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날은 화창했고 장애물을 만나지 않은 마차는 아주 빠르게 굴러갔다. 캐롤라인은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로우밸리의 여름을 상상했다.
“거긴 여기보다 더 덥겠죠?”
“그럼. 완전 한여름일 거야.”
“집에 먼지 엄청 많이 쌓였겠어요. 엄마랑 애런이 온 게 겨울이었으니까.”
“그렇지. 가자마자 청소부터 해야겠어.”
세 사람은 로우밸리에 가서 가장 먼저 무얼 할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좁은 마차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로우밸리에서 몇 달 머무르다가 날이 선선해지면 여행을 떠날 생각이에요.”
“여행?”
캐롤라인이 계획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처음이었다. 애런과 이디나는 놀란 마음을 뒤로 하고 캐롤라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거였어요. 나는 이 자리에 그대로 고여 썩을 텐데, 이 세상은 나를 빼고 아름답게 흘러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더 늦기 전에 아름다운 세상을 구경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플라이크로 떠난 거였고요.”
플라이크를 시작으로 캐롤라인은 글랜포드에서 나름 유명한 관광지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여행을 하는 내내 양가감정에 휩싸여야 했다.
이 즐거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나는 다시 죽음을 준비해야겠지.
이런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정작 아름다운 경관을 놓치는 일이 많았다. 몸이 아픈 날이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때도 잦았고.
“그때는 시간에 쫓기듯 여행하느라 뭐가 아름다운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둘러보고 싶어요. 이 세상엔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운 게 많은지를요.”
말을 전부 마친 캐롤라인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로우밸리로 돌아가고 싶다 노래를 불러 놓고 여행을 떠난다니 얼마나 철이 없어 보일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브리오에게 미리 경고를 해 둔 것이었다.
“그러렴.”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대답은 흔쾌히 떨어졌다.
“정말요?”
“그래.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상관없으니 보고 싶은 건 전부 보고 와. 이제 널 막을 건 아무것도 없잖니.”
“혼자 떠난다니 걱정이 되긴 하지만…… 병원에 꼬박꼬박 들르고 자주 편지한다면 못 갈 것도 없지.”
애런 역시 이디나의 말에 동조했다. 이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끄덕였다.
“그럼요. 꼭 자주 연락할게요. 종종 들르기도 할 거고요.”
“그래.”
두근두근. 가슴이 기분 좋게 뛰는 게 느껴졌다. 건강하다는 것을 다르게 증명받는 기분이었다.
마차는 저녁이면 근처 마을에 멈춰 섰고 세 사람은 여관에서 밤을 보낸 뒤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몇 번의 밤을 보내고 나니 마차는 어느덧 수도가 있는 중부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
캐롤라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높은 성벽을 응시했다. 글랜포드 왕성은 수도에서도 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날씨가 좋은 날이면 수도 어디서든 왕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팠던 사이, 왕성의 주인이 또 한 번 바뀌었고,
교체된 왕권의 중심에는 그녀의 전남편이 있었다. 죽어 가는 아내를 위해 멀쩡한 가슴을 헤집은 미련한 남자가.
캐롤라인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한 달쯤 전 프레져가 보내온 편지였다.
「사랑받는 아이야, 너는 어디든 갈 수 있단다. 갈색 가죽신을 신고 네가 원하는 길로 나아가 보렴.」
“구두장이의 노래…….”
프레져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오페라처럼 귀한 음악만 듣고 자란 사람이 이런 촌스러운 노래를 알 리가 없는데.
‘기억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를.
그렇게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보낸 것도 모자라 편지에 꽃까지 붙여 보낸 것이 영 프레져답지 않아서였다.
캐롤라인은 종이에 붙어 있는 풀꽃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른 꽃잎이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름 잘 관리한다고 했는데도 꽃이 마르는 건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남자가 조금만 더 일찍 변했더라면, 그의 다정한 면모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이런 씁쓸한 마음 따윈 들지 않았을 텐데.
편지에 쓰인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는 사이 성벽은 어느덧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끝내는 게 과연 맞을까?’
캐롤라인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런은 팔짱을 낀 채 잠들어 있었고 이디나는 손끝으로 점자책을 더듬고 있었다. 눈먼 삶에 익숙해지기 위해 미리 점자를 익히려는 모양이었다.
“……엄마.”
“응?”
“…….”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어.”
“있잖아요.”
캐롤라인은 운을 떼 놓고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마음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한참을 우물거리는 캐롤라인을 대신해 입을 연 건 이디나였다.
“다녀오렴.”
“…….”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와. 긴장되면 물 좀 마시고.”
“제가 어딜 가려는 줄 알고요?”
“글쎄. 그건 모르겠다만.”
이디나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딸아이의 손을 잡았다. 캐롤라인의 손에는 빳빳한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이 종이 한 장을 버리지 못해 쥐고 있는 게 참 캐롤라인다워서, 이디나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려 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있겠니.”
“엄마.”
“엄마는 어디 안 가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다녀와.”
이디나의 말을 듣는 캐롤라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야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다녀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꼭 기다려야 해요?”
“응. 조심히 다녀오렴.”
머지않아 마차는 한산한 길목에 멈춰 섰다. 이디나를 한 번 꽉 끌어안은 캐롤라인은 힘차게 문을 열고 마차 밖으로 나섰다.
* * *
“……그리하여 올해는 재능 있는 신인 가수들을 발굴하는데 전력을 쏟을 계획입니다.”
프레져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갖은 풍파를 겪으며 임원들 대부분은 물갈이가 된 참이었다. 휴고는 평민 최초로 헌티드하우스의 고위직을 맡게 되었으며 평민 출신 직원들도 여럿 임원 자리에 채용되었다.
고여 있던 물이 흐르기 시작하니 창의적인 계획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속 가수 계약에 혈안을 쏟기보단 실력 있는 신인 가수를 발굴하자는 프로젝트 역시 젊은 임원들의 입을 통해 나온 의견이었다.
“그럼 새 프로젝트 보고는 이쯤 하도록 하고…….”
회의가 끝나 갈 즈음, 문이 열리더니 로겐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그는 프레져에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쿠당탕!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프레져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은 자연히 프레져에게로 쏠렸다.
“그, 그게 정말이야?”
“네. 회의는 제가 진행할 테니 얼른 가 보십쇼.”
“고맙다, 정말 고마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프레져는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로겐은 허겁지겁 뛰쳐나가는 프레져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머지않아 문이 닫히고 고요한 복도엔 프레져의 발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렸다.
그녀가 이곳에 와 있다. 그 사실에 발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프레져는 빠르게 달려 순식간에 건물 1층까지 내려왔다.
“헉, 헉.”
수술의 후유증 때문인지 체력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프레져는 계단 난간을 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자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캐롤라인.”
꿈에서도 본 적 없는 탓에 더욱 그립던 모습이었다. 얼굴은커녕 목소리 한번 나오지 않는 탓에 애석한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애석한 감정이 싹 사라져 버렸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처럼 가슴이 벅차오를 뿐이었다.
“프레져?”
그의 읊조림을 들었는지 캐롤라인이 몸을 틀었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캐롤라인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프레져는 가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캐롤라인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잘 지냈어요?”
“응. 당신은 잘 지냈어?”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캐롤라인의 질문 한 번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프레져가 할 수 있는 건 어색하게 안부를 묻는 일뿐이었다.
“덕분에요. 참, 편지 잘 받았어요.”
캐롤라인이 그가 보낸 편지를 흔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환해서 프레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답장을 보낼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근데 역시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잘했어. 우리 들어가서 얘기하자. 여긴 더우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곧 갈 거니까요.”
“그래……?”
곧 떠난다. 그 말에 말아 쥐었던 주먹에 힘이 풀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캐롤라인이 제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란 사실은 누구보다 프레져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기대했어요?”
“……그랬나 봐.”
스스로도 모르게 품은 기대였다. 프레져에게 캐롤라인이란 기적과 희망 그 자체였으니까.
“괜히 미안하네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캐롤라인은 헌티드하우스의 웅장한 외관을, 그리고 프레져의 단정한 이목구비를 차례로 응시한 뒤 입을 열었다.
“나 여행을 떠날 거예요. 한 2년 정도.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요.”
“응.”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이참에 해 보고 싶은 걸 다 해 보고 내 마음대로 살다 오려고요.”
“좋은 생각이야.”
“그래서 그 전에 당신한테 인사를 하러 온 거예요.”
“…….”
“꼭 무언가에 답을 내리려 할 필요는 없대요. 언젠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하지만 그러면 당신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요.”
그 인사가 작별임을 알기에 프레져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캐롤라인의 손을 쥐었다.
“다시 나한테 와 주면 안 돼? 2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괜찮으니까.”
“…….”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인 것도 알고 이런 말 할 면목도 없는 거 알아. 하지만…….”
프레져는 울먹였다. 다시 캐롤라인에게 매달리는 자신이 역겨웠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프레져.”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손등을 쓰다듬다 얽힌 서로의 손을 제 이마에 갖다 댔다.
“가슴을 가르는 거, 당신한테도 어려운 선택이었을 텐데 화만 내서 미안해요. 당신이 걱정돼서 그랬어요.”
“알고 있어.”
“당신은 나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나는 앞으로 늘 당신한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살 거예요. 옛날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캐롤라인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남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미워하지 않는다는 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되지 않잖아요.”
“…….”
“미안하지만 당신 곁엔 남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기엔 내가 너무 힘들었고 또 자신이 없거든요.”
당신 곁에서 행복할 자신이요.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끝을 봤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큰 상처를 품고 살아갈 만큼 캐롤라인은 대인배가 되지 못했다.
“미안해요.”
프레져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눈물을 닦아 주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한곳에 멈춰 있어서는 안 됐다. 그렇게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손을 놓으려 했다.
“내가 자신을 주면.”
“…….”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면 그때는 돌아봐 줄 거야?”
캐롤라인은 자신이 놓으려 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은 아직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프레져가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간당간당하게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은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잘 모르겠네요.”
간을 보는 건 아니었다.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기에 뱉은 말이었다. 이에 프레져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알겠어. 여행 잘 다녀와.”
“…….”
“당신이 없는 동안 열심히 살게. 이 인간이랑 살면 평생 행복하겠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당신의 가족이 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여행하다가 한 번쯤은 내 생각 좀 해 줘. 많이는 말고 어쩌다 한 번.”
부탁할게.
애절한 호소에 캐롤라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리고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요, 프레져.”
“당신도.”
프레져는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캐롤라인의 모습이 멀어져 작은 점이 될 때까지 계속.
“생각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더욱 열심히 살아야지. 그래야 그녀가 먼 곳에서도 자신을 떠올려 줄 테니까.
봄이 되면 꽃을 찾아 돌아올 그녀를 위해 프레져는 예쁜 꽃을 잔뜩 피워 둘 생각이었다.
“기다릴게.”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