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29)화 (129/156)

#129

거침없이 말을 뱉는 프레져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국왕이 금지 약물에 손을 대 수술이 난항을 겪었다는 건 그를 근처에서 모시는 사람이라면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엔 이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콘월 후작이 왕성에 자주 드나들던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말입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내가 그자와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을 하는 건가? 애초에 콘월 후작이 금지 약물에 손을 댄다는 증거를 어떻게-”

“보시면 압니다.”

국왕은 바로 서류를 펼치려다 말고 시종들을 전부 내보냈다. 그러다 서류를 대신 넘겨 줄 시종마저 자리를 뜬 것을 깨닫고는 한쪽 손으로 불편하게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이건……!”

여백 없이 빼곡히 채워진 글자를 본 국왕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프레져는 혼자서만 보기 아까운 광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그레타에서 수술만 받고 올 거라 생각했습니까?”

종이엔 국왕이 마약성 약물을 허용치 이상으로 복용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있었다. 구체적인 수치가 적혀 있는 탓에 아니라 부정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병든 심장도 고치는 시대인데 피에 어떤 게 들어 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하겠습니까?”

혈액에 산소가 흐른다는 것은 애초에 혈액의 성분을 분석 가능했기에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마리아 병원의 의료진들은 혈액용 산소 공급 기계를 만들며 피를 분석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프레져는 이들에게 국왕의 피를 맡겼다.

“어, 어떻게…….”

국왕의 팔 절단 수술에 참여한 의사들이 의문을 가진 덕이었다. 프레져가 보낸 사람들이 국왕의 피가 묻은 수술 용품을 빠르게 가로챘고, 이를 건네받은 패트릭이 그레타에 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 게 가능합니다. 폐하께서 뒤늦게 빠지셨던 신학과는 다르게요.”

“…….”

“아, 애초에 겉핥기식으로 배웠을 테니 뭐가 다른지도 모르시려나?”

프레져는 실컷 비아냥거렸다. 권위 있는 귀족으로 나고 자란 과거의 그였다면 감히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프레져에게 권력이나 명예, 왕족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제 삶에 처음으로 의미를 부여해 준 사람이 왕실에 의해 죽을 뻔했다. 그것만으로도 프레져에겐 국왕을 무너뜨릴 이유가 충분했다.

“나는 조만간 이 모든 걸 세상에 공개할 겁니다. 그리고 무려 다섯 가문의 귀족과 어린 신관들을 죽게 만든 죄 역시 함께 물을 생각이고.”

“!”

국왕이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프레져는 그에게 변명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무너진 예배당을 수습하는 데 사용된 국고와 2왕자가 멋대로 횡령한 돈까지 모조리 합쳐 그 죄를 폐하께 물을 겁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왕실 재판이 열리게 되겠죠.”

왕실 재판. 이는 왕족이 죄를 지었을 때에만 열리는 재판으로 글랜포드의 모든 귀족들 앞에서 죄를 심판당하는 일이었다. 최근엔 열린 적이 드물긴 했으나 재판에 불려 간 왕족 대부분은 왕실 명부에서 제명당했다.

“금지 약물에 손을 댄 죄는 특히 크니…… 왕실 명부에서 제명당하는 건 불가피하다 생각됩니다만.”

“안 된다!”

“이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습니다.”

얼굴이 새하얘진 국왕을 프레져는 건조한 낯으로 응시했다.

“배가 물 위를 건너고 말이 아닌 자동차가 거리를 횡단합니다. 비행선 연구에 착수한 나라도 여럿이고요.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아나는 세상인데 안 되는 게 있겠습니까?”

“…….”

“뒷방 늙은이가 될지언정 왕족으로 남을지, 아니면 왕실 명부에서 제명당한 채 거렁뱅이만도 못한 삶을 살지는 스스로 결정하십쇼.”

“그 말은…… 왕위에서 물러나 칩거하면 저 서류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건 제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할 말을 마친 프레져는 덜덜 떨고 있는 국왕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려다보는 국왕의 정수리는 참 낮고 볼품없었다.

“어차피 죽을 때는 다 빈손이지만.”

* * *

캐롤라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이디나는 아침 일찍부터 기차역에 나가 남매를 기다렸다. 스테파니와 힐롱 부부 역시 함께였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크만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디나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기차의 경적 소리와 행인들의 구두 굽 소리로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기다림에 애가 닳아 올 무렵이었다.

“엄마!”

사방에 잡음이 가득했으나 캐롤라인의 목소리만은 선명히 들렸다. 이디나는 스테파니의 손을 잡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도도도.

빠르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마른 팔이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랜 여정 탓에 상대에게선 낯선 향이 났으나 이디나는 자신을 끌어안은 이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캐롤이니?”

캐롤라인은 물음에 대답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에 더욱 초조해진 이디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이니? 정말 우리 캐롤이야?”

“응, 맞아요. 나 캐롤라인이에요, 엄마.”

“오, 세상에.”

캐롤라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더듬거리던 이디나가 캐롤라인과 이마를 맞댔다. 주름진 눈가엔 이미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시울 역시 붉어져 있었다.

“맞구나, 맞아. 우리 애가 맞아. 캐롤라인이 맞아!”

살아 있다. 사랑하는 딸이 살아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캐롤라인은 제법 건강해 보였다. 볼에 제법 살이 오른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뛰어오기까지 했다.

“우리 딸, 이제 안 아픈 거 맞지? 그렇지?”

아직 불안함이 가시지 않은 듯 손을 떨며 말하는 이디나에 캐롤라인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이제 안 아플 거래요. 시한부도 아니래요. 그러니까 앞으론 걱정 안 해도 돼요.”

캐롤라인은 걱정으로 인해 수척해진 이디나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턱선에 닿을락 말락 했던 귀밑머리가 어느새 어깨선에 닿아 있었다.

캐롤라인은 자신이 떠나 있던 시간이, 그리고 의식을 잃고 있던 시간이 아주 길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걱정시켜서 미안했어요, 엄마.”

* * *

캐롤라인은 자신의 담당의인 홉킨스 박사와 이디나에게 수술 경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설명은 클리브의 몫이었지만.

“정말 놀랍군!”

설명을 들은 홉킨스 박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이 위대한 수술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어렵게 연구한 수술인데, 외부에 이리 쉽게 공유해도 되는 건가?”

기쁨이 가라앉고 나니 걱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리브는 노르티움 병원에 심장 수술을 공유하기 위해 제법 많은 수의 연구진을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환자들을 이롭게 하는 게 마리아 병원의 사명입니다. 기술을 독점하고 싶진 않아요.”

“자네가 그렇다니 달리 할 말은 없네만, 아직 그레타에도 퍼지지 않은 수술을 우리 병원에 처음으로 공유한다는 것이 조금…….”

“노르티움 병원은 마리아 병원과 협진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수술을 공유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제법 일리 있는 대답에 홉킨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실상은 클리브가 설명한 것과 조금 달랐다.

수술 방법을 공유할 첫 번째 병원으로 노르티움을 고른 것은 순전히 캐롤라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글랜포드로 돌아갈 테고 글랜포드엔 마리아 병원의 의술을 아는 병원이 없었다. 혹시라도 수술 부위에 이상이 생겼을 때 빠르게 확인하려면 그녀의 근처에 이 의술을 아는 사람과 장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클리브는 니콜라이를 설득했다.

‘다시 글랜포드로 가겠다고?’

‘네.’

‘그 환자 때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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