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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47)화 (147/156)

#외전 10화

리얄 조르바는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셀넘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프레져를 만나지 못했다. 과로를 이유로 레어리가 오후 9시 이후 올라오는 보고를 모두 물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레져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캐롤라인이 떠난다고?”

“네. 일이 생겨서 두 달 정도 북부에 계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건 달리 말씀 주신 게 없어서…….”

평소보다 배는 사나워진 프레져의 기세에 조르바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서성이던 프레져는 머리를 헤집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외에 다른 건? 평소와 다르다든지, 무슨 일이 생겼다든지, 이런 건 없었나?”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이긴 하셨습니다만.”

“하…….”

역시. 제가 찾아오지 않아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언정 얼굴 한 번이라도 비쳐야 했는데.

어쩌면 그사이에 마음이 식은 것일지도 몰랐다. 왜,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프레져가 온갖 걱정으로 초조해할 즈음, 조르바가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집에 손님이 오신 것 같았습니다.”

“손님?”

“네. 스치듯 본 거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밝은 금발 머리에 안경을 쓴-”

거기까지 들은 프레져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조르바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에게 신경 쓸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클리브 헤이오스…….”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손님의 정체는 클리브 헤이오스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갑자기, 하필이면 북부로 떠날 이유가 없었다.

“두 달이나 북부에 있겠다고?”

그 여우 같은 인간이 대체 무슨 말로 캐롤라인을 옭아맨 걸까. 얌전히 그레타에 있지는, 뭣하러 글랜포드에 남아서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지.

프레져는 만년필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어, 어디 가십니까?”

“로우밸리에.”

“예에?”

“말리는 놈은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해라.”

* * *

“이랴!”

말발굽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공기를 뿌옇게 물들였다. 먼지를 가르며 앞으로 향하는 이의 정체는 바로 프레져였다.

도심 한복판에 살며 승마는 폴로 경기를 할 때 빼곤 거의 하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캐롤라인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클리브에 대한 질투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흙먼지를 얼굴에 반쯤 뒤집어썼을 즈음,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사는 마을 인근에 도착했다. 그는 속도를 낮춘 뒤 말을 근처에 매어 두고 황급히 캐롤라인의 집을 향해 달렸다.

때마침 집 앞 잔디밭 위에 쪼그려 앉은 캐롤라인이 보였다. 등을 둥글게 말고 있는 탓에 그녀의 가녀린 체구가 더욱 작아 보였다.

왜 땅바닥에 저렇게 웅크려 앉아 있는 걸까, 안쓰러워 보이게. 혹시 마음 상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어쩌면 자신이 캐롤라인을 저리 의기소침하게 만든 건가?

“캐롤라인!”

초조함을 참지 못한 프레져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그 잠깐을 참지 못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캐롤라인의 고개가 프레져 쪽으로 돌아갔다.

그를 응시하는 캐롤라인의 동공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확장되어 있었다. 이에 프레져는 더욱 초조해졌다.

“미안해. 역시 내가…….”

분명 실망했겠지. 크게 화가 났을 것이었다. 프레져는 죄인이 된 마음으로 캐롤라인에게 다가섰다.

“오지 말아요.”

아니나 다를까, 캐롤라인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하는 제스처까지 하고 있었다.

“미안해. 제발 사과할 기회를 줘.”

“오지 말라니까요!”

프레져를 말리면서도 캐롤라인의 고개는 계속 옆으로 돌아갔다. 주변을 살피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혹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자칫 잘못했다간 그녀를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여기에 서 있을게. 그러니까 제발…….”

프레져의 말은 딱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소란을 들은 이디나가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 캐롤라인, 잡초 뽑다 말고 무슨 일이니? 말소리가 계속-”

“으아무것도! 아니에요!”

캐롤라인은 빛의 속도로 달려 프레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디나는 앞을 보지 못하니 조용히 있으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 밖에 나갈 땐 미리 말 좀 해 달라니……. 뭐야?”

이디나에 이어 애런이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브리오에 클리브까지, 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딸려 나왔다. 나란히 서 있는 프레져와 캐롤라인을 본 이들은 모두 메두사의 얼굴을 본 용사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왜 그러니? 응? 말을 해 줘야 알지.”

이디나 한 사람만 빼고.

‘망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싸늘하게 식은 손이 아래로 툭, 힘없이 떨어졌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이 목소리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레져 헌티드입니다.”

* * *

캐롤라인은 프레져를 참 쓸데없이 예의 바른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인사할 정신이 있다니.

그러나 프레져로서는 당연히 해야한 일을 한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이의 가족인데 예의 없이 멀뚱멀뚱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물론 클리브 헤이오스에게는 좀 더 예의 없이 굴어도 괜찮을 것 같지만.

“백작님이 왜…… 거기서 나오시는 거죠?”

애런의 떨떠름한 질문에 프레져는 클리브를 노려보던 눈을 공손히 내리깔았다. 양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상태였다.

“보아하니 이전부터 계속 만났던 것 같은데.”

이번 질문은 캐롤라인에게 향했다. 캐롤라인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밖에 나갈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얘가 다른 도시에 무슨 친구가 있다고.”

“…….”

“갑자기 웬 향수를 뿌리지 않나, 외출 준비만 몇 시간을 하지 않나.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이디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허벅지에 묻을 기세로 수그렸다.

프레져와의 만남을 들켰다는 것보다 제가 그를 만나기 위해 때를 빼고 광을 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게 더 부끄러웠다. 혼자서 갖은 도도한 척은 다 했기에 더욱 민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프레져의 입꼬리가 지렁이처럼 씰룩이고 있었다.

‘흥, 뭘 잘했다고.’

샐쭉해진 캐롤라인은 팽, 하고 고개를 돌리다 반대쪽에 앉아 있던 브리오와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한 2주 됐나……?”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야.”

게슴츠레 눈을 뜨는 애런에 캐롤라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노르티움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어. 그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거고.”

“본격적으로?”

“응. 이 사람이 나랑 잘해 보고 싶대잖아.”

“뭐어?”

“뭐라고?”

“네?”

“……?”

잘해 보고 싶다. 그 세 어절의 말에 네 사람에게선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공통점이 있다면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라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염치없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진심으로 캐롤라인과 잘 지내 보고 싶습니다.”

프레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캐롤라인만큼이나 슬픈 시절을 겪었던 가족들에겐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까지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노력했고, 또 노력하는 중입니다. 캐롤라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끔요.”

프레져는 내친김에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에 클리브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졌으나 애런과 이디나의 얼굴은 점차 누그러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엄마. 그리고 오빠.”

“뭘 또 미안하다고…….”

딸의 사과에 이디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거짓말을 할 만큼 우리가 너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단 게 마음이 쓰이는구나.”

프레져가 미운 건 여전하나 그렇다고 해서 캐롤라인의 마음이 향하는 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병원에서 퇴원하던 2년 전, 프레져에게 향하는 캐롤라인을 어떻게든 끌고 가려 했겠지.

“나는 너를 믿고 너의 선택을 존중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국 난 네 편에 설 거야.”

“엄마.”

“우린 가족이잖니. 그러니 서로를 속이진 말아야지.”

“미안해요. 난 그냥 엄마도 애런도 걱정할 것 같아서…….”

캐롤라인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눈가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제 가족이 어떤 사람들인데. 또 혼자 지레 겁먹고 뒤로 숨으려 했다.

“하지 말라고 해도 결국 마음대로 할 거면서. 이 고집쟁이야.”

애런은 고개 숙인 동생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너는 이 사람이 좋은 거지? 다시 시작하고 싶을 정도로.”

“응. 그랬지.”

“그랬지……?”

아니, 지금까지 이 난리를 쳐놓고?

의미심장한 말에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프레져는 손바닥에 가득 맺힌 땀을 바지춤에 닦으며 입을 열었다.

“그랬다니? 그게 무슨…….”

“요 며칠 바쁘다고 하더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더라고.”

“다른 여자를 만나?”

애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프레져를 노려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에 프레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오빠란 인간은 생각보다 쓸모 있는 방패막이구나. 태어나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캐롤라인은 내친김에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빨간 긴 생머리가 아주 아름다운 여성분이셨지.”

“빨간 머리…… 아!”

제 주변의 빨간 머리라곤 의사 레어리 이던스 한 사람밖에 없었다. 프레져는 해명하기 위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 캐롤라인. 해명할게. 당신이 본 여자는-”

“처음 보는 목걸이도 하고 다니더라고. 아주 소중한 건지 옷 속에 야무지게 넣어서.”

“뭐? 목거리이이?”

과거 헌티드 백작에 쩔쩔매던 웨즐 남작은 이제 없었다. 그에게 프레져는 여동생을 괴롭혔던 악마인 것도 모자라 여동생을 다시 차지하려는 파렴치한, 이젠 겉과 속이 다른 양아치이기까지 했다.

“잘 해보고 싶다면서 긴 생머리이? 목거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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