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이디나의 퇴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캐롤라인은 조용히 프레져를 따로 불러냈다.
“그…….”
호텔에서의 일 이후 단둘이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분위기는 조금 서먹했다. 캐롤라인은 부러 태평한 체를 하며 입을 열었다.
“퇴원하는 대로 우린 바로 로우밸리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만 수도로 돌아가요.”
“벌써?”
“벌써라뇨. 이미 충분히 오래 있었잖아요.”
충분히 오래라니. 프레져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히 캐롤라인의 말에 따질 수는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다시 로우밸리로 찾아갈게.”
“수도에서 로우밸리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얼마예요. 바쁠 텐데 시간 좀 아껴 써요.”
“아니야. 마침 남부로 사업 확장을 할 생각이었는데 잘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헌티드 오페라하우스 남관을 건설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면 아이들을 위한 오페라 학교를 짓거나.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곁에 있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참에 남부를 제2의 수도로 만드는 거지. 로우밸리가 조금이라도 번성하는 쪽이 당신도 지내기 편할 거고. 안 그래?”
“글쎄요. 로우밸리에 계속 살 생각은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글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조만간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라서요.”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프레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설마 또다시 여행을 떠나려는 건가? 그렇다면 이번엔 몇 년이나 걸릴까?
‘그게 아니면…… 내가 싫어진 건가?’
저번에 한 거짓말 때문에 제게 실망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었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클리브 헤이오스와 무슨 일이 있었나? 그자가 작정하고 캐롤라인을 꼬셨다거나. 그래서 노르티움에 남으려는 건가?
오만 가지 상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내가 싫어져서 그러지?”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아니면 내가 좀, 질리는 스타일인가?”
프레져는 다급하게 캐롤라인의 손을 모아 쥐었다.
“로우밸리에서부터 하루 종일 당신 뒤만 따라다녔잖아. 그것도 모자라 노르티움까지 따라오기까지 했고.”
로겐의 말에 따르면, 여자는 질척이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 그래도 거짓말을 해 그녀에게 미움을 샀는데, 새끼 오리마냥 졸졸 따라다니기까지 했으니 캐롤라인이 질릴 법도 했다.
‘또 뭘 잘못했더라.’
고르라면 수도 없이 많았다. 사실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캐롤라인에겐 잘못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 떠나면 안 돼?”
“…….”
“나 버리지 말아 주라. 응?”
캐롤라인은 무어라 설명하기 모호한 얼굴로 프레져를 응시했다. 이에 프레져는 더욱 초조해졌다.
‘냅다 좋다고만 하면 뭐 합니까. 매력을 어필해야죠. 내가 이만큼 경쟁력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선택해라, 이렇게요.’
개소리라 비웃었던 로겐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프레져는 자신의 장점,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매력 포인트를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 생각했던 가문, 능력, 부. 이 모든 것들이 캐롤라인에게는 족쇄나 다름없었으니까.
‘젠장.’
프레져는 절망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캐롤라인이 자신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너무 절실해서, 2년간의 기다림을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어서, 프레져는 이제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부담스럽다 그러면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만 찾아올게.”
“…….”
“걸을 때도 떨어져서 걸을게. 허락도 없이 마차를 끌고 오는 것도 안 하고…….”
프레져는 횡설수설 말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캐롤라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는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로겐의 말대로, 캐롤라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나 당신이 좋아할 만한 식당 엄청 많이 알고 있어. 어떤 곳일지 궁금하지 않아?”
이딴 걸로 어필이 되려나?
“왜 당신이 분위기 좋다고 했었잖아. 샐러드도 맛있고.”
생색내는 것 같기도 하고 쪼잔해 보이기도 해서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을 붙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구차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때 식당에 브로콜리랑 시금치 빼 달라고 한 사람이 나야.”
나 이제 당신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만큼이나 변했어. 당신이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좋아하는 건 뭔지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나 좀 예뻐해 주면 안 돼?”
이게 프레져가 할 수 있는 애원의 전부였다.
“나 어디 안 가는데.”
졸지에 그 구구절절한 애원을 전부 듣게 된 캐롤라인은 멋쩍은 듯 관자놀이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은, 당신을 따라 수도에 갈 거란 뜻이었어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난 로우밸리에 없을 테고요.”
“…….”
“이렇게 빨리 결정해도 되는 건가 확신이 안 서서 뜸을 들였던 건데.”
“그래…….”
멋쩍음은 전염됐다. 이젠 프레져도 캐롤라인을 따라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시작으로 얼굴 전체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거였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캐롤라인에게 매달렸다는 사실 자체는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시금치를 빼달라고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캐롤라인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뿐이었다.
정말 멋도 없고 정신머리도 없지.
“이제 좀 진정이 되나 봐요?”
“응.”
얼마 전 식당에서 스푼에 제 얼굴을 비춰 보던 프레져가 떠올라 캐롤라인은 미소 지었다.
자신을 예뻐해 달라며 애원하는 남자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이에 캐롤라인은 계속 얼굴을 쓸어내리는 프레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알겠어요. 앞으론 지금보다 더 예뻐해 줄게요.”
“…….”
“그러니까 그렇게 울상 짓지 말아요.”
“……알았어.”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지만 프레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이 자신의 곁에 남는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수도에 온다. 그 사실이 그저 기쁠 뿐이었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이디나가 퇴원하는 날이 찾아왔다. 로우밸리를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프레져가 준비한 고급 마차가 병원 앞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프레져가 여정에 함께한다는 것이 이전과는 달랐지만.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네. 정기 검진 잊지 마시고요.”
클리브는 일행에게 짧은 인사를 마친 뒤 먼저 돌아섰다. 캐롤라인은 점점 멀어지는 병원 건물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클리브 선생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세요. 무슨 일 있었던 걸까요?”
“글쎄. 내 눈엔 그냥 피곤한 것처럼 보이는데.”
프레져는 어깨를 으쓱였다. 클리브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이 자신이란 사실은 얼핏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에겐 연적의 기분까지 배려해 줘야 할 의무가 없었다.
“캐롤라인, 너는 잊지 말고 네 짐이나 제대로 챙기렴. 깜빡하지 말고.”
이디나의 핀잔에 캐롤라인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로우밸리로 향하지 않고 프레져와 함께 수도에서 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캐롤라인의 의견은 아니었다.
“정말 둘이서만 돌아가도 괜찮겠어요?”
본인은 다 컸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브리오는 아직 어리고, 이디나는 이제 막 앞이 보이는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한 단계였다. 두 사람만 로우밸리로 보내기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캐롤라인이 보다 빨리 수도로 향하도록 등을 떠민 건 이디나였다.
“그럼 저 사람을 계속 매달고 다니겠단 소리니? 가는 족족 따라오니 귀찮아 죽겠다.”
졸지에 저 사람이 된 프레져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면서도 웃었다. 이디나가 자신과 캐롤라인의 사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 그저 기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딸이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인지라.
“힘든 일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돌아오고 싶을 땐 언제든 엄마 품으로 돌아와도 돼.”
수도에 도착하기 직전, 이디나는 캐롤라인의 손을 꼭 쥔 채 신신당부를 했다.
“알았어요.”
“뭐, 너도 그렇고 백작님도 그렇고. 이젠 어련히 잘할 거라 생각한다마는…….”
이디나는 고개를 돌려 프레져를 응시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프레져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캐롤라인을 울린다거나, 다시 로우밸리로 돌아오게 만든다면 그땐…… 그땐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나도요.”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브리오도 거들었다. 이에 프레져는 한껏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캐롤라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게 노력할 테니…….”
캐롤라인을 똑 닮은 보라색 눈과 어딘지 날카로워 보이는 소년의 갈색 눈.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를 마주한 프레져는 괜스레 긴장이 되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꽉 움켜쥔 손바닥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
다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프레져의 손등 위로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캐롤라인의 손이었다.
“이번엔 행복할게요. 꼭이요.”
캐롤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프레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은 프레져의 커다란 손을 감싸기엔 너무도 작았으나 프레져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안정감이 자신을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행복하겠습니다.”
이윽고 마차는 수도에 도착했다. 캐롤라인과 프레져를 내려 준 마차는 머지않아 수도를 떠났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정류장에서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짐가방을 들어 주며 물었다.
“갈까?”
“좋아요.”
이제부터는 정말 두 사람만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