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거울을 보는 레이디 (4)
펄킨 홀 안쪽은 기묘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라젠의 귀족들과 차이툰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반으로 나뉜 형태. 홀의 안쪽으로 들어선 세리아나는 양쪽에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눈길에 흠칫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어쨌든 세리아나는 현재 라젠의 왕녀였고 아직은 차이툰의 사람이 되지 못한 예비신부였다.
라젠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망설였다.
평소 라젠의 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귀족 무리 한가운데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어머니가 그녀의 발을 묶어 버렸다.
엘라이어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오늘 그녀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려 하진 않을 것이다.
왕비 자리를 탐내는 어머니였지만 그녀도 차이툰의 전사들로 인해 국경이 3일 만에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두려움에 몸을 떨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괜찮을 거야.’
국경을 넘어 라젠의 수도까지 일시에 밀어닥칠 힘을 가진 이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힘없는 라젠은 굴욕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일방적으로 시작되었던 전쟁을 멈추는 대신 그 대가로 건네지는 것이 바로 세리아나였다.
본래 그들이 원한 것은 라젠의 왕녀였다.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녀 하나를 넘기는 대가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젠의 단 하나뿐인 왕녀 루미어스가 문제였다.
그녀는 너무도 사랑받는 왕녀였고 스스로 사랑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왕녀님이 야만인의 신부가 되느니 목을 매달겠다 소리친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니까.’
그 덕분에 거울 너머로만 지켜봐 왔던 그와 맺어지게 되었지만 그 당시엔 정말로 서러움에 눈물이 차올랐다.
왕의 사생아지만 백작가의 영애, 왕이 인정하지 않는 자식으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어 이제껏 살아왔었다.
그런데 자신이 아끼는 딸을 보낼 수 없어 그 사생아를 양녀로 들이고 왕실 족보에 이름까지 올린 것이다.
‘기대가 없어 눈물 흘릴 일도 없다고 믿었는데 아니었지.’
세리아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라젠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저곳에 있어야 한다.
반대편에 선 차이툰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오늘만큼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저것 보세요, 진짜 그 여자의 딸이 티아라를 썼어요.”
“쉿! 조용히 해! 저 야만족들이 알아차리면 다시 전쟁이야!”
“어미를 닮아 얼굴만큼은 확실히 반반하다니까요.”
“그럼 뭐 해요? 표정이 없는걸. 야만족이 저런 인형 같은 여자 하나로 만족하겠어요?”
“왜? 만족 못 한다 그럼 당신이 야만족의 침실로 찾아가기라도 하려고?”
“어머 농담도, 오호호.”
세리아나를 두고 저질스러운 농담들이 오고 갔다.
그 사이사이 엘라이어에 대한 험담은 덤이었다.
엘라이어는 사교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자 욕받이였다.
세리아나는 그런 어머니를 가련하다 여기면서도 아부하는 귀족들에 둘러싸여 미소짓는 모습을 목격할 때면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나.”
“루미어스 왕녀님.”
“자매끼리 왜 말을 높이고 그래요.”
습관적으로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려는 세리아나를 붙잡아 일으킨 루미어스가 미소지었다.
세리아나보다 조금 더 짙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왕녀가 왕을 닮은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녀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차이툰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요, 언니.”
친밀하게 팔짱을 끼며 붙어 오는 루미어스 왕녀의 손이 차가워 세리아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것을 무슨 뜻으로 이해한 것인지 루미어스의 왕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웃어요, 세리아나. 야만인들이 우릴 사이좋은 친자매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
“네…….”
루미어스 왕녀에게 이끌려 라젠의 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상석 가까이로 가다가 섰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사람 좋은 얼굴로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기꺼운 표정으로 세리아나를 반겼다.
저 웃음은 진심일 것이다.
눈엣가시 같았던 혹은 그 존재 자체를 신경 쓰지도 않았던 사생아 하나로 그들의 사랑하는 딸 루미어스를 지키고 소중한 라젠을 지키게 되었으니까. 아마 오늘만큼은 세리아나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 줄 것이다.
아마 엘라이어가 노리던 것이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멀리서 세리아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차마 아는 척을 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이자 반대편에 서 있던 자이로 왕세자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를 들어. 네 소원대로 왕녀가 되었잖아.”
“전 그런 소원을…….”
“네 어미의 소원이든 너의 소원이든 어쨌든 반쪽은 이뤘지. 우리도 너와 이렇게 나란히 서고 싶지 않으니 죽을상으로 서 있지 말고 웃어.”
연년생으로 태어났지만 루미어스와 쌍둥이처럼 보이는 자이로가 입술만을 달싹이며 세리아나를 몰아세웠다.
“음악이 시작되면 루미어스와 내가 첫 춤을 출 거다.”
“네.”
“적당히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네가 실수라도 하는 날엔 모든 것이 끝장난다.”
“네.”
모처럼 반가운 말이었다.
이 자리에 왕실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은 세리아나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왕실의 양녀가 되기 전까지 어머니를 따라 억지로 따라왔었던 연회장에서 벽의 꽃을 자처하던 세리아나였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자리엔 더는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왕의 환영 인사가 끝나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자이로 왕세자와 루미어스 왕녀가 홀 가운데로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두 사람은 그 시선을 즐기듯 천천히 스텝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세리아나에겐 그 시간이 기회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모르는 척해 주고 있을 왕과 왕비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뒤로 물러난 세리아나가 가장 가까운 테라스로 몸을 숨겼다.
그녀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당한 신호가 올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세리아나는 테라스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히 움직였다고 세리아나는 생각했지만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있었다.
차이툰의 일행들이 모여 있는 곳, 그중에서도 가장 상석에 있는 이들이었다.
라젠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커다란 소파 위에 드러눕듯 기대어 앉은 바이샤와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두 남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리아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분이 제 라누아이신 거죠? 아름다우시네요.”
짙은 피부색과 올려서 한데 묶은 검은색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흑요석을 닮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질문했다.
“내 라누아시다.”
“제가 저분의 종이 될 건데 제 라누아라 부르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리 툴툴거리세요.”
“아직 네 라누아가 아니니까.”
“벌써 정이 드셨어요? 평소랑 반응이 좀 다르신데?”
그녀의 짓궂은 말에 바이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용케 알아차린 카얀이 치아린을 말리며 주변을 살폈다.
“왕녀가 자리를 비웠는데 신경 쓰는 이가 없군요.”
“평소에도 수줍음이 많아 자리를 많이 피하셨거나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겠죠.”
치아린이 카얀의 말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급격한 온도 차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익숙한 듯 두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쟈캄에게 일을 서두르라고 해. 가만히 앉아서 뒤통수를 맞는 건 취향이 아니야.”
“네, 쿠드라.”
“그건 그렇고…… 저것들은 언제까지 날 우리에 갇힌 짐승을 보듯 서 있으려는 거지?”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가 연회장을 둘러싼 커다란 기둥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밝은 조명 아래 색이 더욱 짙어진 기둥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들이 사냥감이라는 걸 모르는 멍청한 것들을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불개미가 몸을 타고 오는 것처럼 신경 쓰여서 그래.”
“그럼 콱 죽여 버릴까요?”
“라누아를 모시는 자리니 사고 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댄 건 너였다 치아린.”
“어머, 제가 그랬나요?”
그림자 속에 숨은 라젠 쪽의 사냥개들의 기척을 읽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뀐 바이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를 주목하고 있던 사냥개들뿐만 아니라 라젠 귀족들 역시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딜 가시려구요?”
“답답해서.”
“좀 참으시지.”
“치아린, 쿠드라께선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움직이신다. 알고 있잖아.”
“하아, 카얀 내 사랑. 당신이 쿠드라의 성실한 종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결혼식을 앞둔 신랑은 몸조심하는 편이 좋다구요.”
“이 라젠에 쿠드라께 해를 끼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적당히들 놀고 있어라.”
두 사람의 사랑싸움을 뒤로하고 바이샤는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악취가 풍기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기왕이면 꽃향기가 나는 쪽이 좋겠지?”
바이샤의 발길이 세리아나가 모습을 감췄던 테라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테라스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몸을 숨긴 세리아나는 난간 너머 왕성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이 아끼는 정원사가 만들어놓은 미로와 같은 정원은 가끔 왕이 자신의 애인들과 밀회를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
물론 엘라이어와의 밀회도 몇 번이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떠올려 버렸네.”
세리아나는 어린 시절 저 미로 속에 갇힌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으로 무마되었지만 세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이로 왕세자의 짓이었다. 그의 원한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뻔했다.
엘라이어 피오르 백작 부인, 백작과 결혼하기 전에는 엘라이어 밀레라고 불렸던 사교계의 꽃. 고작 남작가의 여식에 불과했으나 그 미모로 사교계에 데뷔하자마자 국왕의 눈에 든 여인 때문이었다.
열여섯, 데뷔탕트를 치르고 이후 국왕의 애첩으로 사교계를 제 손아귀에 넣은 그녀는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왕의 첩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하게 되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물론 국왕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그녀가 왕의 침대를 데우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세리아나가 들어섰다.
[당장 지워라!]
[전하와 저의 아이예요! 우리의 아이라구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세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국왕은 크게 분노했었다.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엘라이어를 모욕했고 당장 아이를 지우라 다그쳤다.
그러나 엘라이어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에선 그녀가 아이에게 애정이 있어 그리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라 믿었고 그것이 자신의 권력이 되기를 소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라이어는 그런 소문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아이를 낳고 싶으냐?]
[용서하세요, 전하. 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당신의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요.]
아이를 지우라 소리 지르던 왕도 가련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엘라이어를 보는 동안 마음이 약해졌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에 아주 조금 감동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라젠은 일부일처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 공식적으로는 첩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였다.
방법을 찾던 국왕은 지방에서 올라와 아직 수도에서 내세울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던 피오르 자작에게 백작위를 약속하고 자신의 첩을 그와 서둘러 결혼시켰다.
세리아나는 그렇게 백작가의 딸로 태어났다.
왕의 아이를 낳은 엘라이어는 그날부터 공공연하게 왕비의 자리를 탐냈다.
감히 제 어미의 자리를 탐내는 여자를…… 자이로 왕세자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서웠었지.”
그날 이후 한동안 사방이 막힌 장소에선 숨도 쉴 수 없었다.
거울 너머 바이샤를 보지 못했다면 아마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 것이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쥐새끼처럼.”
불쾌한 기억을 지우려 눈을 감았던 세리아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루카르도.”
“내 양어머니의 귀한 따님께서 왜 이런데 숨어 계실까? 그 빌어먹을 야만족의 눈을 피해 보려고?”
피오르 백작가의 장남이자 세리아나의 양오빠인 루카르도였다. 술에 잔뜩 취한 것인지 그녀를 향해 향하는 그의 걸음이 불안정해 보였다.
“술을 마신 건가요?”
“큭, 그딴 걸 물어서 어쩌려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루카르도를 피해 보려 했으나 세리아나가 있던 곳은 테라스의 가장 구석진 장소였다.
등에 닿는 차가운 돌의 감촉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가 몸을 움츠린 순간 루카르도의 손이 빠르게 날아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꺄악!”
“너도 네 어미처럼 야만족 앞에서 꼬리를 흔들겠지!”
두피가 세게 당겨 눈물이 핑 돌았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세리아나는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지금 이 소란이 알려진다면 차이툰의 사람들은 그녀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면 바이샤와의 결혼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네 머리카락이 이런 색이라고 착각하지 마. 넌 그냥 새끼 창녀에 불과해 알아들어?”
역한 술 냄새가 나는 습하고 뜨거운 바람이 세리아나의 뺨에 닿았다.
고통을 참고 있던 세리아나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루카르도의 얼굴에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점점 뜨거워지는 그의 입김과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역겨웠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군.”
그리고 그 순간 이제껏 단 한 번도 세리아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구원의 목소리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