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46)화 (146/156)

#외전 9화

셀넘의 안과에 도착한 이디나는 곧바로 검사를 받았다. 레어리가 제 지인에게 말을 잘 전해 준 덕이었다.

다행히 이디나의 눈은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된 단계는 아니라 수술이 가능한 상태였다. 물론 수술을 하고 나서도 안경을 필수로 착용해야겠지만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디나는 행복해했다.

세 사람은 추후에 있을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캐롤라인이 안내한 식당으로 향했다.

“멋진 곳이네요.”

“그렇죠?”

캐롤라인이 데려간 곳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식당이었다.

모서리 없이 둥근 테이블에 화병 대신 라탄 바구니에 담겨 있는 꽃, 창가에 놓인 각종 화분들까지. 이 작은 공간이 꼭 캐롤라인을 닮아 있어 클리브는 웃음이 나왔다. 물론 이곳이 캐롤라인과 프레져가 함께 왔던 곳임을 몰랐기에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프레져와 함께 먹었던 메뉴 중 특히 맛있었던 음식 몇 개를 주문했다. 머지않아 식탁 위엔 샐러드와 파니니, 수프가 놓였다.

“와, 정말 맛있네요. 역시 캐롤라인이 추천한 맛집다워요?”

“다행이네요.”

클리브의 찬사에 대꾸해 주면서도 캐롤라인은 웃지 못했다. 파니니 사이에 브로콜리가 끼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샐러드엔 시금치가 섞여 있기까지 했다.

‘저번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프레져와 먹었던 음식엔 브로콜리도, 시금치도 없었다. 혹 잘못 시킨 건가 싶어 다시 메뉴판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실수는 없었다.

“캐롤라인은 안 먹어요?”

“지금 먹으려고요.”

심장 수술 이후 유독 편식이 심해진 그녀였으나 클리브 앞에서 편식을 할 수는 없었다.

‘애도 아니고.’

결국 캐롤라인은 억지로 브로콜리와 시금치를 먹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탈이 나고 말았다.

“괜찮아요?”

“아니요…….”

캐롤라인은 시름시름 앓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기에 왜 먹지도 않는 걸 주워 먹어서는. 난 당연히 네가 안 먹고 남겼을 줄 알았다.”

이디나는 핀잔을 하면서도 딸의 손을 열심히 주물거렸다.

“아래를 보지 말고 창밖을 봐. 그래야 멀미라도 안하지.”

“알았어요.”

캐롤라인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마차는 셀넘의 아름다운 번화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번화가의 중심엔 오페라 극장이 있었고.

‘저기에 프레져가 있을 텐데.’

캐롤라인은 쓰린 속을 붙잡으면서도 프레져를 생각했다. 지금 당장 마차를 극장 앞에 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속은 좋지 않고 옆엔 이디나와 클리브가 있었다. 그나마 극장과 가까운 길로 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거리엔 사람이 많아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캐롤라인은 마부가 더욱 굼뜨게 움직여 주길 바라며 프레져가 있을 오페라 극장을 눈에 담았다.

“어?”

그때였다. 프레져가 시야에 들어온 건.

참을 수 없는 반가움에 수그리고 있던 상체가 쭉 펴졌다. 그러나 그녀의 상기되었던 얼굴은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저 사람은 누구지?’

프레져의 옆에 웬 여자 한 명이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붉은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은 여자는 단정한 차림이었다.

‘일 때문에 만난 거라면 손에 서류라도 들려 있어야 할 텐데.’

서류를 이것저것 들고 있는 휴고와는 달리 그녀는 작은 가방 하나만 달랑 멘 채 프레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종종 웃기까지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프레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무시가 되지 않았다.

마침 걷고 있던 여자가 멈춰 서더니 프레져의 쇄골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프레져가 셔츠 안에서 웬 목걸이를 꺼냈다. 가운데 달린 펜던트가 큼직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프레져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고?’

그것도 저렇게 큼지막한 걸.

목걸이는 헌티드 저택에서도 본 적 없던 것이었다. 게다가 프레져가 시계나 결혼반지 외의 액세서리를 착용한 것도 처음이었다.

“어째서?”

“응? 왜 그래?”

그녀의 혼잣말에 이디나가 대꾸했으나 캐롤라인에겐 대답할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찾아오지 못한 이유가 저 목걸이, 정확히 말하자면 저 여자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극장을 지나쳐 갔다.

* * *

“이제 좀 가지?”

“안 됩니다. 그러면 또 무리하실 거 아닙니까.”

휴고의 만류에 프레져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2년 사이 주변인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게 된 프레져였다.

“휴고는 그렇다 쳐도, 그쪽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겁니까?”

“흉통을 한 시간 넘게 앓던 환자를 두고 갈 만큼 직업 의식이 없진 않습니다만.”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이젠 멀쩡합니다.”

“원래 부작용은 멀쩡한 줄 알았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죠. 바로 며칠 전처럼요.”

레어리의 말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이곳이 수도라면 자리를 비웠겠지만 여긴 남부지 않습니까? 헌티드 가문의 주치의도 없는데 저번처럼 쓰러지시면 큰일입니다.”

한술 더 뜨는 휴고에 프레져는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수도에 있어야 할 의사가 대체 왜 남부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백작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이번 흉통은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약도 잘 듣지 않았고요.”

제 가슴께를 가리키며 말하는 레어리에 프레져는 셔츠 안에 넣어 두었던 목걸이를 꺼냈다.

펜던트 안은 새로운 약으로 채워져 있었다. 저번에 썼던 진통제가 잘 듣지 않자 레어리가 다른 것으로 채워 준 것이었다. 물론 이번 약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독한 종류였고.

“알았으니 다들 좀 떨어져서 걸어 주면 좋겠는데.”

프레져는 결국 체념했다. 그렇다고 해서 캐롤라인을 보고픈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이들을 다 밀치고 캐롤라인에게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겐 바로 며칠 전에 쓰러진 전적이 있었다. 약도 잘 듣지 않는데 캐롤라인의 앞에 나섰다가 재수 없이 흉통이라도 이는 날엔 큰일이었다.

‘어떻게 숨겨 왔는데. 캐롤라인이 알게 할 순 없어.’

캐롤라인은 자신이 앓고 있는 부작용에 대해 몰라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 앞에서 쓰러지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리얄 조르바는 지금 어디 있지?”

“단원들과 함께 연습실에 있는 모양입니다.”

“다시 로우밸리에 다녀오라고 전해. 내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 말하고.”

“네.”

휴고는 레어리에게 눈짓을 보낸 뒤 리얄 조르바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머지않아 리얄 조르바는 또다시 로우밸리로 향하는 여정에 올라야 했다.

* * *

“아이고, 허벅지야.”

리얄 조르바는 안장 위에 앉아 저려 오는 허벅지를 두드렸다. 빠른 연락을 바라는 대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차 대신 말을 선택한 것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표님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휴고가 전했던 고맙다는 인사에 퍽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말 한 번 타는 거에 월급 인상이면 괜찮지.”

그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말을 몰았다. 그가 로우밸리에 도착했을 때는 캐롤라인이 짐을 싸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르바의 얼굴을 알아본 캐롤라인은 가족들에게 대충 둘러댄 뒤 서둘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나갔다.

그러나 손님을 반갑게 맞아 준 것과는 달리, 프레져의 소식을 듣는 그녀는 조금 이상했다.

“이번에도 많이 바쁘대요?”

어딘가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해 보이기도 하고.

“예에. 직접 찾아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무언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반응에 조르바는 쩔쩔매기 시작했다.

“정말입니다. 지금 남부 공연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으셔서…….”

실제로도 바쁜 건 사실이기에 조르바는 허둥지둥 업무에 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캐롤라인은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극장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네?”

조르바는 이제 울고 싶어졌다.

분명 말만 전하고 오라 했지 캐롤라인이 찾아올 것에 대한 대처법은 알려 주지 않았는데.

“저, 오시는 거야 부인, 아니, 영애의 자유지만…….”

캐롤라인은 눈에 띄게 당황한 조르바를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프레져의 옆에 있던 여자가 누구인지, 그 목걸이는 대체 뭔지, 정말 바빠서 못 오는 게 맞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전 부인이었다. 그녀는 바쁜 전 남편을 의심이나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프레져를 믿고 싶었다.

그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최근 들어 그는 달라지지 않았나. 그런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일은 없다고 굳게 믿고 싶었다.

“아니에요. 바쁘다는데 어쩔 수 없죠. 그냥 한가할 때 연락하라고 전해 주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라는 말과는 달리 캐롤라인의 얼굴은 언짢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평소보다 어수선한 집안과 남다른 캐롤라인의 분위기에 조르바가 넌지시 질문했다. 이에 캐롤라인은 체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집을 떠날 계획이거든요.”

“네, 네에?”

“당분간 북부에 가 있을 예정이에요. 못해도 한 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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