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애런은 이제 프레져를 찢어 죽일 기세였다. 프레져는 연신 그 여자는 의사에 불과하다 말했지만 애런은 듣지 않았다. 헌티드 가문의 주치의를 두고 왜 다른 의사를 마치 비서처럼 옆에 끼고 다니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목걸이는 다 무엇이고.
손사래를 치며 해명하던 프레져는 클리브를 힐끗거렸다. 결코 그에게 도움을 바란 건 아니었으나 그라면 레어리의 정체도, 목걸이의 정체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
아니나 다를까, 클리브는 프레져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돌려 버렸다.
“애런, 진정하렴. 아니라잖니.”
“아니, 그래도 그렇죠!”
이디나의 만류에도 애런은 격분했다. 캐롤라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란 판에 다른 여자라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프레져가 레어리를 옆에 둘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수술의 부작용에 대해 말해야 했고 그가 앓고 있는 지독한 흉통에 대해서도 밝혀야 했다.
물론 프레져는 캐롤라인에게 짐이 될 사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디나가 했던 말이었다.
‘우린 가족이잖니. 그러니 서로를 속이진 말아야지.’
가족이라면. 그 말 하나가 프레져의 가슴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캐롤라인이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줬으면 했다. 그렇다면 의도가 어찌 됐든 서로를 속이는 일만큼은 없어야 했다.
믿음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니까.
“설명이 조금 길겠지만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전부 사실대로.”
* * *
프레져의 이야기를 들은 캐롤라인은 민망해했다. 그리고 그가 심장 수술의 부작용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걸 말 안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신경 쓸까 봐 그랬어. 미안해.”
“왜 당신이 미안해해요.”
미안해할 사람은 자신인데.
캐롤라인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머리가 흘러내리는 이유는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프레져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흉통을 앓는 줄은 몰랐기에 이디나와 애런 역시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는 흉통으로 인해 캐롤라인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프레져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예상이 됐으니까.
“클리브 선생님은 알고 계셨죠?”
캐롤라인의 물음에 클리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다 알면서 저한텐……!”
울컥 차오르는 화에 입을 열려던 캐롤라인은 클리브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상기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복받치는 감정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난 시간을 되돌린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프레져!”
“후회하지 않아.”
캐롤라인이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가슴을 가를 이유는 충분했다. 이보다 더 심한 부작용을 겪는대도 괜찮았다. 할 수 있다면 제 심장을 빼내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그래도 말은 했어야죠.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걸 2년이 넘게 숨길 수가 있어요.”
“신경 쓰일까 봐.”
자유롭게 날아갈 준비를 하는 캐롤라인이었다. 이제야 제 삶을 되찾은 그녀가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거짓말은 어차피 들켜요. 아무리 잘 숨겼다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됐을 거예요.”
“앞으론 안 속일게. 미안해.”
금방 들킬 거짓말이래도 상관없었다. 들키기 전의 그 짧은 시간이라도 그녀의 마음이 편했으면 했으니까.
실제로 진실을 숨겼던 2년 동안 캐롤라인의 마음이 편했다면 프레져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슬퍼하겠지.’
그래서 프레져는 입을 더 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이디나와 애런을 응시했다. 갑작스레 눈을 맞춰 오는 프레져에 애런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 분께도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실 필요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 같이 화를 내던 애런은 이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모두를 속인 건 잘못이었으나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절대 캐롤라인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유난히 경직된 자세, 긴장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심. 이에 애런과 이디나는 프레져에 대한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 * *
프레져가 셀넘으로 돌아간 뒤, 웨즐 가는 침묵에 휩싸였다.
프레져와 캐롤라인의 만남을 허락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속엔 오로지 프레져를 향한 미안함만이 가득했다.
캐롤라인은 짐가방을 싸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침대 밑에 넣어 두었던 편지함이 떠올랐다. 노르티움에서 돌아옴과 동시에 열어 본다는 것이 프레져를 만나느라 잊고 있던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미처 확인하지 못한 편지들을 모조리 뜯었다. 그러자 그 안의 짧은 편지와 공연 티켓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중에는 얼마 전 프레져와 함께 보고 온 공연의 티켓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보 같은 인간…….”
캐롤라인은 날짜가 지나 버린 표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표가 매진되었다는 말에 편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건 다 나를 위해서였겠지. 편지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킨 내가 미안해할까 봐.
그 마음이 너무 미안하고 또 안쓰러워서. 이전보다 살이 빠진 이유도 다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니 그가 짠해 견딜 수가 없었다. 버거워서 그저 눈물만 흘렀다.
캐롤라인의 울음소리가 어둠이 내린 복도에 울려 퍼졌다.
“…….”
찻잔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클리브는 착잡한 표정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공교롭게도 이디나가 노르티움으로 향하는 날은 헌티드하우스의 남부 일정이 끝나는 날이었다.
물론 프레져는 얼마든지 더 남부에 머물 생각이었으나 캐롤라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구둣방을 지켜야 하는 애런을 대신해 이디나와 함께 노르티움에 가야 했으니.
프레져는 캐롤라인 일행이 출발할 시간에 맞춰 로우밸리로 향했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자 마차에 짐을 싣는 마부가 보였다. 클리브는 마부와 함께 짐을 옮기는 중이었고 브리오는 이디나를 마차까지 이끄는 중이었다. 캐롤라인은 수술에 필요한 서류를 마지막까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캐롤라인은 프레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빠 보이네.”
“이제 곧 출발해야 하니까요.”
잠시 서먹한 인사가 오갔다. 그날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기에 분위기는 마냥 부드럽지 못했다.
“두 달 후에 온댔나?”
“아마도요. 일이 잘 풀리면 더 빨리 올 수도 있고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요.”
“아직도 화가 난 거야? 나는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화 안 났어요.”
단호한 대답에도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기분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캐롤라인은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난 그냥 예전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걱정되는 것뿐이에요. 당신은 대표고 또 가주잖아요.”
“…….”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캐롤라인이 노르티움에 입원해 있던 시절, 그녀를 간호한다고 헌티드하우스와 백작가를 방치했던 걸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에 할 말이 없어진 프레져는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면 잊지 않고 연락할게요. 그러니까 수도로 돌아가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요.”
“응…….”
그 순순한 태도에 캐롤라인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어쩐지 어깨가 축 늘어져 보이는 모습이 가엾으면서도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무슨 헛생각을.’
의식의 흐름에 놀란 캐롤라인은 파드득 몸을 떨며 프레져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자 그제야 프레져의 뒤편에 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예요?”
캐롤라인의 물음에 프레져의 눈이 힐끔, 뒤로 돌아갔다.
“마차.”
“아니, 마차인 건 나도 아는데…….”
프레져가 가져온 마차는 무려 사륜마차였다. 말들 역시 전부 덩치도 크고 털도 반지르르한 것이, 말을 잘 모르는 그녀가 봐도 좋아 보일 정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사설 마차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를 자랑하는 마차는 아주 고급스러웠고 바퀴 역시 몹시 튼튼해 보였다.
“저 큰 걸 혼자 타고 온 거예요?”
“아니. 내가 탈 거 아니야.”
“그럼요?”
“당신이랑 당신 어머니가 탈 마차지.”
“네?”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캐롤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작 프레져는 평온한 표정으로 마차 문을 열었다.
“이거 타고 가.”
성인 네 명은 족히 누울 수 있을 만한 넓은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푹신한 시트과 쿠션이 잔뜩 깔려 있기까지 했다. 비상시를 대비한 식량과 구급품도 마차 바닥에 구비되어 있었다.
“어머님 수술하셔야 하잖아. 수술 전엔 컨디션 관리가 필수고.”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거절할 수 없도록 이디나를 들먹였다.
“체력이 좋아야 회복도 빠르지 않겠어?”
“그렇긴 한데…….”
역시나 캐롤라인은 좀처럼 거절을 하지 못했다.
마차의 승차감은 둘째치고, 말이 무려 네 마리나 달려 있으니 예상보다 빠르게 노르티움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수술을 받을 수 있겠지.
캐롤라인은 망설임 끝에 이미 짐 싣기를 끝낸 사설 마차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미 마차를 불렀는걸요.”
“다시 돌려보내면 되지.”
“짐도 다 실었어요.”
“다시 옮기면 돼.”
프레져는 끈으로 짐을 고정하고 있는 마부에게 다가갔다. 짐을 전부 다른 마차로 옮기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마부는 프레져가 웃돈을 얹어 주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부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양하지 말고 편히 타십쇼.”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이디나와 애런, 브리오는 얼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푹신한 승차감을 맛보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들 중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은 클리브 한 사람뿐이었다.
프레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클리브에게 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노르티움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프레져는 부러 ‘의사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의사와 환자로서의 경계를 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냐며 핀잔을 주고 싶은 것을 캐롤라인의 앞이라 참는 것뿐이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클리브가 프레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악수를 하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돌았다.
프레져는 마차가 출발하기 전, 마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클리브 헤이오스가 허튼짓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제대로 감시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