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식탁을 빈틈없이 채운 음식들이 보였다.
“마침 파이가 다 구워졌는데 딱 맞춰서 오셨네요?”
스테파니가 오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이를 꺼내며 말했다. 따끈한 파이 윗면엔 무화과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에릭과 마샤는 완성된 음식을 테이블로 옮기고 있었고 힐롱 부부는 미리 만들어 온 리스와 리본 장식을 테이블에 장식하고 있었다.
“흠, 조금 일찍 왔군.”
“얘가 생각보다 걸음이 빠르더라고요. 성질이 급해서.”
성질이 급하긴 무슨. 캐롤라인은 애런의 옆구리를 꼬집으려다 다른 길로 샐 뻔한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예요. 파티죠!”
“파티?”
애런은 가만히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는 캐롤라인을 가장 안쪽에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좋은 날이니까 이 오라버님이 특별히 에스코트해 준다. 상석으로다가.”
어느새 애런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캐롤라인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진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감자를 둥그런 모양으로 깎은 건 이디나의 감자 스튜, 오리고기 위에 바른 건 애런이 직접 만든 특제 소스, 스테파니가 직접 만든 빵과 아크만이 손수 갈아 온 과일주스까지. 모두 그리워했던 음식으로 가득했다.
“마님, 아니, 캐롤라인 아가씨, 집으로 돌아오신 걸 축하드려요!”
스테파니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캐롤라인, 건강해진 걸 축하해요.”
로렌이 입을 열자 아크만이 헛기침을 하며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주황색 튤립과 카라, 달리아를 모아 만든 꽃다발이었다.
“주황은 건강을 기원하는 색이라지.”
“아저씨…….”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지내 보자고. 아주 건강하게 말이야.”
“감사해요.”
꽃을 받아 든 캐롤라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수줍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게, 살아서 돌아왔다는 게,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야, 왜 우냐? 앞으로 좋은 날만 있을 텐데.”
“그러는 오빠도 훌쩍거리고 있잖아.”
“나랑 네가 같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또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가. 이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더욱 값지고도 소중했다.
“너네 둘은 대체 언제 철들래?”
캐롤라인은 눈물을 훔치며 제 오른편에 서 있는 이디나를 응시했다. 그러는 이디나도 눈물을 훔치며 웃고 있었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젠 자신 역시 이디나처럼 늙어 갈 수 있을 터였다.
남들처럼, 그렇게.
“자, 어서들 드세요. 제 영혼을 갈아 만든 음식들이니까요.”
스테파니의 재촉이 있고서야 그들은 포크를 들기 시작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먹을 수 있는 음식엔 제한이 있었지만 캐롤라인은 이걸로도 충분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게 어떤 건지, 행복의 맛은 얼마나 달콤한지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 * *
좋은 날에 술이 빠질 순 없었으나 주인공이 음주를 할 수 없었기에 파티는 해 질 무렵 즈음 끝이 났다. 뒷정리를 도우려 했던 캐롤라인은 삼인방의 만류에 이기지 못해 일찍이 제 방으로 돌아갔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기 때문일까,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유독 방 안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곗바늘 소리와 간혹 밖에서 들려오는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소음의 전부였다.
‘일찍 잘까?’
캐롤라인은 고개를 돌려 불빛이 은은하게 스며들어 오는 창문을 응시했다. 불은 이미 꺼 두었으나 커튼을 걷어 둔 덕에 사위가 밝았다. 거리의 가스등 덕이었다.
한참을 불빛만 보며 누워 있던 캐롤라인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곤 용기를 내어 커튼을 쳤다. 이전보다 더욱 짙어진 어둠이 좁은 방을 집어삼켰다.
“이젠 별로 안 무섭네.”
어둠과 고요가 끔찍할 만치 공포스러울 때가 있었다. 죽음과 닮은 밤이 싫어 불을 켜 두었고 남들이 부산스럽다 느낄 만큼 필요 없는 소음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증명받기 위해서였다. 가위라도 눌리는 날에는 혹여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닐까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이젠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더 이상 죽음을 상상하지 않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탄식할 필요도 없었다.
“살아 있잖아.”
인공 판막의 유효 기간은 20년이라지만, 그 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지만, 지금 당장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캐롤라인은 충분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이렇게 살아 있어.”
고요한 방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자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이 더욱 선명히 느껴졌다. 그러자 자연히 제게 새 생명을 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클리브와 니콜라이부터 시작해 노르티움과 마리아 병원의 의료진들, 임상 실험실에서 사귄 어린 친구들과 자신을 살뜰하게 보살펴 준 마샤와 에릭, 스테파니까지. 줄줄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프레져…….”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이상하게도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실제론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도.
그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이 캐롤라인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프레져가 최종 실험에 참여한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자신에게 속였다는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났다.
왜 자신을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드는 것일까. 자신은 갖고 싶어 안달을 내는 목숨을 왜 그리 쉽게 내거는 걸까. 삶을 경시 여기는 것 같은 태도에 환멸이 났다.
화가 가라앉은 뒤에 든 감정은 찝찝함이었다.
이혼을 한 건 그와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프레져에게 자꾸만 빚을 지는 것 같아 부담감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남은 감정은 걱정이었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지만, 멀쩡했던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걸 다 가진 사람이 왜 아쉬울 게 없을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오만 가지 걱정이 다 들었다.
그러자 신경이 쓰였다. 이미 다 끝난 마당에 왜 이제 와 자신을 살리겠다고 애를 쓰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한 아름 피워 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캐롤라인의 기억에 따르면 프레져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애초에 그런 말을 할 만큼 다정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걸까.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꽃이 피면 그땐 꼭 보자’
그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냉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릴 때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캐롤라인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캐롤라인으로서는 프레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캐롤, 자니?”
그런 그녀의 상념을 깨뜨린 건 문밖에서 들려온 이디나의 목소리였다.
“아뇨. 아직요.”
“들어가도 될까?”
“네.”
캐롤라인이 문을 열자 이디나가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걸 보니 자려고 했나 보구나. 피곤할 텐데 내가 괜히 깨운 모양이야.”
“아니에요. 그냥 불 꺼 놓고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
“그냥…… 이것저것이요.”
캐롤라인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 부러 애매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디나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캐롤라인을 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텐데도.
“그래. 생각이 많겠지. 그 많은 생각들을 이 짧은 밤에 어떻게 정리를 하겠니.”
캐롤라인을 침대에 누인 이디나는 몸을 살짝 웅크려 딸의 옆에 누웠다. 그러자 캐롤라인이 그녀의 옆구리를 껴안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게 걱정만 하다간 다시 병나. 어떻게 찾은 건강인데.”
이디나 앞에서 거짓말은 소용없었다. 캐롤라인은 이디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품 안으로 꾸물꾸물 얼굴을 묻었다.
“엄마는 다 알고 있었죠? 프레져가 수술을 받았다는 거요.”
“…….”
“화내려는 건 아니에요. 다 나를 살리겠다고 내린 결정인데 내가 어떻게 화를 내겠어요. 다만…….”
마음이란 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이전에는 프레져의 속을 볼 수 없어 어려웠다면 지금은 너무도 많은 속내가 읽혀서 어려웠다. 스스로의 마음에 늘 확신을 갖고 살아왔으나 캐롤라인은 난생처음으로 제 마음을 정의할 수가 없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해요?”
“왜 굳이 답을 찾으려고 하니.”
길을 잃은 아이처럼 묻는 캐롤라인에 이디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모든 것에 답을 매길 필요는 없어. 그러기엔 넌 너무 성실히 살아왔잖니.”
“…….”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렴.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될까요?”
“그럼. 과거의 너는 시간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잖니? 촉박해할 것 없이 그저 살아 보렴. 그럼 언젠가 시간이 답해 줄 때가 있을 거야.”
이디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캐롤라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 놈팡이가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놈을 용서해 줄 순 없었다.
저 깡시골까지 찾아와 청혼을 하기에 고생 같은 건 안 시킬 줄 알았는데, 몸만 아니었지 마음고생은 죽을 만큼 시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괜찮은 척 웃었던 딸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디나에겐 캐롤라인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죽음의 끝자락에서 겨우 삶을 되찾은 딸에게 다시 마음고생을 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렴. 네가 어떤 걸 택하든 엄마는 너를 지켜 줄 테니까.”
원래도 반짝이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수없는 고통을 견뎌 죽음이라는 껍데기를 벗어 냈다. 그녀의 아이는 이전보다 한 꺼풀 단단해졌다.
그러니 이젠 거센 풍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잘 나아갈 테지. 이디나가 할 일은 아름다운 나비가 잘 날아갈 수 있게끔 지켜봐 주는 것이었다.
그게 엄마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