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거울을 보는 레이디 (2)
덜컥, 몸 어딘가가 고장이 난 듯 세리아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미래의 남편’이라는 말과 거울 속 그의 모습이 겹쳐지며 숨이 막혀 왔다.
그러나 엘라이어는 그런 딸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남편감이 온다고 정신을 놓았니?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선 햇빛을 피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저 잠자리 날개 같은 커튼이 다 뭐야!”
“겨울에 사용하던 두꺼운 커튼을 교체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전하께 말씀드리마. 야만족의 신부라도 라젠의 왕녀인데 추한 몰골로 시집갈 순 없잖니.”
“네…….”
세리아나는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어차피 어머니는 핼쑥한 그녀의 안색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 찾아온 것도 분명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아가, 야만족이 도착하기 전에 나를 왕비로 만들라는 내 부탁은 기억하고 있지?”
“네, 기억해요. 하지만 어머니……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왕비로 만들 수 있겠어요.”
목이 조여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팔려 가는 와중에도 제 욕심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왕녀의 어미는 당연히 왕비여야지!”
“어머니 제발…….”
“멍청한 것! 보나 마나 방에 콕 틀어박혀 전하를 찾아뵙지도 않았겠지.”
정말로 화가 난 듯 손에 든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말하는 엘라이어의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마이어 왕비님께도 왕녀님이 있어요.”
그리고 왕세자 저하도요.
세리아나는 뒷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왕의 자식을 낳은 자가 왕비가 되어야 한다면 이 라젠을 이끌 다음 왕인 왕세자를 낳은 지금은 왕비가 단연 그 자리에 더 어울렸다.
남들은 그녀의 그런 말을 억지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세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을 막으려 내 딸을 데려갔으면 당연히 나도 데려와야지! 너만 이 왕성에서 왕녀라 불리며 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전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언제나 그러했듯 엘라이어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성을 내며 부채를 쥐어뜯는 엘라이어는 열여덟 딸을 둔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왕의 침실을 들락거릴 수 있는 거겠지.
라젠은 일부일처의 나라였지만 이혼은 허용되는 왕국이었다.
대신 첩을 두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는데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몰래몰래 두서넛의 첩을 가지고 있었다.
라젠에서 가장 돈이 많고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 첩을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엘라이어는 그런 왕을 사로잡아 지금껏 그의 침실을 데우고 있는 애첩이었다.
왕은 중간중간 여러 젊은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다가도 엘라이어의 눈물 한 방울과 야살스러운 눈웃음 하나면 다시 그녀를 찾았다.
세리아나는 그런 왕과 엘라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만약 야만족이라 불리는 차이툰이 국경을 넘어 라젠을 공격해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사생아로 왕의 필요에 따라 이곳저곳에 팔려 가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오늘 연회 땐 무조건 전하 곁에 붙어서 아양을 떨어. 루미어스 그 여우 같은 왕녀처럼 전하의 마음을 흔들란 말이야!”
“……노력할게요.”
“그냥 노력으론 안 돼! 최선을 다해야 해. 알겠니?”
“네, 어머니.”
아마 세리아나는 오늘 저녁 라젠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왕에게 단 한 마디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세리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피오르 백작가의 저택에 있을 때처럼 순종적으로 구는 딸의 모습에 만족한 엘라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내가 오래 머물러 뭐 하겠니? 남편을 맞을 준비나 하렴.”
“어, 어머니 잠시만 더 머물러 주시면…….”
“다 큰 아이가 어디서 어리광을 부려. 나도 피곤해. 오늘 연회 때 전하 곁을 지키려면 지금부터 푹 자둬야지.”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툭툭 쳐서 정리한 엘라이어는 미련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딸에 대한 애잔함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그녀를 조금 더 붙잡으려던 세리아나의 입이 얼어붙었다.
“내 말 꼭 명심하고. 알겠지?”
엘라이어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시녀들을 드잡이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의 태도, 정확히는 그녀를 보고도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시녀를 야단치는 그 목소리 그 어디에도 세리아나를 향한 걱정은 묻어 있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두 손을 꼭 쥐며 참아냈다.
거울 너머의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도 의연했다.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떠올리며 눈물을 참았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모래사막의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듯했다.
이름도 목소리도 알지 못하는 어떤 남자에게 위로를 받는다.
세리아나는 그 남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서러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
“세리아나 왕녀님.”
“어머니, 아니 백작 부인은 돌아가셨어?”
“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 준비가 이어졌다.
드레스의 마지막 점검을 위해 아침 식사는 준비하지 않았다는 시녀의 말에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건너뛰는 것은 백작가에 있을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과 백지장처럼 새하얀 피부를 미인의 기준으로 드는 라젠에선 세리아나뿐만 아니라 많은 귀족 여인들이 이런 식으로 식사를 건너뛰곤 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연회장에서 쓰러지는 이들이 나타났고, 어느 순간부터 연회장에서 몇 번이나 쓰러졌는지가 귀족 여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산책을…… 할 수 있을까?”
“지금 후원엔 자이로 왕세자 저하께서 산책을 즐기고 계십니다.”
“아…….”
이 왕성에서 세리아나가 발을 디딜 수 있는 장소는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소 중 산책을 즐길 수 있을 만한 곳은 왕성의 후원이 유일했다.
그런데 그곳에 왕세자가 나와 있다면…… 그녀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맞았다.
“그럼 저하의 산책이 끝나면 일러주지 않을래?”
“해가 높이 뜰 텐데요?”
“긴 소매의 옷과 양산을 준비해 줘.”
“그러겠습니다.”
새하얀 피부는 라젠에서 미인의 첫 번째 조건이자 새 신부의 필수 조건이었다.
혹시라도 살갗이 타 결혼식 당일 신랑의 흥이라도 깰까 싶어 걱정하는 시녀를 달랜 세리아나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화려한 공간이었지만 굳게 닫힌 창문이 꼭 이곳이 감옥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저 창문은 안에선 열리지 않으니 감옥이 맞을지도…….’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세리아나의 방 창문은 모두가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창문이 열리더라도 5층 높이의 방에서 그녀가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라젠의 왕은 그 어떤 위험요소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른 오전 일정은?”
“신학 수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차피 라젠을 떠나면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을 신의 학문이었다.
거기다 라젠의 신은 그녀를 돌보지 않는다.
만약 신이 돌보았다면 세리아나에게 아주 작은 자비라도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녀를 외면했고 세리아나는 이제는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 신의 이름을 울부짖은 그 날 이후로 포기해 버린 덕분이었다.
“……준비해 줘.”
그러나 그녀에게 거부권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이곳 라젠에서 그런 존재였다.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신관을 부르러 나가는 시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세리아나가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달이 뜨는 밤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신학 수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의욕은 없었지만 평소 책을 가까이한 덕분에 세리아나의 학습 속도가 제법 빨랐던 덕분이었다.
입에 발린 몇 마디 칭찬을 던진 신관이 물러난 후 외출 준비를 마친 세리아나가 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수프 한 접시와 싱그러운 푸른빛만 가득한 샐러드를 드레싱 없이 먹고 나온 참이었다.
기운은 나지 않았지만 이른 봄의 햇살이 답답하게 뭉쳐 있던 그녀의 속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양산의 그늘을 벗어나지 마세요.”
“잠깐 걷는 건 괜찮아.”
“안 됩니다. 양산이 거슬리시면 그늘로만 걸음 하세요. 조만간 식을 올릴 신부님이십니다.”
“……그래.”
볕을 좀 더 쬐고 싶었지만 뒤따르는 시녀는 강경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어차피 임시로 모시는 가짜 왕녀였으니 세리아나와 친분을 쌓는 것보다는 그녀를 좀 더 완벽한 신부로 만드는 것에 집중하려는 듯했다.
양산이 만들어내는 그늘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다시 걷기 시작한 세리아나는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을 보며 이런 푸르름을 또다시 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려는 차이툰은 사막을 터전으로 삼은 왕국이었다.
여린 잎사귀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사막의 사람이었으니까…… 오아시스를 보게 될지도 몰라.’
기대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사막이라고 모두가 오아시스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부디 그녀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차이툰이 거울 속 그가 살고 있던 사막과 같은 환경을 가지고 있길 기도해야 했다.
물론 라젠의 신은 이번에도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다시 우울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눈앞의 화사한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뒤를 따르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움직이지 않는 양산의 그늘을 벗어나 앞서 나가버린 것은.
“앗!”
세리아나는 미처 보지 못한 누군가에게 부딪혀 몸의 중심을 잃었다.
정말 정신을 놓았구나. 그녀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그리 생각하며 한심한 자신을 비웃었다.
바닥이 가까워져 옴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삽시간에 뜨거운 것에 휩싸인 세리아나는 곧 그것이 사람의 체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례했군.”
“아, 아니요. 저야말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피부에 닿았던 온기가 다가온 것과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세리아나는 넘어질 뻔한 자신을 구해준 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왕성에 들어온 첫날 자신의 방을 찾아와 결혼식이 열리는 날까지 어떠한 문제도 일으켜선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던 왕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문제가 생기면 산책도 금지할지 몰라!’
이 왕성에서 세리아나에게 허락된 것은 많지 않았지만 금지된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감옥같이 느껴지는 왕성이었다.
후원 산책을 나설 때도 간수의 눈치를 살피는 죄수처럼 주변을 신경 써야 했다.
그런데 그런 산책마저 할 수 없게 된다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거야.’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싫었다.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제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라젠의 왕족은 오만하다 들었는데 전부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아니면 머리카락 색만 왕족을 닮은 다른 귀족인가?”
“그, 그게…….”
담담하지만 의아함을 담은 상대의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왕성의 후원에서 마주친 이였기에 당연히 라젠의 왕을 만나러 온 귀족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거기다 남자는 세리아나가 왕족이 아닐 수도 있다 의심하고 있었다.
“쿠드라, 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카얀, 너는 지나치게 걱정이 많아.”
“제 주인께서 무모하시니 걱정이 절로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무모함은 나의 특권이지 않나?”
“그 말씀은 옳습니다만…….”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라니. 네가 치아린도 아니고.”
“그 치아린도 쿠드라를 찾고 있으니 조만간 듣게 되실 겁니다, 그 잔소리.”
“그건 싫은데…….”
남자의 일행이 찾아온 듯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세리아나의 귀엔 ‘쿠드라’라는 단어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쿠드라는 분명 그녀를 신부로 맞이할 차이툰의 왕을 이르는 말이었다.
오늘 도착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벌써? 그것도 왕성의 후원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저분은?”
“내 짐작으로는 라젠의 왕녀. 그런데 누라비에게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더군.”
남자의 말에 세리아나가 숨을 크게 삼켰다.
의심을 사서는 안 된다.
식을 치르기도 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젠의 세리아나…… 위니 다르미안입니다. 차이툰의 쿠드라께 인사 올립니다.”
입에 붙지 않는 어색한 이름이었다.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한 세리아나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부의 이름을 그도 알고 있을까? 모른다면 자신이 그의 신부가 될 사람임을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리아나의 작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하, 나의 라누아를 이렇게 우연히 보게 되는군. 이것도 헬라임의 이끎인가 카얀?”
“그러한 듯합니다.”
다행히도 그는 신부의 이름을 알고 있는 듯했다.
라젠의 왕실에서 차이툰의 왕에게 답신을 전할 때 그녀의 이름까지 함께 전한 것 같았다.
세리아나는 늘상 들어왔던 비아냥이 섞이지 않은 남자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바이샤 쿤 쿠드라, 왕녀의 남편 될 자다.”
라젠의 태양 아래서도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 선이 굵은 얼굴과 구릿빛으로 그은 피부. 그리고 호박색 눈동자.
세리아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꿈? 환상? 사막에만 있다는 신기루가 바로 이런 것일까? 거울 너머에만 존재했던 그가 세리아나의 눈앞에 나타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