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31)화 (131/156)

#131

얼마 지나지 않아 데본 험프리의 왕세자 임명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날부로 정확히 한 달 뒤, 로널드 험프리는 왕위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 프레져가 그에게 준 유효 기간이 한 달이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성급한 퇴위였으나 국왕에겐 퇴로가 없었다. 심지어 글랜포드의 모든 이들이 그의 몰락을 바라고 있었으니 이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도 연회를 하긴 하는군요.”

“아예 안 하기엔 왕실의 체면이 서지 않나 보죠.”

왕세자 임명 축하 연회에 모인 이들은 데본을 축하하는 척하면서도 저마다 왕실의 험담을 나누느라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왕세자 임명식은 대대적인 국가 행사로, 사흘 밤낮으로 크게 연회를 여는 것이 관례였다. 축하를 위해 타국의 사절단이 왕성으로 찾아들며, 대목을 맞이한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여러모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 탓에 임명식 당일에만 연회를 열기로 한 것이었다. 글랜포드의 정세를 아는 타국 왕족들도 소소한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축하를 대신했다.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행사가 흐지부지된 것에 상인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왕실은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나눠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시작하려나 봐요.”

2층 단상 위로 조명이 쏟아지자 귀족들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위를 응시했다. 곧 웅장한 음악과 함께 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옷이…….”

국왕의 차림을 본 이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로널드 험프리가 계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은 채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옷이 얇으면 소매가 펄럭거릴 테고, 그렇게 되면 한쪽 팔이 없는 게 눈에 띌 게 분명했다. 그래서 부러 흔들리지 않을 만큼 무겁고 단단한 소재의 옷을 고른 것이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저런다고 팔 없는 게 감춰지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은 땀을 뻘뻘 흘리는 국왕을 비웃었다. 자신을 향한 조롱을 느낀 국왕은 연설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이를 꽉 물어야 했다.

당장 저 무례한 것들을 잡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곳엔 프레져 헌티드가 있었다.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린 채로.

“……다들 글랜포드의 새로운 태양이 될 자를 축하해 주길 바라네.”

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왕실 재판이 열리고 말겠지. 국왕은 그 점을 상기하며 연설을 마쳤다.

이윽고 임명식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절차가 시작됐다. 국왕이 왕세자가 될 이에게 왕세자의 관을 씌워 주는 차례였다.

왕관을 씌워 주는 과정에서 팔이 없는 게 들통날 게 뻔했기에 국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차례를 생략하고 싶었다. 그러나 임명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날릴 수는 없었기에 그는 번갯불에 콩 볶듯 빠르게 할 일을 마쳤다.

“그럼 다들 오늘을 즐겨 주게.”

깨끗한 술을 다 함께 마시는 것을 끝으로 국왕은 도망치듯 단상에서 물러났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자리를 비울 순 없기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제럴드는 붕괴 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임명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제 아들이 왕세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한 왕비 역시 두통을 핑계로 금방 자리를 떴다. 1층 홀에 남은 왕족이라곤 이 행사의 주인공인 데본 한 사람뿐이었다.

“왕세자 임명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다들 고맙네.”

연회장의 모든 귀족들이 왕국의 새로운 권력자를 찾아 모여들었다. 데본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프레져가 나타난 것은 귀족들을 홀로 감당하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이었다.

데본을 향해 걸어오는 프레져에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바닷길이 열리는 것처럼 갈라졌다.

“왕실의 새로운 태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프레져의 인사에 데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굳었다. 태양은 지배자를 뜻하는 단어로 국왕 외의 다른 이에게는 쓸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로널드 험프리가 아닌 데본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추,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현재 왕국 최고 권력자는 단연 프레져라 할 수 있었다. 부와 명예도 모자라 결국 왕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았나. 이에 다른 귀족들 역시 연달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글랜포드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길, 즐거운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뼈가 있는 말에 데본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마친 프레져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물렀다. 이 지긋지긋한 파티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피곤하군.”

“벌써 피곤하시다니요?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닙니까? 혹시 수술의 후유증이-.”

“시끄러워.”

단호한 목소리에 옆에서 부산을 떨던 로겐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러나 조용히 있던 건 잠시뿐, 로겐은 퍼더덕 몸을 떨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기껏 걱정해 드렸더니. 대표님 없는 동안 개고생한 사람에게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닙니까?”

“그 점은 늘 고맙게 생각한다.”

“…….”

이번엔 다른 의미로 입이 다물렸다. 어느 순간부터 유해지기 시작한 프레져는 그레타에 다녀온 이후 더욱 달라져서 돌아왔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고나 할까? 다른 건 몰라도 사과와 고마움은 바로바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에 로겐은 심장 수술이 정말로 잘못된 줄 알고 한 시간이나 눈물을 쏟아 냈지만.

“그러니 극단을 그만두는 건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

프레져가 없는 동안 로겐과 휴고는 최선을 다해 극단을 운영했다. 프레져가 체제를 잘 정비해 두고 간 덕에 직원들의 단합력은 나름 괜찮았고, 덕분에 올해 사교 시즌을 잘 시작할 수 있었으니.

물론 붕괴 사고라는 국가 재난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교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지만.

“안젤라 골드의 바르테잔행도 무산된 것 같으니.”

프레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안젤라가 있었다. 그녀는 역시 레제브 후작 일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바르테잔의 러브콜을 거절했다고.

“내가 싫은 거면 대표직은 그냥 너에게 주마. 그러니 부디 헌티드하우스에 남아 주길 바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로겐은 다른 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레져의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어머, 백작님!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머지않아 혼자 남은 프레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마리타 부인이었다.

“그레타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저는 결국엔 백작님께서 성공하실 줄 알았답니다!”

“다시 만나 뵙게 돼서 기뻐요.”

마리타 부인의 인사에 그녀의 주변에 서 있던 젊은 영애들 역시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프레져는 고개만 까딱일 뿐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옛날이었으면 비즈니스를 위해 부러 장단을 맞춰 줬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와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시 낭송회 겸 합평회 운영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이 영애들은 시 낭송회의 회원들이랍니다.”

“그렇군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프레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 낭송회는 안 나가면 안 될까요?’

‘왜?’

‘그냥…… 이것저것 낯선 게 많아서요.’

캐롤라인이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다른 귀족들의 무시를 받았다는 건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그 사실과 과거의 기억을 겹쳐 생각해보니 그녀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무시를 받았을지 예상이 갔다.

“문학에 대한 조예도 출중할뿐더러 지혜와 교양을 함양한 아리따운 영애들이죠. 이런 아가씨들을 아내로 맞이할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리타 부인의 자랑에 젊은 영애들이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그러나 프레져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 화가 난 쪽에 가까웠다.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미혼의 영애들을 제게 들이미는 걸까. 자신을, 그리고 캐롤라인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지혜와 교양이라…….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군요.”

“네?”

멋모르고 웃고 있던 영애들의 얼굴에 당황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께서는 합평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합평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리타 부인은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곤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작품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는 게 합평이죠.”

“견해를 주고받는 것 말이죠.”

“네. 비평의 기본은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거니까요.”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본담? 마리타 부인은 의아해하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러나 프레져는 피식 헛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말은 잘하시는군요.”

“네? 그게 무슨……?”

노골적인 비난에 마리타 부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의견을 수용하긴커녕,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나오면 망신을 주기 바쁜 곳을 어떻게 합평의 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모임장이라는 분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데 어떻게 다양한 해석이 나오겠습니까.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지요.”

마리타 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녀 뒤에 서 있는 영애들은 이미 얼굴색이 새하얘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프레져가 캐롤라인을 두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식견도 좁고, 고만고만한 이들끼리 급을 나눠 따돌리기 바쁘고……. 이렇게 교양 없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모임에서 영애들이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남을 망신 주는 법만 배웠겠지.

“내 아내가 이런 엉망인 모임에 잠깐이라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시간이 아까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인.”

프레져와 캐롤라인이 이혼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다들 헌티드 백작가와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 눈에 불을 켰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프레져가 캐롤라인을 ‘내 아내’라 지칭함으로써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체 어떤 남자가 이혼한 전 아내를 따돌렸던 이들을 응징한다는 말인가? 그가 캐롤라인에게 보다 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이를 설명한 방법이 없었다.

“심장 수술을 받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떡하죠? 이럴 줄 알았으면 백작 부인과 친하게 지낼 걸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힐 일을 한 이들은 전부 몸을 떨었다. 왕실보다 더한 권력을 쥐게 된 프레져의 미움을 받을까 겁이 나서였다.

프레져는 이전보다 가라앉은 장내를 서늘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시 낭송 모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겠지.’

승마 모임에 자수 모임까지, 캐롤라인을 무시한 이들을 추려 내면 끝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프레져는 이들을 전부 찾아내어 그보다 더한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그는 고개를 틀어 2층 구석에 있는 자리를 응시했다. 화려한 의자와는 달리 그늘이 잔뜩 져 있는 곳엔 로널드 험프리와 그 시종들이 있었다.

캐롤라인을 가장 힘들게 만든 자, 제일 먼저 손봐야 하는 건 그 아비와 아들이었다.

‘일단은 로널드 험프리 먼저.’

프레져는 시선을 돌려 천장 중앙에 걸려 있는 시계를 응시했다.

왕세자의 관 수여가 끝난 지 한 시간째, 이제 그가 기다려 온 일이 시작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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