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32)화 (132/156)

#132

“폐하!”

음악 소리를 뚫고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휘청거리며 몸을 움직이는 국왕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시종들이 있었다. 만류하는 이들의 따귀를 매섭게 내려치는 탓에 함부로 말리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국왕은 비틀비틀 걸어 1층 메인 홀까지 내려왔다. 그러곤 테이블 위의 술잔을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입에 다 들어가지 못한 술이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폐하, 술은 아까 드신 축하주로도 충분합니다. 몸에 좋지 않으니-.”

쨍그랑!

한 귀족의 걱정이 끝나기도 전에 파열음이 들렸다. 국왕이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내던진 것이었다. 이에 이상함을 감지한 귀족들은 슬금슬금 국왕에게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닥쳐라!”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기세로 눈을 부라린 국왕은 방향을 바꿔 악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바이올린 연주자가 들고 있는 활을 빼앗았다.

“겨우 이따위 음악밖에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냐!”

“폐, 폐하!”

“더 빠른 걸 연주하란 말이다! 더 빠르고 시끄러운 걸!”

마치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을 겨누는 국왕에 악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국왕의 명을 거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연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빠른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더 빨리, 더 빨리!”

연주자들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국왕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그는 하나 남은 팔을 정신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꼭 미친 사람 같아요.”

경악한 귀족들이 쑥덕였으나 국왕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춤이라기보단 그저 음악에 맞춰 사지를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 상황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데본이 황급히 국왕에게 다가갔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데본의 물음에도 국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죽기 직전의 생선처럼 사지를 펄떡이기 바빴다.

“춤을 추고 싶으신 거면 파트너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곡도 바꾸라 명할 테니 부디 진정하시고-”

“시끄럽다! 네가 감히 나를 막는 것이냐? 이 나라의 주인인 나를?”

“격식이 필요한 자립니다. 제발 주위를 헤아려 주십시오, 제발.”

“주위, 주위…….”

국왕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주위를 훑는 그의 눈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심장이 빠르게 뛴단 말이다. 아주 빠르게…….”

가슴께를 움켜쥐며 중얼거린 국왕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달랐다.

“폐하, 그만하십시오, 제발!”

국왕의 손과 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손을 넘어 팔 전체로, 어깨로, 다리까지 퍼져 나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데본이 궁의를 부르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폐하!”

국왕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하고 말았다.

* * *

왕세자 임명 연회에서 국왕이 이상 증세를 보였다는 이야기가 왕국 전역에 퍼졌다. 눈을 까뒤집으며 춤을 추던 모습이 마치 미치광이 같았다고.

국왕이 쓰러졌으니 그가 먹고 마신 모든 음식을 조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이 마신 축하주에 약 성분이 미약하게 들어 있다는 결과가 밝혀졌다.

그 약이 어째서 술에 들어 있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검출된 약은 일종의 영양제 중 하나로 인체에 유익하면 유익했지 결코 해가 되진 않는 약이었다.

이 약이 이상 반응을 보이는 건 딱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환각제와 결합했을 때.

환각제를 오래 복용한 사람이 이 약물을 섭취하면 감정의 격양에서 비롯한 이상 행동, 혹은 심장의 과도한 움직임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왕실에서는 이 사실을 쉬쉬하려 했지만 덮기엔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인체에 무해한 약이 환각제에만 반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내 사람들은 국왕이 금지된 환각제, 즉 마약을 복용한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왕실이 떳떳하다면 결과를 증명해 보이면 된다는 주장도 함께였다.

프레져는 기다렸다는 듯 국왕의 피를 요청했고, 결국 로널드 험프리의 피에선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다. 왕실 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머지않아 왕실 재판이 열렸고 재미있는 구경을 하기 위해 왕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를 취재하기 위해 온 외신들도 여럿이었다.

“나라 망신이군요.”

“그러게요. 당분간 외국엔 못 나가겠네요, 부끄러워서.”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는 것과 박탈당하는 것은 갖는 의미가 전혀 달랐기에 로널드 험프리는 어떻게든 재판을 미루고자 했다. 그러나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널드 험프리는 퇴위를 겨우 2주 남겨 놓고 왕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왕실 명부에서도 제명당했으니 앞으로는 왕성에 머무를 수조차 없을 터였다. 그나마 대우가 좋은 귀족 전용 감옥에 감금하는 것이 한때 왕이었던 자에 대한 최대의 예의였다.

“프레져 헌티드, 당신이 그랬지? 이런 일을 꾸밀 사람은 당신 한 사람밖에 없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내내 로널드 험프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프레져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죄인이 말이 많군. 귀 따갑게.”

“죄인의 입에 재갈을 물려라.”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재판관은 바로 지시를 내렸다. 머뭇거리는 건 잠시였을 뿐, 곧 집행관들도 명령을 따라 로널드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글랜포드의 권력의 판도가 완벽히 뒤바뀌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높은 직책을 맡은 이들 중, 이 일을 계획한 사람이 프레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을뿐더러, 결과적으로는 다친 사람 하나 없이 국왕의 죄를 밝혀냈으니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로널드 험프리의 폐위는 곧 프레져 헌티드의 부상과도 같았으니 이젠 다들 프레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프레져는 빠른 일 처리를 보여 준 재판관에게 꾸벅 목례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그는 꽤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국왕이 감형을 위해 콘월 후작까지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져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었다. 게다가 제럴드 험프리의 재판 날짜도 확정되었으니 만족감이 상당했다.

“그럼 즉위식은 언제…….”

“최대한 빠르게…….”

재판장 밖으로 나가자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본이 보였다. 로널드 험프리의 폐위로 인해 즉위식이 앞당겨질 모양이었다.

“왕세자 전하.”

프레져가 아는 체를 하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이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켰다. 데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프레져를 맞이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 말 한마디에 데본이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피곤을 이기지 못해 축 늘어져 있던 어깨 역시 바로 세웠다.

“원래 윗사람이 무능하면 아랫사람이 고생을 하는 법이지요.”

무능하다. 그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던 데본은 입을 몇 번 달싹거리다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여기서 목소리를 높여 봤자 제 아버지를 두둔하는 꼴밖에 못됐다.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귀담아 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프레져는 부러 날카로운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이에 데본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다니요?”

“폐하, 아니, 제 아버님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진정 왕위에 욕심이라도 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프레져는 픽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래 고이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왕위를 계승하라니. 그건 프레져도 사양하는 바였다.

“그럼 목적이 대체 뭡니까? 나는 백작의 속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드디어 본심이 나오는 건가. 데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프레져가 무엇을 요구할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와 어리석은 싸움을 벌이지 말 것.”

“…….”

“나와 내 아내를 건드렸다가 어떻게 됐는지 똑똑히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그거 하나뿐입니다.”

프레져 헌티드가 왕실에 대한 예의가 깍듯하다는 것은 수도의 귀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은 다를지라도 겉으로 보이는 것 하나만은 완벽히 연기하는 그였으니.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허물을 완벽히 던져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왕실이 캐롤라인을 건드린 이후부터였다.

“왕실이고 권력이고, 저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세상이 제게 권력을 주었더군요.”

그저 캐롤라인을 살리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이었다. 그녀를 살리고 그녀의 삶을 방해한 이들을 응징하고 나니 감히 프레져에게 대적할 사람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싸움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싸울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다는 걸 늘 생각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왕세자에게 하기엔 건방진 말이었으나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리고 데본은 로널드 험프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나만 조심하면 우리가 척을 지는 일은 없을 거다. 이 뜻이군요.”

“역시 전하께선 아비와 동생에 비할 바 없이 지혜로우시군요.”

프레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는 프레져가 데본에게 건네는 조언이자 경고였다.

* * *

데본 험프리가 왕위에 오른 지 수일이 지났다. 신문에서는 연일 새로운 왕의 행보와 앞으로 열릴 왕실 재판에 대한 기사를 다루느라 바빴다.

「……잠시 중단되었던 사교 행사는 내달 초 열릴 왕실 연회를 시작으로 재개될 예정이다. 내달 중순에 있을 헌티드하우스의 공연을 시작으로 수도의 다양한 극단들이 상연을…….」

“캐롤라인.”

“응.”

자신을 부른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들고 있던 신문을 덮었다. 휴게실 입구에서 브리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홉킨스 박사님이 빨리 오래요.”

“그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캐롤라인은 어느새 훌쩍 움직여 버린 시곗바늘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보고 있었길래 늦은 줄도 몰라요?”

“신문.”

“재밌는 얘기라도 있어요?”

“왕권이 이제 막 바뀌었잖아. 이래저래 처음 보는 기사가 많아서.”

그리고 그 기사의 중심엔 그녀의 전 남편이 있었고. 이것이 캐롤라인이 쉽게 신문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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