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50)화 (150/156)

#외전 13화

“왜 내가 당신과 같은 객실을 써야 하는 거죠?”

“내일이 주말이잖아. 남은 스위트룸이 없대.”

“난 좋은 방 필요 없어요. 그냥 잠만 잘 수 있는 데면 돼요.”

“그런 닭장 같은 곳에서 당신을 재우라고?”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싫어.”

다음 날이 주말인 탓에 호텔엔 남은 스위트룸이 없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그녀가 좁은 방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다른 호텔로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프레져가 선택한 방법이 이것이었다.

“내일이면 방이 날 거래. 그 전까지만 같이 쓰면 돼.”

“지금 나보고 당신이랑 같이 자라는 거예요?”

“뭐 어때. 스위트룸에 남는 게 방인데.”

프레져가 머무는 객실은 스위트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었다. 방의 개수만 해도 5개가 넘었고 방마다 개별 욕실이 따로 붙어 있기까지 했다.

“당신이 마음에 드는 방에서 자. 나는 아무거나 남는 방에서 잘게.”

“하…….”

때마침 호텔 직원들이 캐롤라인의 짐을 챙겨 올라왔다. 브리오의 짐은 없는 걸 보니 그에겐 일반실을 내어 준 모양이었다.

브리오는 되면서 자신은 안 된다는 게 어이가 없는 캐롤라인이었다.

“당신도 나랑 같이 있는 편이 나을 거야. 당신이 잠들면 내가 깨워 줄 수 있잖아.”

“…….”

“당신 시간에 맞춰서 내가 마차를 대령할 수도 있고. 안 그래?”

하는 족족 맞는 말에 대꾸가 나오질 않았다. 캐롤라인은 뭔가 굉장히 억울한 기분이었다.

“벌써 3시 반이야. 지금 자도 4시간도 못 잘 걸.”

“…….”

“그냥 자지 말고 꼭 따뜻한 물로 씻고 자. 병원엔 병균이 많아서 그냥 잠들면 위험하니까.”

“……알았어요.”

오예.

프레져는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방으로 향하는 캐롤라인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작은 객실을 고를 것을.’

그녀와 다른 방을 쓴다는 게 아쉽긴 했으나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준 호텔 직원들과 투숙객들에게 선물이라도 사 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하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캐롤라인이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어 한다면 닭장 같은 객실일지라도 내어 줘야겠다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예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그가 갖은 망상을 하는 사이 샤워를 마친 캐롤라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고 있는 그녀는 편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그럼 난 이쪽 방에서 눈 좀 붙일게요.”

“그래. 늦지 않게 깨워 줄게.”

“고마워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프레져는 벽에 쾅, 하고 이마를 박았다.

“좋아서 죽을 것 같군.”

프레져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한쪽에 정리해 뒀던 서류를 펼쳤다. 캐롤라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이나 할 생각이었다.

“…….”

그러나 글자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공간에 캐롤라인이 잠들어 있단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까닭이었다.

‘캐롤라인도 나 같은 마음일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결국 프레져는 한 시간도 채 앉아 있지 못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캐롤라인에게 가기 위함이었다.

“캐롤, 자?”

몇 번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쩍 문을 열자 머리도 다 말리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캐롤라인이 보였다.

“자는구나.”

문고리를 잡고 있던 프레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온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에 힘이 빠졌다.

그러나 허탈함을 느낀 건 잠시였다.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자 다시금 가슴이 요동쳤다.

얼굴만 봐도 좋다는 게 이런 걸까?

동그란 이마 위에 보송보송 솟아 있는 잔머리도, 펑펑 운 탓에 살짝 부은 눈두덩도, 고른 숨을 뱉고 있는 입술도, 모조리 다 사랑스러웠다.

먼 옛날, 그와 그녀가 한 침대를 썼을 때. 프레져는 이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얼마든지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근데 왜 잠든 그녀를 지켜볼 생각을 못 했을까.

프레져는 소리 없이 후회하며 캐롤라인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으음…….”

무슨 꿈을 꾸는지, 그녀가 잠결에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프레져 역시 그녀의 입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작고 통통한 입술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퍽 자극적이었다. 타액으로 살짝 젖은 입술도, 그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혀도 지나치게 붉었다.

프레져는 무심코 그녀의 입술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며칠 밤을 피곤에 시달리다 이제야 겨우 잠들었는데,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단잠을 깨울 수는 없었다.

프레져는 결국 손을 옮겨 시트 위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좋은 꿈 꿔.”

프레져는 그런 마음을 담아 캐롤라인의 머리카락에 제 입술을 눌렀다.

고요하고 평화롭던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다. 해는 저 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곧 있으면 캐롤라인을 깨워야 할 시간이었다.

‘깨우기 싫다.’

무려 3시간을 넘겨 이러고 있었음에도 그녀를 깨워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일어날 시간이야.”

그래서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작게 말하면 아마 못 일어나겠지. 어찌 됐든 깨우긴 했으니까 나름 변명할 말도 있고.

“캐롤라인.”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제발 일어나지 못하길 빌며 한 번 더 속삭였다. 미동이 없는 그녀를 보는 그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난 분명히 깨웠어.”

당신이 안 일어난 거야.

그렇게 속살거린 프레져의 미소가 짙어질 즈음이었다.

“흐음.”

캐롤라인이 뒤척임 끝에 눈을 떴다. 이에 얼굴에 만개해 있던 프레져의 미소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잘 잤어?”

아쉽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프레져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캐롤라인을 불렀다.

“이제 슬슬 준비…….”

를 해야 하는데…….

프레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캐롤라인이 잠결에 그의 목에 팔을 둘렀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은 팔에 힘을 주어 프레져의 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굳건히 지탱하고 있던 상체가 캐롤라인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

갑작스런 스킨십에 얼어붙은 프레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맞닿은 피부로 그녀의 체온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체향은 또 어떻고. 막 샤워를 하고 잠든 탓에 캐롤라인에게서는 단내가 폴폴 풍겼다.

졸지에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게 된 프레져는 체향과 뒤섞인 달큰한 냄새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단단한 제 몸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너무도 작고 말랑해서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너무도 그리워했던 품이었기에.

프레져는 어정쩡하게 굳어 버린 팔을 움직여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론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쥐고, 나머지 손으론 유난히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더더욱 미칠 것 같았다.

“응……?”

캐롤라인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의 심장이 딱 터지기 직전이었다.

“으응?!”

이 모든 게 현실임을 뒤늦게 깨달은 캐롤라인은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손을 재빨리 풀었다. 그러곤 손바닥에 힘을 실어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억!”

그러자 프레져의 몸이 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캐롤라인은 서둘러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방의 구조, 석양의 위치, 프레져의 향기와 목소리. 꿈에서 본 모든 것이 현실과 똑같았다. 그렇다는 말은…….

“사람을 갑자기 밀치면 어떡해.”

맞은 부위가 얼얼한 듯, 쇄골께를 문지르며 일어서는 프레져를 보며 캐롤라인은 확신했다.

내가 잠에 취해 미친 짓을 했구나.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놀란 건 나야. 먼저 잡아당긴 것도 모자라 밀치기까지 했잖아.”

“나, 난 꿈인 줄 알고…….”

꿈에서 그녀는 헌티드 백작저의 부부 침실에 잠들어 있었다. 프레져와 함께. 그리고 프레져는 아주 다정하게 그녀를 깨웠다.

일어날 시간이야, 캐롤라인. 하고.

그녀가 원한 결혼 생활이란 대체로 그런 것이었다. 함께 소박한 저녁을 먹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고, 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는 것.

사랑하는 이의 인사로 시작하는 아침은 그녀가 늘 꿈꿔 왔던 것이었기에 캐롤라인은 망설임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

“꿈인 줄 알았다고?”

“네. 꿈이요.”

“그 말은, 꿈에서는 나를 안았다는 거야?”

“…….”

“응? 대답해 줘, 캐롤라인.”

찰나를 놓치지 않은 프레져가 매섭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캐롤라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비켜요. 나 이제 출발해야 해요.”

“응? 말해 봐. 꿈에선 나를 끌어안고 그랬어?”

“이러다 늦는다니까요.”

“그 정도로 내가 당신 꿈에 자주 나오나?”

실실 웃는 모양새를 보니 딱 봐도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괜히 억울해진 캐롤라인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남의 간절한 소망을 그렇게 놀려도 되는 거예요?”

“간절한 소망? 내가?”

“당신 말고 결혼 생활이요.”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남편의 아침 인사를 받으며 잠에서 깨는 건 내 오랜 소원이었어요.”

“…….”

“그렇게 간절했는데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꿈에도 나왔나 보죠.”

딱히 프레져를 책망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하고 나니 조금 서러워졌다.

그 쉬운 게 뭐라고 한 번을 안 해 줬는지.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런 꿈을 꾸는 이유도 다 프레져 때문인데. 제 속도 모르고 놀리는 프레져가 얄미웠다.

앞으로 당신과 같은 방을 쓸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프레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못 해 줘서 미안해.”

“…….”

“앞으로는 매일 그렇게 해 줄게.”

“앞으로는 무슨 앞으로예요. 당신이랑 나랑 같이 아침을 맞을 일이 뭐가 있다고…….”

툴툴거리던 캐롤라인은 제가 뱉은 말에 뒤늦게 놀라 얼굴을 붉혔다. 같이 아침을 맞이한다는 말이 너무도 민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한때 부부였고 그보다 더한 일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민망해지는 걸까.

“돼, 됐으니까 얼른 비켜요. 브리오가 기다리겠어요.”

캐롤라인은 이불을 발로 팡팡 찬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윽고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객실 문이 닫혔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누워 있던 침대 위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그의 귀가 터질 듯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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