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42)화 (142/156)

#외전 5화

“어…….”

캐롤라인은 당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프레져가 나타날 줄은 조금도 예상 못 했기 때문이었다.

놀란 건 프레져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꿈인가? 아님 그리움에 미쳐 환영을 보고 있는 건가. 바람에 풍겨 오는 그녀의 체향에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존재가 환상이 아님을 실감했다.

“여행 중인 거 아니었나?”

“마치고 돌아왔어요. 한 3주쯤 전에요.”

“아.”

그래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프레져는 그녀에게서 대답을 들은 후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꼬박 2년 만의 만남이었다. 프레져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전보다 좀 더 짧아진 머리, 혈색이 도는 피부, 콧잔등에 귀엽게 올라와 있는 주근깨.

“여행은 즐거웠어?”

“네.”

지난 여행을 떠올리는지 당황으로 물들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전보다 건강해 보이는 얼굴도, 콧잔등에 달고 온 여행의 흔적도. 그녀에게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즐거움과 자신감이 보여서 프레져는 그녀의 모든 변화가 기꺼웠다.

때마침 잠시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캐롤라인의 정수리 위로 이른 여름의 해가 쏟아졌다.

“날이 좋네요.”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어색함에 날씨 얘기나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계절은 봄만이 아니구나. 쨍한 햇빛과 푸르른 녹음도 잘 어울리는 여자구나.

이 여자의 가을은, 또 겨울은 어떨까. 일 년 후는, 또 십 년 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프레져는 그녀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프레져?”

“아, 응.”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프레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 입을 열었다.

“공연을 보러 온 거야?”

“아니요. 어쩌다 보니 우연히 들른 거예요. 온 김에 볼까 해서 매표소에 가 봤는데 표도 없더라고요.”

“표가 왜 없어?”

“매진이라서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말하는 캐롤라인에 프레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열어 보지 않았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냈던 편지도 마찬가지인 걸까.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원래 기다림이라는 것은 지독한 것이니까.

그는 부러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해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대신 다른 말로 물꼬를 텄다.

“그럼 같이 볼래? 아직 시작 전인데.”

“자리가 없을 텐데요.”

“내가 대표야. 자리야 만들면 돼.”

“음…….”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캐롤라인은 당황했다.

그와 나란히 앉아 오페라를 보게 되는 일은 계획에 없었는데. 어쩌지.

‘근데 내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던 적이 있었나?’

여행을 시작한 이후부터 캐롤라인은 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았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살았다. 현실보다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마음은,

“좋아요.”

프레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 * *

프레져와 캐롤라인은 극장 출입구 쪽이 아닌 직원 전용 통로로 향했다. 공연을 준비하던 이들은 헌티드 백작에 한 번, 그의 옆에 선 여자를 보곤 두 번 놀랐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아, 아닙니다.”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캐롤라인이었다. 그녀의 미소에 벙쪄 있던 직원들은 뒤늦게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그들은 평소보다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레져는 소란을 떠는 직원들에게 눈총을 주다 캐롤라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난처한 듯, 그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많이 불편해?”

“아니요. 괜찮아요.”

캐롤라인은 난감함에 귀를 붉히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건 나잖아.’

그리고 함께 오페라를 보자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지.

후회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모든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 정도 부담감쯤은 의연하게 넘겨야 했다.

“저쪽 코너만 돌면 공연이 열리는 홀이야. 얼마 안 남았어.”

프레져는 점점 붉어지는 그녀의 귀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당황할 때면 귓바퀴가 빨개지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공연장이 여기서 아주 멀었으면 했다. 가능하다면 아주 느리게 걷고 싶었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과 캐롤라인을 보고 사방에 소문을 퍼트려 주길 바랐다.

조금 약긴 했지만 소문이 퍼지면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이미 사교계에는 프레져가 캐롤라인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캐롤라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는 프레져의 눈치를 봐 조용히 있는 것이었을 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공연장 안이었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귀빈석으로 이끌어 빈 좌석에 앉혔다. 원래는 휴고가 앉기로 되어 있던 자리였다.

무대는 잘 보이는지, 줄거리는 어떤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속으로 땀을 훔치며 오로지 정면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머지않아 조명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왜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죠? 왜 자꾸만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극은 발을 쾅 구르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주인공은 높은 성벽을 뛰어넘어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고자 했다. 그런 주인공을 막는 건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지진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재앙이 일어났다 말하지만 주인공에겐 아니었다. 지진 덕에 성벽 일부가 무너져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나무 아래 묻어 두었던 금화를 챙겨 밤에 몰래 성을 빠져나간다.

지진은 모두에게 재앙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물론 주인공 앞에 닥친 세상은 예상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굳은 날씨도 있고 그녀를 좌절하게 만드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다시 일어섰다. 스스로 일어서다 힘이 들면 여행길에 만난 동료의 도움으로 다시 걸어 나갔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꽃으로 가득했다는 걸 발견한다.

“갈색 구두를 신고 네가 가고픈 길로 나아가 보렴.”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의 등장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돌려 프레져를 응시했다.

“구두장이의 노래…….”

자신이 즐겨 부르던 구두장이의 노래를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었다.

감미로운 선율에 한 번, 프레져가 이 노래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한 번 더 큰 감동을 받은 그녀였다.

그러나 프레져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쳐다보면 자랑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반응을 안 해 주긴 좀 그렇고. 나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다고 티 좀 내고 싶긴 한데 그랬다간 쪼잔해 보일 것 같고.

그의 이런 복잡한 심경은 꿀렁 움직이는 목울대로 대신되었다. 이를 목격한 캐롤라인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대를 응시하는 그녀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마지막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 성벽 앞에 서서 고민한다. 다시 돌아갈까 말까.

이들에게 바깥이 아름답다는 걸 알려 줄까, 아니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다시 떠날까.

고민하는 주인공을 향해 조연들은 노래를 부른다.

“꽃아, 지는 걸 슬퍼하지 말렴. 짧은 기다림이 지나면 계절은 다시 돌아올 테니.”

그리고 주인공 역시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며 극은 막을 내렸다. 물론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휘파람을 부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이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캐롤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천장엔 그 흔한 샹들리에 하나 달려 있지 않았다. 화려한 드레스도, 남녀의 불같은 사랑 이야기 하나 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오페라보다 가슴이 떨렸다.

이건 헌티드하우스의 실력이 이전보다 더욱 발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왜 그래?”

사람들이 나가고 직원 통로를 빠져나갈 때까지 캐롤라인이 말이 없자 프레져는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극이 재미가 없었나? 딱 봐도 주인공은 캐롤라인인데, 함부로 자신을 가져다 썼다고 화를 내려나?

“혹시 재미없었어?”

“아니요. 재밌었어요.”

“진심이야?”

“네.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재밌었어요. 진심이에요.”

캐롤라인의 진심. 그리고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한 자신의 진심.

프레져는 진심이 닿는다는 추상적인 말의 가치를 깨달으며 용기를 냈다.

“그럼 또 와.”

“또요?”

“응. 자리야 만들면 되는 거니까. 당신이 보고 싶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더 보게 해 줄게.”

태연한 체하고 있긴 했지만 프레져는 거절당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음…….”

캐롤라인의 고민이 이어지는 사이, 두 사람은 출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연 시작 전까지만 해도 환했던 바깥엔 벌써 저녁이 찾아와있었다.

“저, 배는 안 고파?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갈래?”

거절당할 것 같은 예감에 프레져는 냉큼 화두를 바꿨다. 내일 그녀를 만나지 못해도 오늘 식사를 함께한다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가족들이랑 같이 먹기로 해서요.”

“아하.”

역시 안 되는구나.

근데 한다는 대꾸가 겨우 아하라니. 멍청이도 아니고. 좌절한 그를 향해 먼저 입을 연 건 캐롤라인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일은 괜찮을 것 같은데.”

“…….”

“내일은 안 돼요? 수도로 돌아가야 하나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멍하니 듣던 프레져는 뒤늦게 말의 뜻을 헤아리곤 퍼드득 몸을 떨었다.

“아니, 그럴 리가. 나 아주 오래 있을 거야, 여기 남부에.”

손사래까지 치며 한가함을 강조하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때마침 밤의 온도를 머금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럼 내일 같이 저녁 먹어요. 내가 이 근처로 올게요. 로우밸리엔 뭐가 없으니까.”

“데, 데리러 갈게.”

프레져는 대답해 놓곤 좌절했다. 쪼다같이 데, 데리러 갈게라니.

“됐어요.”

캐롤라인의 눈에도 자신이 모자라 보였을까? 그녀는 로우밸리까지 바래다주겠다는 프레져의 호의를 거절한 채 홀로 기차역으로 떠났다.

“젠장.”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떠나고 나서야 못해도 기차역까지 따라가야 했다고 후회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면 그녀가 싫어할까 봐 가만히 있었던 건데. 이런 번잡한 도시에 캐롤라인이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상체를 수그리는 프레져에 휴고가 허겁지겁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또다시 흉통이 찾아온 걸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휴고.”

“네. 뭐든 말씀하십쇼. 병원으로 모실까요?”

“내일 일정은 취소다.”

그러나 마주한 프레져의 상태는 멀쩡했다.

“……네?”

“당분간은 계속 여기서, 아니, 로우밸리 근처에서 머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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