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화 (1/110)

작품명:거울 너머의 연인

#01. 거울을 보는 레이디 (1)

무두질한 염소의 가죽을 이어붙여 만든 어두운 막사 안, 한 남자가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운 모래를 쌓아 산을 만들고 고랑을 만들어 강을 표현한 그 지도 곳곳엔 옛 사막의 왕국, 차이툰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불을 밝힐까요?”

“아니 지금이 딱 좋아.”

뒤에 서 있던 누군가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한 남자는 미처 지도 위에 자리 잡지 못한 작은 깃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 깃발이 점령하지 못한 땅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모래성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남았지?”

“누라비의 계산으론 보름 정도였습니다.”

“늦어.”

남자가 거친 손길로 모래성을 뭉개듯 깃발을 내리꽂았다.

“최대한 빨리 밀어붙인다. 내 전사들이니 가능하겠지.”

“명을 받습니다.”

무너져 내린 작은 모래성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본 남자가 막사 밖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타다 만 건물의 그을린 뼈대와 매캐한 연기,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피비린내가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이질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저 끝에 내 라누아가 계시다는 말씀이군.”

“네, 쿠드라.”

커다란 키와 위압적인 근육,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리는 검고 긴 머리를 한쪽 손으로 쓸어넘기며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서신을 먼저 보낼까요?”

“그래, 아주 정중하게 적도록 해. 내 라누아를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모래 늪에 던져 버릴 테니까.”

“……그걸 정중하게요?”

“어려운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뒤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졌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아까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결승점이 비치는 듯했다.

“과연 나의 라누아께선 그대의 땅을 짓밟은 내게도 축복을 내려 주시려나?”

선이 굵고 짙은 얼굴 위에 기대가 어린 웃음이 피어올랐다.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그러나 피비린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환하고 밝은 미소였다.

* * *

이른 아침 눈을 뜬 세리아나는 낯선 캐노피의 주름 장식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거처를 옮긴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익숙하지 않은 방의 풍경은 어색한 왕성 공기와 어우러져 세리아나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괜찮을 거야.”

주문을 외우듯, 참았던 한숨을 내뱉듯 그렇게 중얼거린 세리아나는 눈에 보이는 설렁줄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와 똑같이 숨 막히는 하루가 반복될 터인데 일부러 사람을 불러 이른 아침부터 피곤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잘 잤어요? 저는 어제 당신을 만나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어요.”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거울 앞에선 세리아나는 거울의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을 손끝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세월의 흐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고풍스러운 거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다시 보름달이 뜨는 밤이 찾아올 때까진 보지 못하겠죠. 괜찮아요. 저는 버틸 수 있어요.”

누군가와 대화하듯 한참 동안 그렇게 안부 인사를 건네던 세리아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흰 천을 주워 거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 거울의 비밀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마법을 간직한 물건은 높고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었고 세리아나에게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게 됐어요.”

문득 세리아나가 중얼거렸다.

이제 한쪽 귀퉁이만 가리면 완벽하게 그 모습을 감출 거울을 향해 속삭인 것이다.

“아니…… 결혼이 아니라 팔려가는 걸까요?”

지난밤 그의 얼굴을 본 것이 문제였다.

거울 너머 사막을 달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본 탓에 이런 투정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세리아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다이아몬드 광산에 팔릴 뻔했었대요.”

늙은 후작의 재취 자리였다.

아내를 셋이나 바꾼 육십 줄의 늙은이는 라젠의 왕에게 다이아몬드 광산을 바치고 세리아나를 얻고자 했었다.

그러나 광산에 팔려 가기 직전 국경이 무너지고 라젠이 흔들리며 그녀는 좀 더 비싼 값에 다른 이에게 팔려 가게 되었다.

“라젠을 대신해 팔려 가게 되었으니 몸값은 더 높아졌네요. 그렇죠?”

세리아나는 웃으려 했다.

농담처럼, 진짜 웃긴 소리를 뱉는 사람처럼 그렇게 웃고 싶었지만 거울 귀퉁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차이툰, 백 년 전 내부의 분열로 잘게 쪼개어져 사라진 모래 왕국이었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그런 왕국의 왕과 결혼해 라젠을 떠나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역사서 속에 과거로 기록되어야만 했을 그 왕국이 부활한 것은 몇 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리아나도 모래 왕국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옛 차이툰 왕국의 후손이 사막의 바람을 하나로 모을 것이라는 ‘예언’을 타고 태어나 사막의 모든 부족을 ‘차이툰’이라는 이름 아래 복종시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떠드는 시녀들의 말을 훔쳐 들은 것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주워들은 말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시녀들의 한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세리아나는 왕성으로 끌려와 귀애하는 왕족에게만 허락한다는 미들 네임 ‘위니’를 얻고 왕녀가 된 그 날, 가장 먼저 왕성의 서고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녀를 시중들 이들이 찾아올 때까지 서고에 틀어박혀 차이툰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그러나 서고의 역사서는 빈약했고 그나마도 철저히 라젠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들뿐이었다.

세리아나는 그것에 실망했지만 아주 작은 정보라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차이툰에 대해 ‘사막의 야만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집갈 뻔했으니까.

사막의 왕 쿠드라와 여왕 라누아. 그들은 특이하게 왕의 부인을 왕비가 아닌 여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사막의 신에게서 태어난 남매라고 했던가? 남매가 어떻게 부부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의 자식이니 인간과는 다른 법률이 있는 게 아닐까 세리아나는 어림짐작했다.

‘쿠드라는 정치를, 라누아는 종교를 담당한다고 했어.’

라누아의 축복을 받은 사막의 전사들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라누아의 축복’ 없이도 라젠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했다.

국경을 무너트리고 수도로 거침없이 진격하는 그들을 라젠의 병사와 기사들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왕과 결혼하게 되는 거니까.’

수도까지 밀어붙일 것 같았던 차이툰의 전사들은 그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국혼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청한다기보다는 협박이었다. 만약 왕녀를 내어놓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수도로 쳐들어가 왕성을 쓸어 버리겠다는 협박에 국왕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 왕을 위해 늙은 후작은 제 살을 깎아내는 심정으로 다이아몬드 광산과 맞바꾼 제 신부를 내어놓았다.

침실을 데울 어린 여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테니 제 안락한 침실을 지키기 위해 한 선택이었다.

그런 이유로 세리아나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다행인 걸까요? 아니면 또 다른 불행인 걸까요? 저는 결혼식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남편이 될 이를 속이고 있네요.”

차이툰의 쿠드라는 그녀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국왕에게서 연보랏빛 머리칼을 물려받았을 뿐 이제껏 백작가의 영애로, 왕의 사생아로 살아왔을 그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말은 할 줄 모른다. 재능도 없었다. 그래서 세리아나는 걱정스러웠다. 그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릴까 봐. 실상 거짓말을 한 이는 국왕이고 세리아나는 그것에 이용당할 뿐이었지만 벌써부터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어미가 보았다면 답답하다며 제 가슴을 내리쳤을 것이다. 물론 딸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며 답답해하는 것이겠지만.

“왕녀님 깨어 계신 가요?”

세리아나가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세리아나가 하얀 천으로 거울의 나머지 부분을 감싼 후 목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그래, 들어오렴.”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왕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좋은 아침이야.”

하얀 천으로 싸맨 거울을 곁눈질한 시녀가 뒤로 손짓하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일정이 많습니다. 서둘러 움직이셔야 해요.”

적당한 온도의 물로 얼굴을 씻어내고 깨끗한 수건으로 세리아나의 얼굴을 닦아낸 시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얼굴을 적시는 장미향의 화장수가 너무 독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세리아나는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웨딩드레스의 가봉은 모두 끝났습니다. 오늘 오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한다고 하니 식사는 조금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저녁엔 손님들을 맞이하는 연회가 열릴 겁니다.”

“벌써…… 도착했어?”

“지금 라젠에서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조금 더 신경을 쓰세요.”

“으, 응.”

시녀의 뾰족한 말투에 세리아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라젠에서 왕족에게 버릇없이 구는 시녀는 당장 끌어내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나 시녀는 세리아나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듯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연회장에선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라 하셨습니다. 언제나처럼요.”

라젠의 왕비가 전하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늘 세리아나가 주목받지 않기를 원했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세리아나나 마찬가지였지만 왕비는 그 자리에서조차 세리아나가 중심이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피오르 백작 부인 근처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왕녀님의 어머니는! 이 라젠의 왕비 전하이신 마이아 다르미안 님 한 분뿐이십니다!”

서슬이 퍼런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몸을 굳혔다.

차갑기만 했던 아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겁에 질리고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삽시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시녀가 세리아나의 두 손을 붙들며 귀머거리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을 씹어 뱉었다.

“당신은 세리아나 위니 다르미안 왕녀님이십니다. 절대로 잊지 마세요. 당신의 그 이름에 이 라젠의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세리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만약 세리아나가 가짜 왕녀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 라젠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감히 시녀 따위가 내 딸을 협박하고 있는 거니?”

침울해진 세리아나를 향해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아내려던 시녀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등장한 한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얼굴로 발을 구르고 있는 하녀들의 모습에서 제법 실랑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피오르 백작 부인! 어떻게 이곳에?”

“내 딸이 있는 곳에 어미인 내가 못 올 이유가 있나?”

“어머니…….”

“그나저나 왕녀의 방이 왜 이 꼴이야? 세상에 저 커튼은 또 뭐람? 너희들 제정신이니? 햇빛이 들잖아! 피부가 검게 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탐스러운 꽃을 닮은 여인이었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햇살 아래 빛이 부서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금발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독한 장미향이 퍼져 나왔다.

세리아나는 어머니에게 꼭 어울리는 그 향기가 역하다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오셨어요? 순순히 들여보내 주지 않았을 텐데…….”

“누가 감히 나를 막겠어? 내 딸이 다르미안 왕가의 왕녀인데!”

왕의 애첩, 엘라이어 피오르 백작 부인.

다른 이름으론 천박한 엘라이어라 불리는 세리아나의 어머니였다.

“전하의 침소에서 나오는 길에 잠시 들러봤단다. 어머, 저 지저분한 거울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니?”

“…….”

“저런 거울이 뭐가 좋다고, 거기다 거울이면 얼굴이나 수시로 비춰보며 단장할 생각을 해야지 매일매일 저런 천으로 둘둘 감싸놓기만 하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저는 저걸로 충분해요.”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너는 안목을 키워야 해. 암만 어린 시절이었다고는 해도 저런 지저분한 거울을 생일 선물로 달라고 조르다니.”

“제게는 소중한 거울이에요.”

“왕녀가 되었으니 더 격이 높은 물건을 곁에 두라는 소리야.”

엘라이어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살짝 흔들어 시녀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시녀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왕의 침실에서 밤을 보내고 나온 왕의 애첩을 향해 눈을 치켜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녀들이 모두 방을 빠져나간 후 세리아나의 방을 둘러보던 엘라이어가 고급스러운 소파 위에 우아한 모습으로 앉으며 말했다.

“오늘, 네 미래의 남편이 찾아온다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