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40)화 (140/156)

#외전 3화

“노르티움이라…….”

패트릭의 서신을 읽은 프레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은 허탈해 보였다.

“대표님께서 수도를 떠나신 직후에 받은 연락이라…….”

프레져의 짐을 들고 뒤늦게 합류한 직원이 쩔쩔매며 말꼬리를 흐렸다.

저 서신에 이렇게 중요한 얘기가 적혀 있는 줄 알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수고했다. 내 짐은 거기 두고 네 방으로 가 봐.”

“앗, 넵.”

화를 낼 줄 알았던 프레져의 반응은 멀쩡하기만 했다. 직원은 허둥지둥 인사를 하곤 프레져의 객실을 떠났다.

“글랜포드로 돌아왔구나.”

그녀가 돌아왔다는 것에 반가운 마음도 반, 글랜포드에 돌아왔음에도 자신을 찾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함이 반이었다.

왜 노르티움에 간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 나는 없을까? 혹 클리브 헤이오스를 만나러 간 거면 어떡하지? 그 작자는 아직도 그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을 텐데.

사실 그녀가 검진 때문에 매년 노르티움에 방문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리브를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노르티움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도졌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됐다.

자유를 찾아 날아가라고 놓아준 것이었다. 기다리겠다 해 놓고 그녀를 잡기 위해 나서는 것은 할 짓이 못 됐다.

설령 그녀가 제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클리브가 아닌 다른 인연을 찾아 떠난다고 해도. 자신에겐 그녀를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날갯짓을 응원해 줘야 했다.

“차라리 수도에 있을 것을.”

“지금이라도 기차표를 끊을까요?”

“아니. 됐다.”

조심스럽게 묻는 휴고를 향해 프레져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건 역시나 힘든 일이었다.

* * *

에릭과 결혼할 거라는 스테파니의 폭탄선언에 한 번, 이미 살림을 차린 듯한 집안 내부에 놀란 게 또 한 번이었다. 타향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는 게 연인 사이로 발전한 모양이었다.

스테파니와 에릭, 힐롱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회포를 풀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캐롤라인은 다소 벙벙한 상태로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그녀가 잠이 덜 깬 상태로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캐롤라인과 브리오는 차례로 검진을 마친 뒤 홉킨스 박사가 기다리고 있는 진료실로 향했다.

“두 사람 다 아주 건강하네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홉킨스 박사의 선언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브리오 역시 내심 긴장을 했던 모양인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관리만 지금처럼 잘해 주시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똑같이 내년 이맘때쯤 오시면 되고요.”

“감사합니다.”

캐롤라인과 브리오는 진료실 안 모든 의료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클리브 선생님도 계시면 좋을 텐데.’

듣자 하니 그는 지금 수술을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레타로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노르티움 병원의 정식 의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쉽지만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려야겠다 마음먹은 캐롤라인이 자리에서 일어설 즈음이었다.

똑똑똑.

조급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진료실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고르지 못한 숨을 뱉으며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클리브였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캐롤라인. 브리오도 오랜만이네.”

“수술 중인 거 아니셨어요?”

“아, 간단한 수술이라 금방 끝났습니다. 마침 마무리 단계이기도 했고요.”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드는 클리브를 홉킨스 박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바라봤다.

“간단한 수술이라곤 하지만, 너무 빨리 끝낸 건 아닌가 걱정이군.”

캐롤라인이 왔다는 소식에 수술을 대충 끝낸 게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이에 클리브는 헐떡이던 숨을 고르고 차분히 대답했다.

“환자 목숨이 달린 일을 허투루 처리하진 않습니다.”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지.”

다른 사람도 아닌 클리브 헤이오스가 일을 대충 할 리가 있나.

홉킨스는 클리브의 투철한 직업 정신과 그보다 대단한 순정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다음 진료를 봐야 하니 다들 나가서 이야기하게.”

진료실에서 쫓겨난 세 사람은 병원 앞 정원을 거닐었다. 정원에는 몇 년 새 못 보던 종류의 꽃들이 늘어 있었다. 이는 마리아 병원과의 수술 공유를 통해 노르티움 병원의 입지가 단단해졌음을 보여 주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선생님이 아직도 노르티움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노르티움 병원의 의사가 되셨을 줄도요.”

“캐롤라인이 워낙 연락이 없었어야죠.”

“하하.”

잔뼈가 굵은 핀잔에 캐롤라인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바빴던 탓에 가족에게도 잘 지내고 있다는 짧은 편지만 보냈었다. 그런데 생판 남인 클리브에게 연락을 잘 했을 리가 없었다.

“농담이에요. 물론 정기 검진 날에 맞춰 오지 않았다면 걱정했겠지만.”

심장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모아처럼 노르티움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르티움이 아니더라도 수술한 병원과 가까운 북부 인근에 둥지를 튼 게 대부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수술의 부작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북부와 상당히 먼 남부에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여행을 하느라 연락이 없는 캐롤라인은 늘 클리브의 걱정 대상이었다.

물론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클리브는 늘 그녀를 걱정했겠지만.

“걱정 마세요. 저보다 한참 어린 모아랑 브리오도 받은 수술인데 제가 잘못될까 봐요?”

“예외는 늘 존재하니까요.”

클리브는 수술을 받은 사람 중 유일한 예외를 겪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수술을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자신의 아내, 그것도 전 아내를 위해 가슴을 열었던 한 남자를.

듣자 하니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간헐적인 흉통에 시달리고 있다는데. 캐롤라인은 이를 알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정말 대단한 수술인 것 같아요. 이렇게 멀쩡하다는 게 믿기질 않으니까…….”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 착한 여자가 프레져가 아픈 것을 안다면 신경 쓸 게 분명하니까. 그녀의 마음에 아직 프레져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캐롤라인이 더욱 이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이 정도는 비겁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혼자서 지내시기 외롭지 않으세요? 이젠 임상 실험실도 없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캐롤라인이 자신을 걱정해 오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수술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했잖아요.”

그레타의 의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 임상 실험실은 문을 닫았다. 클리브가 그렇게 사랑하던 아이들 역시 대부분 수술을 받았으니 그가 계속 노르티움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있지만…… 저는 글랜포드가 좋아요.”

“왜요?”

“보고 싶은 사람이 여기에 있거든요.”

말을 마친 클리브는 캐롤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그 사람의 정체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맞춰 왔다.

이제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실은…….”

당신이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려던 클리브는 옆에 브리오가 있다는 것을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캐롤라인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왜 말을 하다 마세요?”

“지금 할 얘긴 아닌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은 언제까지 노르티움에 있을 생각이에요?”

클리브의 질문에 캐롤라인과 브리오는 서로를 바라봤다. 일주일 정도 있을 생각이긴 했지만 언제 떠날지는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면 며칠 더 있다 가요. 다음 주면 저도 일정을 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무려 1년 만에 만나는 캐롤라인이었다. 작년엔 그녀가 여행을 떠나야 한대서 잡지 못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이번엔 꼭 캐롤라인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허락한다면 그녀를 따라 남부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시도는 미수로 끝나고 말았다.

“오래 비워 두면 안 돼요. 곧 장마철이라 일손이 모자랄 거예요.”

단호하게 입을 연 브리오 때문이었다.

“그래?”

“비가 오면 가죽이 잘 상하니까 관리 잘해 줘야 돼요.”

“넌 나보다 구둣방 일을 더 잘 안다? 그 집 딸은 난데 말이지.”

“이제 일손이 하나 더 늘었으니 알차게 써먹어야겠다고도 하셨어요.”

“뭐? 애런이 그랬어?”

이제 막 돌아온 동생을 부려 먹을 생각부터 하다니. 캐롤라인이 눈초리를 매섭게 치켜세웠다.

“지금까지 일 안 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구둣방 이야기에 클리브가 하려던 말은 저 아래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클리브는 포기하지 않았다.

‘브리오가 자리를 비키면 그때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 봐야지.’

클리브는 일이 끝나면 다시 연락하겠단 말을 남긴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바빠 보이시네.”

“그러게요.”

“그런데도 짬을 내서 나와 주시고.”

캐롤라인이 점점 멀어지는 클리브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브리오는 그런 캐롤라인을 가만히 쳐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마차 타러 갈 거죠?”

“응.”

마차 정비소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머지않아 대기 줄 앞에 선 두 사람 앞으로 마차가 멈춰 섰다.

브리오는 자신을 따라 마차에 타려는 캐롤라인의 이마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뭐야?”

“따로 타요.”

“뭐어?”

“혼자 가고 싶은 데가 생겼거든요.”

“그게 무슨…….”

캐롤라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브리오를 응시하다 멈칫했다. 브리오는 노르티움에서 수년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병원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경하고 싶은 게 당연하겠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캐롤라인은 브리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럼 나랑 같이 가.”

“싫어요. 캐롤라인은 잔소리 너무 많이 해요.”

“혼자 돌아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브리오는 캐롤라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어깨를 쫙 편 채 그녀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러자 캐롤라인의 이마 위로 그림자가 졌다.

“걱정은 내가 해야겠네…….”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린 브리오는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로왈 2번가로 가 주세요.”

스테파니의 집은 번화가에서 살짝 비켜난 인근 지대였지만 헌티드하우스는 아니었다. 헌티드하우스는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길에 있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야 했다.

“그럼 나 먼저 갈게요. 안녕.”

브리오가 탄 마차가 떠나자 그다음에 대기 중이던 마차가 캐롤라인 앞에 멈춰 섰다.

“안 타시오?”

그녀가 마차에 오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뒤에 서 있던 승객이 말을 걸었다. 캐롤라인은 그 말에 이상하게 등이 떠밀리는 것을 느꼈다.

“헌티드 오페라하우스 북관으로 가 주세요.”

그래서였다. 허둥지둥 마차에 올라타 아무 데나 말한 것은.

뒤늦게 후회했을 때는 이미 마차가 번화가를 벗어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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