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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35)화 (135/156)

#135

에릭은 민망한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서른이 다 된 나이로 의대 입학을 준비한다는 게 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오오!”

그러나 정작 스테파니와 마샤의 반응은 폭발적이기만 했다.

“잘됐네요, 에릭! 의사가 되지 못한 걸 아쉬워했었잖아요.”

“맞아요. 에릭은 머리가 엄청 좋으니까 분명 시험도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아, 지도 보는 연습은 더 해야겠지만요.”

이미 의사라도 된 것처럼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에릭은 멋쩍은들 볼을 긁적였다.

“이 나이 먹고 무슨 공부냐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나도 이제 곧 간호 공부를 할 예정인데.”

“마샤는 저보다 훨씬 어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못 할 건 없죠.”

살아 있다면 늦은 일이란 없다. 이는 아픈 캐롤라인을 보필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맞습니다. 후회했을 땐…… 이미 늦으니까요.”

노르티움에 오기 전까지 에릭은 후회만 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더 늦기 전에 선택을 내리는 게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실행하지 않았다. 반쯤 포기한 인생이기 때문이었다.

“발버둥 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발악하는 게 참 초라해 보인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러나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캐롤라인의 모습은 하나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아 수도를 떠나온 것도 정말 대단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작은데도.

에릭은 캐롤라인의 힘찬 날갯짓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마님, 아니, 캐롤라인은 제가 당신을 도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도움을 얻은 건 오히려 저지요.”

게다가 캐롤라인은 세 사람의 진로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재산을 삼등분해 나눠 주겠다는 걸 어르고 말려 겨우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다 하셨으니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죠.”

“에릭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오랫동안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잖아요. 진중한 마음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죠.”

이어지는 격언에 에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걱정을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마샤와 스테파니인데 제 꿈이 비웃음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보육원을 맡을 수 있겠어요? 수도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노르티움 남쪽에 종합 대학이 있습니다. 그곳의 의과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으니 수도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보육원도 선생님들이 계시니 괜찮고요.”

“그럼 계속 이곳에 있겠네요?”

“네.”

“잘됐네요. 그렇지?”

자신을 콕 가리키며 묻는 마샤에 스테파니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마샤를 응시했다.

“너 혼자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에릭이 있으니 걱정은 덜었어.”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에릭을 챙겨 주게 생겼는데.”

“챙기긴 무슨. 내가 아랫집 힐롱 씨네한테 얼마나 사정사정했는지 알아? 우리 애 좀 잘 부탁드린다고…….”

마샤와 스테파니는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에릭은 이를 말리려다 말고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이 로우밸리로 떠나고 나면 이 사소한 투닥거림도 볼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이 소란한 순간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정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가랑비에 스며들듯 서로에게 물들었던 지난 1년이었다. 인생무상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온 자신이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된 것도, 돈보다도 중요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다 이들 덕이었다.

캐롤라인이 죽어 유산을 받기만 기다리던 게 무색할 만큼 에릭은 그 누구보다 절실히 캐롤라인의 생존을 바라게 되었고. 한 사람과 얽힘으로써 인생이 통째로 바뀐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자신의 삶을 바꿔 놓은 이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게요. 궁금하네요.”

“로우밸리로 돌아가겠다는 것 빼곤 달리 말씀하신 게 없으니까요.”

마샤와 스테파니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지 투닥거리던 것을 멈추곤 에릭을 응시했다.

캐롤라인은 모두의 꿈을 지지하겠다고 말했으나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밝힌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생각나지 않는다는 애매한 대답이 전부였다.

“고민이 되시겠죠. 단순한 마음이 아니니까요.”

다들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엔 프레져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단지 미련이나 고마움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감정임을 알았기에.

“전 백작님 미운데.”

스테파니가 입을 샐쭉 내밀며 대답했다. 그건 마샤와 에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캐롤라인의 뜻이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진 알 수 없지만 무엇이 됐든 세 사람은 변함없이 그녀를 존중할 생각이었다.

* * *

“브리오, 나 왔어.”

캐롤라인의 목소리에 브리오가 감았던 눈을 떴다.

“자는 척 좀 그만해. 자는 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꾸 말 시키잖아요. 귀찮아요.”

여전히 심드렁한 대답에 캐롤라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대꾸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몸이 잘 회복되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별로 안 귀찮은가 보네?”

“캐롤라인은 곧 있으면 떠나니까.”

브리오의 얼굴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소년의 어깨는 유난히 작아 보였다.

자신을 제외하면 딱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병이 완치되면 병원을 떠나야 할 테니 마음이 복잡하겠지.

캐롤라인은 말장난을 치려던 것을 그만두고 브리오의 앞에 가 앉았다. 그러곤 바로 준비해 온 본론을 꺼냈다.

“자, 세 가지 방법을 찾아 왔어.”

관심이 가는 말인지 브리오의 눈이 곧장 캐롤라인의 얼굴로 향했다. 캐롤라인은 손가락 하나를 쫙 펼치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보육원에서 지내는 방법이야. 작은 방 하나를 네 전용 방으로 개조해서 일반 숙소처럼 쓰는 거지. 보육 교사들이랑 에릭이 있을 테니 안전은 걱정할 것 없고.”

“싫어요.”

단호한 대답에 캐롤라인은 왜냐고 묻는 것 없이 두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두 번째는 내가 구해 준 집에서 혼자 지내는 거야. 너는 아직 어려서 혼자 집을 얻는 데 무리가 있을 테니까. 보육원처럼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으니 시끄럽진 않겠지. 에릭이나 스테파니, 클리브 선생님이 종종 방문하실 거고.”

이번엔 제법 구미가 당기는 듯 브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전 제안과는 달리 캐롤라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이게 마음에 들어? 계속 너 혼자 지내야 하는데?”

“익숙한데요, 뭐. 간단히 빨래나 밥해 줄 사람을 쓸 돈은 있어요.”

“익숙한 거 자랑 아닌데.”

브리오를 응시하는 캐롤라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직 어린 브리오를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고 하지만 외로운 게 얼마나 서러운 건지는 캐롤라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년을 외로움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세 번째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지막. 그 단어에 브리오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 움직였다. 소년의 동그란 눈이 캐롤라인의 입술에 집중했다.

“나랑 같이 로우밸리로 가는 거야.”

“……?”

그게 무슨 소리? 브리오가 눈으로 물었다.

“역시 널 혼자 두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네가 싫다는데 보육원을 강요할 수도 없고.”

“…….”

“그래도 내가 옆에 있으면 산책도 하고 밥 세끼도 꼬박꼬박 챙겨 먹겠지. 같은 환자끼리 재활 운동 하기에도 좋고. 솔턴 자작가에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게.”

“뭐라고 말씀드리려고요.”

“음, 나도 나름 귀족이고 한 번 결혼도 했었으니까. 대모가 되려 한다 말하면 되려나?”

“하지만…… 캐롤라인의 집엔 가족들이 있잖아요.”

“이미 허락받았어.”

브리오의 수술 날짜가 정해진 이후부터 캐롤라인은 계속 소년의 거취에 대해 고민했다. 자신이 노르티움을 떠나기 전에 아이가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브리오를 로우밸리로 데려가겠단 생각은 그 와중에 나왔다. 이디나는 원체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고 애런도 나름 듬직하니까.

소년의 딱한 사정을 안 두 사람은 브리오의 로우밸리행을 흔쾌히 허락했다. 캐롤라인이 아끼는 아이임과 더불어 그녀와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요양하기 딱 좋을 거야. 봄이면 딸기를 따 먹고 비 오는 날엔 개구리를 잡으러 가고. 도시랑은 다르지만 나름 재밌는 것도 많아.”

“…….”

“아, 덩치 크고 철없는 아저씨 하나 있다. 같이 살면 좀 피곤하긴 하겠네.”

“그건 애런 말하는 거예요?”

“응.”

오빠를 골칫덩어리 취급 하는 캐롤라인을 보며 브리오는 포스스 미소를 지었다. 남매는 늘 티격태격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을 브리오는 알고 있었다.

싸움 한번 일으킨 적 없는 자신과 형보다 하루에 세 번씩은 싸우는 캐롤라인과 애런의 사이가 더 좋아 보인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너처럼 어린 애를 귀찮게 할 만큼 모자라진 않아. 겉보기엔 저래도 나름 요리도 잘하고-.”

“갈래요.”

“어?”

흔쾌히 나온 대답에 되려 어안이 벙벙해진 건 캐롤라인이었다. 브리오는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네 집, 로우밸리로 갈게요.”

“벌써 마음을 정한 거야?”

끄덕.

입을 앙다문 채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브리오에 캐롤라인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한번 정하면 못 물러. 너 어른 되기 전까지 계속 로우밸리에서 살아야 해.”

“괜찮아요. 부모님이 병원비 하라고 준 돈이 있으니까 방세로는 충분할 거예요.”

“네 코 묻은 돈 받을 생각 없는데.”

캐롤라인은 소년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근데 브리오, 나 때문에 로우밸리에 가는 거면 좀 더 고민해 봐야 돼.”

“왜요?”

“내가 로우밸리에 없을 수도 있거든.”

“수도로 돌아가려고요?”

“그건 아니고.”

캐롤라인은 말을 아꼈다. 브리오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

브리오는 낯도 많이 가리고 말수도 적은데. 과연 그가 자신 없이 낯선 사람,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캐롤라인은 걱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걱정을 안다는 듯 브리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캐롤라인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걸, 캐롤라인을 보면서 확신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브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캐롤라인과 꼭 닮은 두 쌍의 맑은 눈동자를 떠올릴 뿐이었다.

“캐롤라인이 없어도 로우밸리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

그녀의 다정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기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것이었으니.

“그러니까 나는 로우밸리로 갈래요.”

“네가 그렇다면야.”

캐롤라인은 어느덧 제법 긴 브리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수리에 닿는 따뜻한 손길에 브리오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이전보다 더욱 힘차게 뛰는 심장. 그리고 그 심장으로 내린 첫 번째 선택. 브리오에겐 그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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