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프레져의 노력 덕분에 호텔에 도착했을 때 캐롤라인의 기분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따라오는 거죠?”
“당신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내가 위로해 주려고.”
“딱히 안 좋진 않아요.”
“그냥 모른 척 눈감아 주면 안 돼?”
은근슬쩍 호텔 객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그를 가상하게 여긴다는 점을 이용해 객실 안까지 들어오다니. 참으로 영악한 남자였다.
“나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미쳤어요?”
“미칠 거까지야.”
“당신 집 있잖아요.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굳이 여기서 자려는 거예요.”
“그야 당신이 여기에 있으니까.”
진솔한 고백에 캐롤라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노르티움에서의 일 이후 절대 프레져와 같은 방을 쓰지 않겠다 결심했건만, 프레져가 이리 저돌적으로 고백을 해 올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캐롤라인이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프레져는 이전보다 더욱 지능적으로 캐롤라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여기 넓잖아. 방도 많고. 내가 제일 작은 방 쓸게.”
“…….”
“당신이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래. 응?”
프레져와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은 캐롤라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법적으로 남남이었다. 태연한 척 같이 자기엔 캐롤라인의 얼굴은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게다가 프레져는 바쁘지 않은가. 자신과 함께 있으면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느라 충분히 자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오늘만이에요.”
그럼에도 캐롤라인은 프레져를 내치지 못했다.
저 남자가 나를 위해 나서 준 게 고마워서. 또 저를 괴롭혔던 이들을 혼내 줬다 미주알고주알 고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이게 콩깍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캐롤라인은 오늘만 프레져에게 옆자리를 내어 주기로 했다.
“정말?”
프레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흔쾌히 허락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수없이 추파를 던졌음에도 캐롤라인은 단 한 번도 넘어온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늘도 거절당할 각오로 물어본 거였는데.
“나도 당신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고개를 푹 숙이는 캐롤라인의 귀가 붉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붉어진 귀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캐롤라인은 부끄러워하면서도 프레져를 밀어내지 않았다.
“내일은 일찍 출근해야 된댔죠?”
“응.”
“그럼 얼른 씻고 자요.”
“같이?”
“미쳤어요?”
화들짝 놀란 캐롤라인이 프레져의 품을 벗어났다. 이에 프레져는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했다.
‘안고 있는 거 좋았는데.’
프레져가 텅 빈 품을 보며 한탄하는 사이 캐롤라인은 직원에게 말해 프레져가 쓸 샤워 가운과 잠옷을 건네받았다.
“당신은 작은 방 쓸 거랬죠?”
“응.”
“그럼 그쪽에 딸린 욕실에서 씻어요. 난 반대쪽에서 씻을 테니까.”
“응.”
프레져는 유난히 축 늘어진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그는 방문을 닫기 전 캐롤라인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그, 잔다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닌 거지?”
퍽.
“그래…….”
프레져는 얼굴 중앙에 수건을 맞고 나서야 얌전히 문을 닫았다.
* * *
샤워를 마친 캐롤라인이 침실로 들어섰을 때, 프레져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왜 여기 있어요?”
“바로 잘 거 아니잖아. 자기 전에 당신이랑 놀려고 왔지.”
고개를 끄덕인 캐롤라인은 화장대 앞으로 가 앉았다. 그러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려 줄래.”
“네?”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프레져의 손이 수건을 낚아채 갔다.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그는 캐롤라인의 뒤에 서서 그녀의 젖은 머리를 조심스레 말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원하던 게 이런 거라며. 꿈에까지 나오는 소원인데 내가 들어줘야지.”
“자꾸 놀릴 거예요?”
“놀리는 거 아니야. 내가 다 들어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당신한테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처럼 나한테도 로망이 있어.”
“당신이요?”
정면을 보고 있던 캐롤라인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녀의 기다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이 하고 싶다고 하는 일 다 해 주는 거.”
“뭐야.”
캐롤라인이 푸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프레져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프레져는 그녀의 목덜미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대려던 걸 겨우 참아 낸 참이었다.
결혼의 로망이란 참으로 사소하면서도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구나. 프레져는 그렇게 생각하며 캐롤라인에게 꿈꾸던 결혼 생활에 대해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캐롤라인은 이내 자신의 소박한 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는 일, 어울리는 옷을 골라 주고 또 비슷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일, 밤늦게까지 함께 추리 소설을 보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는 일.
그녀의 희망 사항을 들은 프레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추리 소설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자. 오늘 치 신문에 실려 있을 텐데.”
이불을 들추며 말하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잠시 멍하니 이불이 들춰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프레져가 침대를 툭툭 친 후에야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웠다.
주위의 불을 모두 끈 두 사람은 베드 테이블에 있는 촛불에 의지한 채 주간 추리 소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오칸 자작이 범인이 아니라고요? 그럼 대체 누군데?”
살인과 추리가 반복되는 소설은 제법 오싹했지만 프레져는 계속 웃기만 했다. 신문을 붙들고 있는 캐롤라인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왜 웃어요? 당신은 이게 충격적이지도 않아요?”
“별로. 오칸 자작은 내 기준에선 진작에 용의선상에서 밀려난 사람이었어.”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손에서 신문을 뺏어 대충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제 팔 위에 누워 있는 캐롤라인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숨 막혀요.”
“이제 이거 그만 봐. 나랑 다른 거 하고 놀아.”
“알았으니까 힘 좀 풀어요.”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는 캐롤라인에 프레져는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이불 속에서 빼꼼 머리를 드러냈다. 살짝 보이는 이마와 눈가가 붉었다.
“신기해요.”
“뭐가?”
프레져는 이마에 달라붙은 그녀의 잔머리를 꼼꼼히 정리해 주며 물었다.
“결혼했을 때 그렇게 바라 왔던 게 결혼이 끝난 후에야 이뤄진다는 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아낌없이 표현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캐롤라인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물론 당신이랑 이렇게 같이 자는 건 오늘뿐이니까. 이런 건 못 하겠지만요.”
“나랑 결혼하면 매일 이렇게 살 수 있어.”
이전보다 진지해진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프레져를 응시했다.
“내가 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나는 아무리 바빠도 잠은 집에서 자자는 주의야.”
“갑자기 그 얘길 왜 해요?”
“당신이 혼자 잠들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소리야. 그리고…….”
프레져는 기울였던 몸을 틀어 자세를 제대로 고쳐 앉았다. 그러곤 본격적으로 결혼이 주는 장점에 대해 늘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이미 한 번 결혼을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보편적인 결혼의 장점으로는 캐롤라인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 거라는 뜻이었다.
“결혼 안 해도 좋으니까 그냥 저택에서 나랑 같이 살자.”
그가 찾은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말을 뱉어 놓고 좌절했다. 캐롤라인은 헌티드 저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텔에 머물고 있는 건데. 이런 멍청한 놈.’
프레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캐롤라인을 저택으로 불러들일 만한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피아노 엄청 많아.”
“그게 왜요?”
“당신 피아노 치는 거 좋아하잖아.”
별채의 피아노를 좋아하던 캐롤라인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후원에 꽃도 엄청 많이 심어 놨어.”
“꽃은 원래 많았잖아요.”
“당신이 좋아할 법한 꽃들로 싹 바꿨다는 뜻이야. 그리고…….”
또 어떤 게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프레져는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짝 치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굳이 헌티드 저택으로 돌아갈 필요 없네. 아예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네?”
“이렇게 된 거 그 저택을 팔아 버리고 새로운 저택을 사자. 이왕이면 남부에 구하는 게 좋겠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읊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입을 떡 벌렸다.
“조상 대대로 거기서 살았다면서요. 가주가 어떻게 저택을 버려요.”
“난 그래도 돼. 헌티드에서 나만큼 대단한 가주는 없으니까.”
그가 저택을 옮긴다면 사람들은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받아들일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잠이나 자요. 내일 아침에 중요한 회의 있다면서요.”
“당신과 같이 사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지.”
능글맞은 멘트를 제법 능숙하게 치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별채에 있는 피아노는 좀 그립긴 하네요. 나름 정이 든 물건이었는데.”
“그래?”
“네. 종종 생각나요. 볕 잘 드는 날에 거기서 건반 두드리던 게요. 물론 연주할 수 있는 곡은 없지만.”
캐롤라인은 건반을 치듯,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프레져는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치자. 내가 알려 줄게.”
“당신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응.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알려 주셨어.”
“근데 왜 치는 걸 본 적 없지?”
“어렸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쳐 본 적 없으니까.”
“안 잊어버렸어요?”
“나 똑똑하잖아. 한번 배운 건 안 잊어버려.”
그 뻔뻔한 대답에 캐롤라인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처음 배웠던 곡이 뭐였더라? 무슨 동요였던 것 같은데…….”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등을 토닥이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넓고 따뜻한 품, 귓가에 맴도는 부드러운 목소리.
“당신 노래도 잘하는구나…….”
그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눈꺼풀이 무거워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잘 자.”
프레져는 제 품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캐롤라인을 내려다보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평화롭고도 다정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