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샐리는, 말했습니다. 나도 체즈, 초즈, 를 주세요?”
“체즈가 아니라 치즈.”
모아는 이디나의 무릎 위에 앉아 동화책을 읽는 중이었다. 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아가 더듬더듬 글자를 읽으면 이디나가 교정해 주는 식이었다.
“와, 아줌마 이제 진짜 다 보이는구나.”
“그럼. 우리 모아 머리가 예쁜 빨간색인 것도 보이지.”
“헤헤. 아줌마 머리도 예뻐요.”
베카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모아를 말렸지만 정작 이디나는 반갑게 모아를 맞이했다. 재잘재잘 쉴 틈 없이 떠드는 모아 덕에 지루한 병원 생활을 버틸 수 있었으니.
“아줌마, 이제 가요?”
“응. 세 밤만 지나면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치, 좀 더 있다 가지는.”
모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이별이 벌써부터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병원을 떠난다는 건 이제 건강해졌다는 뜻이니까. 모아 안 슬퍼할게요.”
“세상에, 우리 모아는 이렇게 마음이 넓네.”
이디나가 장하다는 듯 모아의 말랑한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 애정 어린 손길에 모아는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캐롤라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엄만 어째 친자식들보다 모아를 더 예뻐하는 것 같네요?”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데 안 예쁠 수가 있나.”
“모아가 그렇게 좋아요?”
“그럼. 꼭 손주 보는 것 같아서 좋다.”
손주. 그 생소한 단어에 옷을 개던 캐롤라인의 손이 멈칫했다.
2년간의 결혼 생활 내내 이디나는 단 한 번도 후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백작가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바쁜 캐롤라인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과 애런은 장성한 지 오래였고, 이디나의 동년배들은 슬슬 손주를 보기 시작한 나이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 역시 아장아장 걷는 손주의 손을 잡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싶을 터였다.
‘근데 아이를 무슨 수로.’
애런 같은 모지리에게 여자가 있을 리 없었다. 캐롤라인은 애런이 아내를 맞이하는 것보단 자신의 재혼이 더 빠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다는 말은 결국, 이디나가 손주를 보기 위해선 자신이 재혼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재혼 상대는…….’
마땅히 떠오른 사람이 없었다. 프레져를 제외하곤.
결국 자신이 이디나에게 가장 빠르게 손주를 안겨 줄 방법은 프레져와 재혼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려면 일단…….’
프레져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한 번 정도로 쉽게 되진 않을 테니 여러 번 해야겠지.
“캐롤, 얼굴이 문어 같애.”
“문어?”
“응. 문어는 당황하면 얼굴색이 바뀐대요. 빨갛게.”
“우리 모아는 아는 것도 이렇게 많아. 똑똑해라. 근데 캐롤라인 너는 왜 얼굴이 빨개지고 그러니?”
“네?”
캐롤라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 더워서 그런가 봐요.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그러곤 말을 우다다 쏟아 낸 뒤 황급히 병실 밖으로 나왔다. 바람을 쐴 겸 건물 밖으로 나왔음에도 붉어진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생각이 왜 그런 쪽으로 이어지는 거야? 대체 왜?’
역시 그와 같은 방을 쓰는 게 아니었는데.
캐롤라인은 서늘한 벽에 이마를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뜨끈하게 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서였다.
호텔에서의 일 이후, 캐롤라인은 프레져를 떠올리는 때가 더욱 많아졌다. 무엇을 하든 프레져가 의식되었고, 어떤 생각을 하든 자연스레 프레져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왜 자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냐고.”
그렇게 좋은 향기는 왜 풍기며, 셔츠는 왜 또 그렇게 풀어 헤쳐 놨는지. 목소리가 조금만 더 쌀쌀맞았다면 그를 끌어안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밖에서 뭐 하고 있어요?”
“아, 클리브 선생님.”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머리를 쥐어뜯던 손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머리는 왜 잡고 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요. 근데 선생님도……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 그래 보여요?”
속을 들킨 게 무안한 듯 클리브가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네. 표정이 평소보다 어두워요.”
“사실 영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났거든요.”
“반갑지 않은 사람이요?”
아리송한 대답에 캐롤라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클리브는 그 호기심을 웃음으로 대충 흘려보냈다.
“사흘 후면 퇴원이네요. 곧장 로우밸리로 돌아간다고 했죠?”
“아, 그게…….”
캐롤라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프레져를 따라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무언가를 눈치챈 클리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도에 갈 건가요? 헌티드 백작을 따라서?”
클리브답지 않은 직설적인 물음에 캐롤라인은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참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캐롤라인, 난 당신이 진심으로 걱정돼요.”
“어째서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요.”
어린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려 20년이 걸린다.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기엔 그 20년도 모자라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동안 무언가를 학습하고 또 경험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프레져가 겪은 시간은 겨우 2년이었다. 타고나길 냉혈한으로 난 남자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바뀌어 봤자 얼마나 바뀌었을까. 클리브는 확신할 수 없었다.
“캐롤라인도 그걸 알아서 그 사람을 떠난 거였잖아요.”
도무지 변할 기미라곤 보이지 않아서.
아내의 죽음 앞에서야 겨우 제 잘못을 뉘우치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의 곁에서 캐롤라인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선생님, 제 생각은 달라요.”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죠. 하지만 너무 쉽게 변하는 사람도 많아요. 전 이게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디나와 애런처럼 한결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브리오처럼 서서히 변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변화가 어려운 걸 알면서도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죠.”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갖은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처럼.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해 과거의 자신에서 탈피하려 하는 이도 있다.
프레져처럼.
“설령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 정성이 너무 갸륵하고도 어여뻤다.
그래서 캐롤라인은 벽을 세우지 못했다. 모래로 만든 성벽처럼, 파도처럼 쉴 틈 없이 밀려드는 프레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밉지 않다는 말이 사랑한단 뜻은 아니잖아요.”
그녀의 입가에 은은하게 퍼지는 미소를 본 클리브가 다급하게 외쳤다.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아픈 건 캐롤라인 때문이라는 생각에?”
캐롤라인은 시선을 들어 클리브의 눈을 응시했다. 항상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던 그의 눈매가 오늘만큼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력이 가상하다, 겨우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을 받아 주기엔-.”
“사랑해요.”
“…….”
“나는 사랑해요, 그 사람을. 단지 밉지 않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요.”
캐롤라인은 두근두근 뛰고 있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모호했던 감정을 말로 뱉는 순간, 프레져에 대한 마음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기 시작했다.
가슴이 이렇게 뛰는데 이를 어떻게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캐롤라인은 말이 주는 힘을 깨달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응, 맞아요. 사랑해요.”
“…….”
클리브는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캐롤라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한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님을 알면서도 가슴이 뛰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어서였다.
* * *
캐롤라인을 만나기 전, 클리브는 복도를 걷다 우연히 프레져를 마주쳤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적대감을 알아챈 프레져 역시 싸늘한 얼굴로 클리브를 응시했다. 클리브가 캐롤라인에게 특별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건 마부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프레져는 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욕을 누르곤 고개부터 숙였다.
어찌 됐든 클리브는 이디나의 눈을 치료해 준 은인이었다. 과거 자신이 난도해 놓은 캐롤라인의 마음을 봉합해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프레져는 클리브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닙니다.”
난데없는 감사 인사에 당황한 클리브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감사하다는 말과는 달리 자신을 응시하는 눈이 퍽 사나워서 황당함은 배가 되었지만.
“감사하긴 하지만, 그 외의 행동까지 받아들이겠단 뜻은 아닙니다.”
“어떻게 행동하든 그건 내 마음 아닙니까? 결정을 내리는 건 캐롤라인인데 왜 백작께서 난리를 치시는지 모르겠군요.”
다시금 날 선 말이 오갔다. 클리브는 말을 뱉으면서도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던가.
예전에 턱도 없다며 코웃음 쳤던 말이 이렇게 깊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저 남자는 어떻게 캐롤라인이 힘들어할 때를 귀신같이 알고 찾아오는 걸까.
클리브는 캐롤라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러지 못했다. 이디나의 수술 준비로 정신이 없을 캐롤라인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그가 주춤하는 틈을 타 캐롤라인의 옆을 무섭게 꿰찼다. 그러니 말이 예쁘게 나갈 수가 없었다.
“또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할 겁니까? 이전처럼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들에겐 불행한 과거가 있었고 프레져가 변하지 않는 이상 캐롤라인은 또다시 큰 상처를 입게 될 게 분명했다.
“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과거를 되풀이하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노력이 과거를 지워 주진 못하죠. 과거를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뻔뻔하게요?”
“지울 수는 없죠. 지워서도 안 되고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를 기억할 겁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프레져는 잠시 숨을 돌렸다. 이런 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본 적이 없기에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덮을 겁니다. 불행했던 과거를 이전보다 더 큰 행복으로요.”
과거를 잊지 말 것. 그리고 그 과거를 지표 삼아 더 나은 길로 나아갈 것.
그 길을 잘 따라가다 보면 이전보다 더 큰 행복으로 과거를 감싸 안을 수 있지 않을까.
프레져는 그런 의미를 담아 클리브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클리브는 걸음을 옮겨 캐롤라인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