번은 튕기고 쿠드라의 몸이 달아올라 라누아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 같을 때 슬쩍…… 아시겠죠?”
“치아린!”
치아린은 비명을 지르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부끄러움이 극에 달하면 사람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두 사람이 일으킨 작은 소란에 카얀이 말머리를 돌려 마차로 다가왔다.
그리고 카얀은 등받이용 쿠션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세리아나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웃고 있는 치아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것은 좀 이상한 모양이 아닌가?
카얀은 전사들의 호기심이 마차 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하하, 카얀! 내 사랑!”
“치아린?”
카얀은 치아린의 목소리에 더더욱 쿠션 속으로 깊이 얼굴을 숨기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당황했다.
뭔가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인데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순진하신 라누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난 아무 말도 못 해요.”
“뭐?”
“치아린!”
쿠션 속에서 뭉개진 세리아나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말 뒤로 아주 작게 ‘너무해.’라는 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지만 현명한 사막의 전사이자, 쿠드라의 충실한 종인 카얀은 듣지 못한 척하기로 했다.
“속도를 높여요, 카얀. 이 사랑스러움을 나 혼자만 보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의아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 카얀이 다시 일행의 선두에 섰다.
마차 안의 작은 소란이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라누아의 명예를 들먹인 치아린 덕분에 더는 궁금해할 수도 없었다.
“속도를 높인다. 모두 주변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네!”
전사들의 대답을 들으며 카얀이 태양의 위치를 살폈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쿠드라보다 빨리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문을 푸는 건 오아시스에 도착한 이후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춰 버린 세리아나를 태운 마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누가 보아도 ‘초록색’이라 답할 만큼 우거진 숲을 이룬 곳. 세리아나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오아시스의 규모에 잠시 말을 잃었다.
거울 속 그를 둘러싸고 있던 푸른빛으로 어림짐작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놀라셨나요, 라누아?”
“응? 응.”
“쿠드라의 오아시스는 이 사막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거울 너머로 그 일부를 보기도 했고 치아린에게 그의 오아시스가 특별하다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메마른 땅과 선을 그은 듯 눈에 띄는 초록색의 경계를 넘으니 아까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책으로 익힌 오아시스는 사막 짐승들의 목을 축일 만한 공간, 그리고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들을 위한 휴식처일 뿐이었다.
그 규모도 사람 네다섯이 겨우 누울 만큼의 크기, 그것이 보통이라고 책은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젠의 수도만큼이나 거대한 이 오아시스는 뭐란 말인가?
“조만간 우기가 찾아오면 이 길을 따라 꽃이 만개할 거랍니다.”
“세상에…….”
정리된 길을 따라 오아시스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높게 솟은 나무와 거대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마른 사막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차이툰의 백성들은 바위와 모래, 자갈 등을 이용해 집을 지어요. 쌓아 올리는 것이 귀찮은 이들은 거대한 바위의 속을 파내 집으로 삼기도 하죠.”
“바위를?”
“네, 솔직히 저는 바위를 파내는 쪽이 더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세리아나가 시선을 빼앗겼던 거대한 바위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집인 듯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치아린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거울 속 그를 감싸고 있던 흐릿한 풍경들이 사실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넋을 놓고 있는 세리아나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몸을 굳혔다.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비난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그녀를 향해 날아온 것이 아닐까? 세리아나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라누아를 알아본 모양이네요.”
그러나 그것은 세리아나의 착각이었다.
온화한 치아린의 목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움직인 세리아나는 자신에게로 날아온 그것이 ‘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아시스 안쪽으로 들어오며 짙은 녹색의 풀잎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 하얀 꽃을 본 기억은 없었다.
어디에서 날아온 거지? 그녀가 긴장을 풀고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마치 비가 내리듯 수많은 꽃잎이 세리아나가 탄 마차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누아!”
“라누아!”
“라누아!”
짙은 향기를 품은 꽃잎들에 파묻혀 고개를 든 세리아나는 그녀가 탄 마차를 둘러싸고 꽃을 뿌리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누아를 외치는 이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비처럼 쉼 없이 쏟아지는 꽃잎에 치여 그녀의 머리 위에 둘렀던 베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세리아나의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연둣빛 눈동자, 하얀 얼굴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누군가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신께서 돌아오셨다!”
그 목소리에 사람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자 세리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 것에 적응할 수 없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 주변을 살피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을 바라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눈빛에 치아린이 작게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백성들의 이러한 환대는 분명 누라비의 작품일 것이다.
백성들이 그들의 라누아가 라젠의 왕녀라는 사실에 불만을 품지 않도록 여러 가지 일을 해놓은 것이 분명했다.
치아린은 누라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잔머리는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행의 가장 선두에 있는 카얀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길을 열어요, 카얀. 환영식은 끝이에요. 라누아를 계속해서 길바닥에 세워 둘 생각은 아니죠?”
그녀의 목소리에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앞을 막았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순식간에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세리아나는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그녀를 향해서 뿌려지고 있는 꽃잎을 바라보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생겼다.
[나의 백성들은 당신을 반길 거다. 틀림없이.]
라젠의 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을 맞추고 부부임을 인정받았던 그 날, 바이샤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사막의 백성들은 세리아나를 반겨 줄 것이라고.
그때는 그 말이 정략혼을 치르고 낯선 땅에서 살게 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바이샤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아직도 뜨거워서 막연히 다정한 사람이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정말…… 나를 환영해 주고 있어.’
그들의 이 환호가 진심이라는 것은 스치는 이들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세리아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이 마주친 이들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가 볼을 살짝 물들인 채 미소지어주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며 다시 라누아의 이름을 외쳤다.
“금세 익숙해지셨네요.”
“이렇게 환영해 줄 거라곤 생각을 못 했어.”
“20여 년 만에 맞이하는 라누아인걸요. 환영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녀의 말에 바이샤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을 떠올린 세리아나가 눈을 내리떴다.
울고 있던 거울 속 어린 바이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의 곁에 있었다면 그 눈물을 닦아 줬을 텐데……. 과거의 자신은 그의 눈물로 얼룩진 뺨을 닦아 주듯 거울을 쓸어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바이샤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의 곁에서 그의 아내로 그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저기 궁이 보이네요.”
“아……!”
치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기대가 섞인 생각을 떨쳐버린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치아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진록의 잎사귀 사이로 새하얗게 반짝이고 있는 건물이 세리아나를 반기고 있었다.
“궁의 벽을 쌓아 올린 바위와 돌멩이들은 바람의 사막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받아들여 시원한 바람으로 바꾸어 주죠.”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거울 너머 등장하던 하얀 벽은 바로 저 궁의 벽이었던 모양이었다.
경쟁하듯 높고 뾰족하게 건물을 올리는 라젠과는 다르게 1층으로 지어진 궁은 넓은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위치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홈이 파인 지붕의 기울어진 끝 아래에는 거대한 항아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빗물을 모으기 위한 항아리였다.
조만간 우기가 찾아오게 되면 그 항아리들 가득 빗물이 모이게 될 것이다.
‘항아리에 모이는 물방울 소리도 분명 좋아하실 테지.’
그러나 그것까지 미리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치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것이 바로 쿠드라의 오아시스입니다, 라누아.”
“와아……!”
치아린은 자신의 손가락 끝이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어린아이처럼 감탄하는 세리아나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분이 라누아라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분명 바이샤에게도 통할 것이다.
세리아나는 곁에 앉은 치아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눈을 깜빡이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오아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아시스를 사막의 샘이라고 정리했던 책은 엉터리가 분명했다.
작은 샘보다는 거대한 호수처럼 보이는 오아시스는 궁 바로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가 이곳을 메마른 땅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세리아나는 오아시스 건너편의 우거진 숲을 보며 감탄했다.
“오아시스는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요. 앞으로는 궁이, 뒤로는 거대한 바위산이 있는 데다 전사들이 수시로 주변을 돌며 경비를 서고 있죠.”
“바위산?”
“고개를 조금만 들어올려 보시겠어요? 궁 뒤로 높게 솟은 바위가 보이시죠?”
“응.”
“그곳이 바위산이에요. 짐승들의 구역인 데다 식수로 사용하는 샘과 수로가 있어 금역으로 구분된 장소죠.”
“다른 샘이 또 있구나.”
세리아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보통 한 개의 작은 오아시스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 사막이라고 들었다.
사막 전체를 둘러본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로 세리아나는 라젠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다른 오아시스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큰 규모의 오아시스가 있는 것도 모자라 다른 샘이 존재하다니! 세리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치아린의 설명을 기다렸다.
“네, 바위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해요. 저도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쿠드라께서 말씀하시길 오아시스의 절반에 못 미치는 크기라고 하시더군요.”
치아린은 자신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주인에게 품은 마음으로는 상당히 무례했으나 지금 그녀의 주인은 아주 작고 귀여운 소동물처럼 보였다.
“바위산의 샘은 식수로 사용돼요. 그곳과 이어진 수로를 통해 사람들은 물을 공급받죠.”
“궁에서도?”
“네, 궁에서도요. 그래서 바위산의 샘에 접근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답니다. 어차피 성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쿠드라와 라누아뿐이시지만요.”
치아린의 말을 들으며 세리아나는 그동안 자신이 읽어 온 ‘사막’에 관한 책들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책 중 어느 것도 이러한 것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치아린.”
“네, 라누아.”
“앞으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으면 해.”
“라누아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고마워.”
“……당연한 일입니다.”
치아린은 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수줍게 웃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홀린 듯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남자들이라면 더할 것이다.
‘라누아를 제대로 지켜라, 치아린.’
국경에서 갈라져 다른 곳으로 향한 바이샤의 목소리가 치아린의 귓가에 울렸다.
자신과 카얀이 있음에도 못마땅한 듯 주의를 주던 그의 모습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치아린은 자신의 왕이 왜 그렇게 세리아나의 안전에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던 것이 분명했다.
‘쿠드라의 오아시스 안에서 라누아께 불경스러운 짓을 할만한 간 큰 놈들은 없을 테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치아린은 라누아의 주변을 더더욱 경계하리라 마음먹었다.
여차하면 바이샤까지도 그 경계 대상에 넣을 것처럼 굳게 다짐하는 그녀의 흑요석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