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5화 (5/110)

#05. 거울을 보는 레이디 (5)

연회장의 환한 조명이 역으로 비춰 바이샤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등장에 놀란 루카르도가 힘을 뺀 순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 세리아나가 서둘러 바이샤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이샤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식을 올리기 전 라누아가 될 왕녀와 대화를 나눠볼 작정이었다.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계획 같았다.

‘어떤 여자인지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기왕이면 다루기 쉬운 여자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어떤 미친놈이 술에 취해 제 나라의 왕족에게 손을 올리는 꼴을 보게 될 줄 몰랐다.

거기다 그가 구해주리라 확신하듯 제 곁으로 다가와 몸을 숨기는 왕녀라니.

라젠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야만족이라 부른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라젠 내에서 차이툰의 이미지는 그 단어 하나로 충분히 설명되었고 그들을 신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체 이 왕녀는 뭘 보고 내가 자신을 보호할 거라 믿는 거지?’

물론 보호할 것이다.

그의 라누아가 될 여인이기 이전에 세리아나는 이 자리에서 가장 약한 자였고 그런 자를 보호하는 것은 힘을 가진 자의 의무였다.

‘……생각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군.’

저 술 취한 개새…… 아니 이건 개에게 미안하니 그냥 저 미친놈을 테라스 밖으로 던지면 어떻게 될까?

평소라면 고민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을 테지만 치아린과 카얀에게 얌전히 라누아만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 문제였다.

“곤란하군. 괜히 약속했나?”

“너, 너는 야만족의……!”

“조용히 해라. 널 어찌 처리할지 고민하는 중이니.”

“천박한 야만족 주제에!”

“좋아, 결정했다.”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루카르도의 모습을 보며 바이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린 그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내지른 루카르도의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남은 한 손으론 그의 허리띠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달랑 들어 올린 바이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테라스의 난간 너머로 루카르도를 던져버렸다.

“조용해졌군.”

먼지를 털 듯 손을 탈탈 털어낸 바이샤를 세리아나가 지켜보고 있었다.

심하게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바이샤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라젠의 왕녀라면 이런 거친 모습은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세리아나를 놀라게 했나 싶어 머리를 긁적인 바이샤가 사과하려는 순간이었다.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밤바람에 정신을 차린 세리아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서둘러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만큼은 흔들림이 없이 우아했다.

세리아나의 인사를 어색한 손짓으로 막은 바이샤가 난간 너머를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아래 수풀이 우거져 죽지는 않았을 거야.”

“……아, 네.”

“뭐 다리나 팔 하나쯤은 부러졌을지도 모르지만.”

붙잡을 때 보니 제법 단련을 한 주먹이었다.

그 정도면 다치지는 않았겠지. 물론 저 밖으로 떨어진 자가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바이샤는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나? 혹시 왕녀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라면…….”

“아, 아뇨! 그런 일은 없었어요!”

세리아나가 서둘러 답했다.

그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기적과 같은 만남이었다.

그곳에 어떤 오물을 투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술에 취하셨어요. 그래서…….”

“그래서 자신이 섬기는 왕가의 왕녀를 못 알아보았다?”

“…….”

“혹시 이번 전쟁에 참여했던 기사인가?”

“……네.”

“그렇군.”

이번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기사라면 차이툰에 여러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일 수도 있고 분노일 수도 있다.

바이샤는 그의 그런 분노를 자신과 결혼하게 될 왕녀에게 푼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었다.

‘쟈캄에게 이 일도 자세히 알아보라 해야겠군.’

라젠에 세작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임무를 받은 쟈캄이 해야 할 일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당사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 불경한 말들을 뱉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연회가 열리는 홀 안쪽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테라스의 창을 넘으며 고요한 소음으로 바닥에 깔렸다.

바이샤도 세리아나도 말이 없었다.

바이샤는 여인과의 대화에 서툴렀고 세리아나는 거울이 아닌 실물로 제 앞에선 바이샤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내 라누아가 되실 분께 치아린에게 하는 것처럼 굴 수도 없고.’

‘이름을 부르면 실례겠지? 그럼 쿠드라라고 불러야 하나? 불러도 되는 건가?’

복잡한 머릿속을 먼저 정리한 것은 바이샤였다.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평소 하던 대로 하기로 결정을 내린 그가 팔짱을 끼며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은 간소하게 진행될 거야.”

“네.”

“그리고 식이 끝나는 즉시 사막으로 떠나게 될 거고.”

“네.”

“불안하지 않나?”

“……네.”

순순히 대답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보며 바이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주장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제 입맛대로 움직여줄 라누아를 찾았던 그를 만족시켰지만 손톱 끝에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처럼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식을 올리기 전에 내게 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도 되는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 마음속으로만 해왔던 질문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었던 탓이었다.

“뭐, 생각날 때 천천히 물어보도록 해.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테니.”

“네.”

그 말 한마디가 너무 기뻤다.

라젠을 떠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기뻤다.

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네.”

“그 전에 잠깐…….”

당장이라도 홀 안쪽으로 움직일 것 같던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잠시 굳었던 세리아나는 그가 비뚤어진 티아라를 바로잡아 주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어디가 불편한가?”

“아, 아뇨. 저기……머, 먼저 들어가세요.”

“음?”

“자, 잠시 정리할 것이 있어서…….”

“그렇다면야. 그럼 이후엔 결혼식장에서 보도록 하지.”

그렇게 바이샤를 먼저 홀 안쪽으로 들여보낸 세리아나는 테라스의 커튼을 내린 후 그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고작 티아라를 정리해 주는 손길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터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온몸이 심장이 된 듯 두근거리며 붉어진 살결이 본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고 있었다.

세리아나가 방으로 돌아온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아직 한창 연회가 진행 중이었지만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연회장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진 후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세리아나는 침대 아래에서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 담긴 것은 남들에겐 별 볼 일 없는 잡동사니들이었다.

모난 곳이 하나도 없는 둥근 돌멩이, 모서리가 닳고 빛이 바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편지지, 깃이 갈라진 깃펜과 낡은 토끼 인형 등등을 눈으로 훑던 세리아나는 상자의 크기에 꼭 맞춘 것 같은 낡은 활과 날카로운 촉 대신 솜을 채운 낡은 헝겊으로 그 끝을 감싼 화살 하나를 꺼냈다.

거울 속 바이샤가 활을 쏘는 것을 보고 무작정 그것을 흉내 내다 백작가의 사병들이 버린 낡은 활을 주워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쏘는 자세는 바이샤의 것을 활을 관리하는 방법은 백작가의 서재에 있는 책 속에서 배웠었다.

“……활 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 부탁해볼까?”

그의 말처럼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그와의 관계가 조금 부드러워진다면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리아나는 낡은 활대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부디 그 시간이 빨리 찾아오기를 아무도 모르게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 날이 찾아왔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기대감에 두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세리아나는 아름다웠다.

누구든 지금의 그녀를 보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신부라 입을 모을 것이다.

그러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 준비를 마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엘라이어뿐이었다.

“야만족과의 결혼이 그리 좋으니?”

“……어머니, 야만족이 아니라 차이툰의 쿠드라예요.”

“알 게 뭐야. 야만족은 야만족이지.”

세리아나는 심술이 잔뜩 붙은 어미의 얼굴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께 축복의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멀리 시집가는 딸을 위한 기도와 위로를 원했던 것뿐이다.

왕족과 신관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그녀의 결혼식에 어미를 불러달라 청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너. 결국 전하께는 말씀 올리지 않은 거지?”

“네?”

“날 왕비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야지! 날 왕비로 삼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매달린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머리가 나빠? 어쩜 애가! 제 어미 불쌍한 줄을 몰라!”

“어머니 제발…….”

분통을 터트리는 어머니를 보며 세리아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머니께는 미안했지만 그녀의 욕심은 세리아나가 채워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언제쯤 왕이 그녀를 왕비로 만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까?

“베일을 씌우겠습니다.”

세리아나가 무릎을 살짝 굽히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새하얀 베일이 씌워진다.

레이스로 마감이 된 반투명한 베일의 가장자리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신부 대기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신부의 요청으로 대기실까지는 들어올 수 있었으나 왕족이 아닌 엘라이어는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는 어머니를 베일 너머로 잠시 바라본 세리아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었지만 큰 아쉬움이 남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세리아나는 전하지 않을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베일은 그녀의 걸음에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결혼식장이 가까워질수록 세리아나의 두근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미약한 두려움과 기대감. 평생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바이샤와의 결혼식이었다.

그의 사막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라젠과 차이툰의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지만 세리아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시작된 사랑이다.

어떠한 목적을 가진 결혼이라 할지라도 세리아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결혼식장은 왕성 안의 작은 신전이었다.

왕족들의 미사를 위해 마련된 공간 속엔 라젠의 국왕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 자이로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루미어스 왕녀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야만족의 왕이 루미어스를 보고 첫눈에 반해 세리아나를 대신해 그녀를 신부로 내놓으라 억지를 부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왕비 때문이었다.

루미어스의 입장에선 저를 대신해 팔려가는 세리아나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차이툰의 왕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일인지라 얌전히 왕비의 말에 따랐다.

신랑 측을 위해 마련된 자리엔 화원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카얀이라는 사내와 검고 긴 머리를 한데 올려묶은 여인, 단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결혼식이 끝난 즉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있었다.

붉은색 천에 화려한 금사로 수를 놓은 조끼를 입은 바이샤가 버진로드 끝에서 세리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저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위로 치솟는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 누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결혼식은 그의 말처럼 간소하게 진행됐다.

왕가의 결혼식에 따라오는 수많은 절차가 생략되었고 많은 것이 축소되었다.

세리아나는 그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의 손을 붙잡고 당장이라도 사막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세리아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바이샤는 무심한 눈빛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성직자를 바라보았다.

옆에선 세리아나의 향기가 아니었다면 지루해 하품했을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생각들이 뒤엉킨 결혼식은 성직자의 축복 어린 말로 짧게 끝이 났다.

서로를 마주한 상태로 선 두 사람은 짧은 시선이 오고 갔다.

“신랑은 신부의 베일을 벗기고 맹세의 키스를.”

신부의 베일을 벗기는 것은 신랑의 특권이었다.

바이샤는 그가 베일을 벗기기 쉽도록 고개를 살짝 숙인 세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헬라임에 고하지는 못했으나 이제부터 이 작은 여자가 그의 라누아였다.

바이샤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움직여 베일을 걷어 올렸다.

작고 하얀 얼굴이 드러나고 파르르 떨리는 풍성한 속눈썹 아래 붉은 입술이 그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바이샤는 손을 뻗어 세리아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가느다란 몸이 흡족했다.

허리를 감싸지 않은 다른 손을 움직여 손끝으로 세리아나의 턱을 잡아당긴 바이샤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몸을 굳혔던 세리아나는 곧이어 바이샤의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숨이 입술 안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느끼며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뜨겁고 달았다.

생소한 열감이 몸 안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의 라누아.”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그의 작은 목소리가 세리아나의 귓가에 닿았다.

자신도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아주 잠시 고민하던 세리아나가 미처 답을 정하기도 전에 바이샤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그의 짙은 입맞춤에 몸을 움찔 떤 세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바이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있는 힘껏 용기를 짜내어 내어놓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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