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39)화 (139/156)

#외전 2화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히 갔다 오렴.”

캐롤라인과 브리오는 문 앞을 지키고 선 애런과 이디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는 정기 검진을 위해 노르티움에 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너네만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엄마도 참, 우리가 아직도 환자인 줄 알아요? 브리오도 이제 곧 성년인데.”

캐롤라인은 이디나의 손을 잡아 친히 브리오의 어깨 위에 올려 주었다. 몇 달 새 더욱 다부져진 골격을 확인한 이디나는 멋쩍은 듯 손을 거뒀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어째서인지 씁쓸하게 들리는 말에 캐롤라인과 브리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미리 불러 둔 사설 마차에 올라탔다.

날은 화창했고 마차는 빠르게 달려 기차역이 있는 도시로 향했다. 두 사람이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을 무렵이었다.

“식사 시간이 애매하네. 점심을 먹으면 기차를 놓칠 것 같아.”

하지만 약을 챙겨 먹으려면 밥이 필수였다.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걸 사서 가요.”

“그러는 게 좋겠다. 어디 보자, 빵집이…….”

캐롤라인은 가방 손잡이를 쥔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지않아 근처에 샌드위치와 주스를 파는 작은 빵집이 보였다.

“얼른 고르고 기차 타면 얼추 시간 맞겠다.”

때마침 경적 소리가 울리더니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서 있다간 먼지 다 맞겠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끄덕.

문이 열리고 캐롤라인의 모습이 가게 안으로 사라지는 사이, 매연을 한껏 내뿜은 기차는 맞은편 선로에 멈춰 섰다.

이윽고 기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일반석과는 달리 우등석 출입구는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몇 없는 사람들마저 모두 내린 뒤, 휴고의 안내를 받으며 기차에서 내린 사람은 프레져였다.

“마차는?”

“역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어디 보자, 출구가…….”

휴고는 출구가 표시된 안내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의 뒤에 선 프레져 역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승강장 구석에서 신문을 파는 상인, 한쪽에 몰려 있는 작은 식당과 가게들까지.

매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소한 버터 냄새에 프레져는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빵집은 창문도 작은 탓에 가게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출출하십니까?”

프레져의 시선이 빵집에서 멈춘 것을 본 휴고가 넌지시 물었다. 이에 프레져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그러곤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캐롤라이인!”

“아휴, 무거워!”

제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를 받아낸 캐롤라인이 일부러 짓궂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는 그녀의 장난 따윈 중요하진 않은 듯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우리 모아가 많이 크긴 했다. 엄청 무거워졌어.”

“나 많이 컸어?”

“응. 작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서 몰라볼 뻔했어. 걱정이 인형이 아니었으면 못 알아봤을 거야.”

크로스백에 꼬질꼬질한 헝겊 인형을 매단 아이는 모아였다. 심장 수술을 무사히 마친 지 1년이 되어 가는 아이는 여전히 또래보다 체구가 작았으나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헤헤.”

캐롤라인의 품에 안겨 헤실헤실 웃던 모아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브리오를 보곤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러곤 캐롤라인의 품에 더욱 깊게 몸을 묻었다.

“모아, 왜 그래?”

“저 오빠가 브리오야?”

“응.”

“옛날이랑 너무 달라.”

예상과는 달리 낯을 가리는 모아에 브리오는 머쓱한 듯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어서 와요, 캐롤라인. 브리오도 오랜만이네.”

“오는 길 힘들지 않았어요?”

패트릭과 베카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모아의 수술 이후, 이들은 노르티움에 완전히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피곤할 텐데 우리가 너무 오래 세워 뒀네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얼른 스테파니한테 가요.”

“좋아요.”

베카가 눈짓을 하자 그들 뒤편에 서 있던 짐꾼이 두 사람의 짐을 빠르게 마차에 실었다. 주인 가족과 두 명의 손님을 태운 마차는 이윽고 기차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번잡한 도로를 달리던 마차는 머지않아 한산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캐롤라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브리오도 신기한 건 마찬가지인지 창문에 이마를 바짝 붙인 채였다.

“저쪽 거리는 예전이랑 똑같은데, 이쪽은 완전히 다르네요.”

“새로 극장이 들어섰잖아요. 그 이후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주변 상권이 제대로 살아난 거죠.”

“극장이요?”

“어머, 몰랐어요?”

캐롤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마차가 거리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장미 덩굴에 둘러싸인 흰 석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은 화단 앞엔 ‘헌티드 오페라하우스 북관’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세 달쯤 전에 완공됐어요. 얼마 전엔 여기서 공연도 올렸었고.”

베카가 캐롤라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2년이 지났지만 이들에게는 프레져가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몰랐어요?”

“네, 전혀요. 글랜포드에 돌아온 건 너무 오랜만이라. 직전까진 아지말 대륙에 있었거든요.”

“그럼 모를 만도 하네요. 거기가 보통 먼 곳인가요? 글랜포드의 소식이 닿지 않는 것도 당연하죠.”

이후로도 베카가 무어라 떠들었지만 캐롤라인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점점 작아져 가는 오페라 극장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노르티움엔 이미 유명한 오페라 극장이 있는데. 왜 굳이 이 먼 북부에 극장을 세운 걸까?

게다가 극장이 위치한 장소도 이상했다. 이런 고급 시설은 도심 중앙부에 있는 호화로운 거리에 있어야 맞는데. 왜 중심에서 한참이나 비켜난 곳에 자리한 걸까?

“노르티움 오페라 극장주가 헌티드하우스에겐 대관을 해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거든요.”

그녀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은 패트릭이었다.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캐롤라인에 패트릭은 이어서 입을 열었다.

“헌티드하우스에서 평민 관객들을 대거 받기 시작했거든요.”

관객뿐만이 아니었다. 능력 있는 평민들이 경영진에 올랐고, 새로운 종류의 오페라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문화 예술의 수혜자를 귀족에서 평민들로 넓히려는 의도였다.

헌티드하우스의 오페라가 맞은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비극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비극적인 결말의 과거 극과는 달리 새로운 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해피 엔딩을 맞이했다. 극의 내용 역시 공감하기 힘든 먼 옛날이야기가 아닌 현대인들의 삶을 다룬 내용이 주를 이뤘다.

다소 권위적인 성정의 노르티움 극장주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근본 없는 평민들이 자신의 극장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랑이가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빈 부지에 새로 극장을 세워 버리신 거죠.”

그렇게 탄생한 극장이 헌티드 오페라하우스 북관이었다. 공터나 다름없는 곳에 극장이 들어서자 상권은 자연스레 살아나게 되었고 비어 있던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평민들과 함께 보는 공연이라 껄끄러워하던 귀족들도 점차 이 생활에 적응해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프레져 헌티드가 내린 결정이 아니던가. 왕실보다 세가 높다는 헌티드 백작의 결정에 토를 달 귀족은 적어도 글랜포드엔 없었다. 북관이 자리를 잡은 지금은 오히려 노르티움 오페라 극장의 세가 죽어 가는 모양이었으니.

“그 사람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캐롤라인은 의아했다. 그 고고하고 권위적인 프레져 헌티드가 평민들과 같이 앉아 공연을 볼 생각을 하다니.

“인터뷰에서 말씀하시길, ‘소수가 아닌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으로서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해지길 바란다.

남들이 듣는다면 사회 운동가라도 되냐며 비웃을 만한 소리였으나 캐롤라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모든 변화가 자신이 2년 전에 했던 말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로 노력하고 있구나.’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캐롤라인은 무릎 위에 얹은 손을 저도 모르게 꼬옥 움켜쥐었다.

* * *

“캐롤라인, 이게 얼마 만이에요!”

후다닥 가게에서 나온 로렌이 캐롤라인을 껴안았다. 캐롤라인 역시 팔을 뻗어 로렌의 등을 토닥였다.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큼, 흠.”

아크만 역시 연신 헛기침을 하며 옆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에 캐롤라인은 못 이기겠다는 듯 아크만과도 포옹을 나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존재는 너무도 강력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묻혀 버리고 말았다.

“캐롤라이인!”

계단을 구르듯 내려온 스테파니가 덥석 그녀를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세게 안았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이 놀란 것은 스테파니의 요란함 때문이 아니었다.

“왜 둘이 같은 곳에서 나와?”

캐롤라인의 예리한 물음에 에릭은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테파니와 에릭은 같은 층에 살고 있긴 하지만 전혀 다른 방을 쓰고 있었다. 복도를 기준으로 에릭은 한 칸짜리 방을, 스테파니는 마샤와 캐롤라인과 함께 쓰던 커다란 방을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테파니가 나온 것은 넓은 자신의 집이 아닌, 상대적으로 비좁은 에릭의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릭의 대학교엔 기숙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여기서 학교까지 좀 멀지 않아? 저번엔 기숙사 쓰기로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게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무어라 변명하려는 에릭의 말을 답삭 끊은 건 스테파니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힐롱 부부는 역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벙쪄 있는 캐롤라인 앞에서 에릭과 팔짱을 껴 보았다. 그러자 캐롤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테파니는 그녀의 변화가 재밌기라도 한 듯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결혼할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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