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브리오, 밖에 널어 둔 가죽 좀 가져와 줄래?”
“네.”
애런의 부탁에 소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캐롤라인을 따라 로우밸리에 온 지도 어언 2년째, 브리오는 어느덧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 말랐네.”
브리오는 염색된 가죽을 걷으며 미소 지었다. 요 며칠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친 들판엔 이름 모를 풀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아, 맞다.”
바구니에 가죽을 담아 들어가려던 브리오의 시야에 우편물이 잔뜩 든 우편함이 잡혔다. 한동안 비가 오는 탓에 배달되지 못했던 편지들이 한꺼번에 배달된 모양이었다.
“또 왔네.”
심드렁한 얼굴로 우편물을 넘기던 브리오의 손이 어느 한 곳에서 멈칫했다. 발신자의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은 편지였으나 이 집에 이 편지의 발신자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딱 봐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질의 빳빳한 봉투, 그리고 봉투 겉면에 어색하게 붙어 있는 작은 풀꽃. 이렇게 이상한 짓을 정성껏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정작 캐롤라인은 읽지도 못하는 편지를 프레져는 매달마다 꾸준히 보내오고 있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브리오는 이디나가 종종 흥얼거리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확인한 편지들을 가죽 더미 위에 대충 얹었다.
“브리오, 아직 멀었어?”
“아뇨. 다 됐어요.”
편지는 캐롤라인의 방에 갖다 놔야겠다. 브리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돌렸다.
“브리오!”
그 순간이었다. 저 언덕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언덕 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잔디와 나무가 전부였다.
후비적.
잘못 들었나. 브리오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빌 때였다.
“브리오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생각에 브리오는 걸음을 떼야 하는 것도 잊고 저 먼 곳을 응시했다.
반짝반짝, 햇빛을 받아 탐스럽게 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게 보였다.
“브리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왜 이렇게 늦…….”
한참이나 늦는 브리오가 걱정돼 나선 애런 역시 언덕 위를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헛것이라도 본 것마냥 눈을 비빈 뒤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
제 몸집만 한 배낭을 멘 캐롤라인이 집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 * *
“네 맘대로 여행하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네 맘대로인 거 아니야?”
“편지했어. 아직 안 도착해서 그런 거지.”
“이번뿐만이 아니라. 저번에도 그랬잖아.”
애런이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여행 기간 동안 연락이 잘되지 않았던 그녀에게 섭섭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근처 나라라면 했을 거야.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선 어쩔 수 없었어. 애초에 편지가 글랜포드까지 가지도 않는다구.”
“그래도 그렇지- 읍,”
“그래서 이번 여행은 즐거웠니? 저번에 아지말 대륙에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쌜쭉한 표정으로 불만 사항을 토해 내는 애런의 입을 이디나의 손이 틀어막았다. 이에 캐롤라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그렇게 신기한 곳은 태어나 처음이었어요. 5천 년 전에 지었다는 건물을 보는데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세계 여행을 시작한 지 꼬박 2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우밸리에 방문한 게 5개월 전. 캐롤라인은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보고 들은 일들을 신이 나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곳 사람들은 머리가 전부 검은색으로 나더라고요. 눈동자도 까맣고.”
“여기보다 더워서 그런가? 신기하다.”
불만스레 입을 삐죽이던 애런 역시 캐롤라인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브리오 역시 처음 듣는 이국의 이야기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일 정도였다.
“원래 햇빛이 강한 나라일수록 사람들 피부가 어둡대.”
“그래서 이렇게 탔구나.”
애런이 캐롤라인의 콧잔등에 자그맣게 올라온 주근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캐롤라인 쪽을 주시하고 있던 이디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탔어? 그러면 몸에 안 좋은 거 아니니? 과도한 자외선은 각종 피부 질환을 가져온다고-.”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건강 얘기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디나를 애런이 익숙하게 진정시켰다.
2년이 지난 지금, 이디나의 눈은 빛을 구별하는 것을 빼곤 제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탓에 그녀는 사소한 이야기에도 초조해하는 습관이 생겼다.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얘가 워낙 허여멀건 했어야죠. 지금은 딱 좋아요. 오히려 건강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
“네.”
애런의 말에 동감하는 듯 브리오 역시 긍정했다. 이에 두 남자를 보는 캐롤라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브리오 너, 이젠 완전히 애런 편으로 돌아섰구나?”
“편이라뇨. 난 그런 거 안 나눠요. 그저 사실만을 말하는 거예요.”
“으윽, 덩치만 커진 줄 알았는데. 애런을 닮아서 더 얄미워지기까지 했어.”
과장된 대꾸에 결국 네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건강해진 몸, 다정한 어머니와 귀찮은 오빠, 그리고 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자란 브리오까지.
“여행도 여행이지만, 역시 집이 최고네.”
이 모든 것이 주는 행복은 여행이 주는 행복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아예 끝내기로 한 거야?”
“응. 자그마치 2년이었잖아. 집이 그립더라고.”
“그래. 슬슬 돌아올 때가 되기도 했지. 곧 노르티움에 가야 하기도 하고. 너랑 브리오 둘 다.”
“잘 맞춰서 돌아왔네. 브리오 혼자 보내기 좀 그랬는데. 둘이 같이 다녀오면 되겠어.”
반년에 한 번이던 정기 검진은 인공 판막이 완전히 자리 잡은 이후 1년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작년 이맘때에 검사를 받았으니 타이밍 좋게 돌아온 것이었다.
“자자, 이야기는 이만하고 이제 쉬자. 캐롤라인도 피곤할 텐데.”
“응.”
“푹 쉬고 저녁에 맛있는 거 해 먹자.”
캐롤라인은 빠르게 샤워를 마친 뒤 건물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애런과 이디나가 매일같이 관리하는 덕에 그녀의 방은 몇 달 전과 다름없이 깔끔하기만 했다.
“짐은…… 아, 몰라. 나중에 풀래.”
캐롤라인은 배낭을 발로 슥 밀어 버리곤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침구가 몸에 닿음과 동시에 이불에 쌓여 있던 먼지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역시 집이 최고야.”
이불에서 이렇게 좋은 냄새도 나잖아.
한참을 뒹굴거리던 캐롤라인은 가만히 누워 제 방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낙서가 새겨진 오래된 벽지, 그 위에 나 있는 커다란 창, 창 아래 있는 자그마한 책상. 그리고 책상 위에는…….
“편지.”
캐롤라인은 양이 제법 되는 편지 뭉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린 편지를 확인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편지 꾸러미를 침대로 가져왔다. 그러곤 벌러덩 엎드린 채 편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저 먼 노르티움에서 온 편지, 이디나 캐롤 보육원에서 보내온 편지, 모아와 마샤가 보내온 편지를 차례대로 읽었다. 이제 읽지 않은 편지는 단 3개뿐이었다.
3개의 편지 봉투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풀꽃이 붙어 있었다. 그 풀꽃은 발신자의 서명이나 다름없었다.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여태껏 캐롤라인은 프레져에게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한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그의 편지를 잘 받았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져는 굴하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계절마다 다르게 피는 꽃을 봉투에 붙여서.
그 성의가 대단해 보이긴 했는지, 처음엔 편지를 불태워 버리겠다 길길이 날뛰던 애런도 이젠 그녀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편지를 보관할 정도였다.
“흠.”
캐롤라인은 아직 뜯지도 않은 오래된 편지와 푹신푹신한 이불, 그리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맑은 햇빛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러곤 결심한 듯, 침대 밑으로 손을 넣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5개월 전 프레져가 보내온 편지였다. 캐롤라인은 이미 확인했던 편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벌써 겨울이네. 이번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워서 그런지 눈이 꽤 많이 쌓였어. 보고 있으니 당신이 옛날에 눈 쌓인 정원에서 놀던 게 생각나더군. 무슨 기분일지 궁금해서 나도 남몰래 발자국 하나를 찍고 왔어. 뽀드득거리더군.」
“발자국이라…….”
캐롤라인은 모두가 잠든 새벽 밖으로 나가 눈밭 위에 몰래 발자국을 찍는 프레져를 상상했다. 뽀드득 소리를 들으며 신기해할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재밌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진작에 말 좀 들어 주지는.
캐롤라인은 아직 뜯지 않은 새 편지에 무심코 손을 대려다 멈칫했다.
열어 볼까 말까.
이미 열어 본 편지와 아직 뜯지 않은 편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캐롤라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새로 온 편지들을 전부 상자에 넣어 침대 밑으로 집어넣었다.
* * *
“대표님, 기차표 예매해 놨습니다.”
“그래.”
로겐의 말에 프레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로겐은 그런 프레져를 걱정스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꼭 남부까지 가셔야 하는 겁니까?”
새로운 공연 사업 시작으로 헌티드하우스의 사업이 성황리에 오른 지도 1년째, 휴식은커녕 쪽잠조차 잘 여유가 없지만 프레져는 이번 남부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로겐도 그가 왜 기를 쓰고 남부에 가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혹시 모르잖아.”
우연히 마주칠지.
캐롤라인이 보고 싶다. 하지만 찾아가는 건 부담스러워하겠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자신의 집착에 그녀의 마음이 달아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연장에서 로우밸리까지는 거리가 꽤 됩니다만.”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거야, 만약.”
“그러기엔…… 마님께서는 아직 여행 중이실 텐데요. 언제 돌아오실지도 모르고요.”
이혼한 지 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캐롤라인은 이들의 마님이었다.
여행길에 한 번 들러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혹 캐롤라인과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프레져는 지방 공연이나 해외 출장이 있을 때면 자처해서 나서기도 했다.
“공연장에 온 적도 없으시고…….”
새로운 공연이 있을 때마다 프레져는 늘 편지에 공연 티켓을 동봉해 보내곤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그림자조차 닮은 사람 한 명 본 적이 없었다. 이에 좌절하기도 수십 번이었다.
“그래도 기다려야지.”
“…….”
“얌전히 기다리는 건 너무 소극적이니까 적극적인 자세로 기다려야지.”
적극적인 기다림이 대체 무엇인지 로겐은 알지 못했지만 대꾸 대신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캐롤라인이 여행을 떠난 지도 2년째, 파도를 맞은 돌이 매끄러워지듯, 프레져 헌티드의 모난 면 역시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캐롤라인에 한정해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