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내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죠?”
예상치 못한 대답에 프레져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작 캐롤라인은 별걸 다 놀라워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그야 당신이……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건 지은 죄가 없는 사람에 한해서죠.”
“…….”
“프레져, 난 국왕의 견제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그건 나 말고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난 그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풀 만큼 호구가 아니에요.”
“호구…….”
캐롤라인의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단어의 등장에 프레져는 당황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국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면서요. 남들은 죽게 내버려 두고 자기만 편하게 살 방법을 찾는 게 너무 괘씸해요.”
“하긴, 그런 인간을 위해 쓸 시간과 자본이 아깝긴 하지.”
“로널드 험프리는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왔잖아요? 이젠 좀 힘들게 살아 봐야 해요.”
그 말에 프레져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악당 같아서.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나랑 애런이랑 대화하는 거 보면 놀라서 자빠지겠네요.”
캐롤라인이 괜히 딴청을 피우며 툴툴거렸다.
그녀의 고향 로우밸리는 유독 다채로운 욕설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 록킹덤과 가까운 고장이었다. 백작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걸러 냈는지 안다면 프레져는 분명 경악하겠지.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깎을 필요가 없었다.
“겨우 팔 하나 없는 거쯤이야 죽는 것보다 낫겠죠.”
“당신이 그렇다니.”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대답에 프레져는 미소를 지었다.
문득 가족과 함께 있는 캐롤라인은, 또 남을 의식하지 않는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프레져를 뒤로하고, 캐롤라인은 병실로 돌아가려는 모양인지 슬그머니 몸을 틀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가 볼-.”
“가지 마.”
“…….”
“나 아직 할 말 더 남았어. 그러니까 가지 마.”
가지 말라는 단호한 외침과는 달리, 캐롤라인의 옷소매만 그러쥐는 손은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소매를 옹졸하게 붙잡은 엄지와 검지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말이 더 하고 싶은데요.”
“그게…….”
이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프레져는 소매를 쥔 손을 황급히 떼어 냈다. 그러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안 아프지?”
“……네.”
“다행이네.”
“정말 그게 궁금한 거예요?”
“어. 근데 사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어.”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렸다. 꼭 첫 발표를 앞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멀쩡히 서 있는 캐롤라인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럴까? 아니면 아쉽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서 그런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그녀의 냉랭한 모습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아서 이러는 걸까?
“왜 그렇게 쭈뼛거려요.”
“말하고 싶은데…….”
물어보면 당신이 싫어할까 봐. 곧장 내게서 등을 돌릴까 봐. 당신의 뒷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
“아…….”
프레져는 그제야 자신을 불러 놓고도 쉬이 운을 떼지 못하던 캐롤라인의 마음을 알아챘다.
말을 꺼내면 자신이 등을 돌릴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캐롤라인을 앞에 두고 자리를 벗어난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니. 하지만 캐롤라인은 자신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어디 안 가고 화도 안 낼 테니까 천천히 말해 봐요.”
“…….”
“수술은 당신도 받았잖아요. 그 후유증으로 말이 잘 안 나올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네요. 미안해요.”
그녀는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을 안다. 사과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 그것이 캐롤라인 웨즐을 따뜻한 사람이라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석양의 온도를 닮은 부드러운 말투에 프레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글랜포드로 돌아가면…… 어디에 있을 거야?”
“바로 로우밸리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애런이 말리더라고요. 그 근처엔 큰 병원이 없어서 위험하다고. 당분간은 노르티움에 머무를 예정이에요.”
“그다음엔?”
“글쎄요. 클리브 선생님을 포함해서 다른 연구원분들도 함께 오신다고 하니…… 올해는 계속 노르티움에 있지 않을까요?”
클리브의 이름이 나오자 프레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인간이 기어코 노르티움까지 따라온다니.
“왜요?”
물론 캐롤라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표정을 고쳤지만.
“아니, 그냥……. 로우밸리엔 당신이 좋아하는 봄꽃들이 많잖아. 당신이 늘 그리워하던 곳이기도 하고.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궁금해서.”
“아하.”
고향을 떠올리는지 캐롤라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로우밸리의 들판에 아름다운 꽃들을 잔뜩 피워 놓겠다고 그녀와 약속했었다. 그런데.
“봄이 다 가 버렸네.”
글랜포드는 이미 봄꽃이 모두 저물 시기였다. 들판은 푸를 테고 한 계절을 장식했던 꽃들은 땅에 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갔겠지.
캐롤라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프레져는 고개를 숙였다.
눈에 띄게 풀이 죽은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당황했다.
“음, 당신이 봄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떠나버린 계절을 아쉬워하는 이를 위해 해줄 위로는 뭐가 있을까. 캐롤라인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봄은 올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
맞은편에서 들려온 바람 같은 목소리에 프레져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봄은 내년에도 있고, 그다음 해에도 있으니까요.”
계절은 돌아온다. 그러나 이전이라면 할 수 없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노고 덕에 캐롤라인은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내일과 내년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을.
“그러니까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말고 다음 해를 기대해 봐요. 내년엔 올해보다 더 예쁜 꽃이 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
“뜬금없는 소리긴 한데, 내일을 기대하는 삶이란 정말 멋지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프레져는 석양이 내린 캐롤라인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몇 번의 계절이 흐른 뒤엔 다시 내게 돌아와 달라 말해도 될까?
프레져는 묻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미소 지었다.
* * *
데본이 왕세자로 임명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국왕은 좀처럼 왕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데본에게 가르쳐야 할 게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왕위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데본이 돌연 뜻을 바꿔 국왕은 당황한 참이었다. 물론 제럴드나 휘플러 공작에게 왕위를 줄 생각이 없으니 데본을 설득할 계획이긴 했지만.
프레져가 수도로 돌아온 것은 국왕의 굼뜬 행동에 분노한 백성들이 다시 시위를 일으킬 무렵이었다.
“폐하, 헌티드 백작이 알현을 청했습니다.”
“뭐? 그자가 벌써 수도에 도착했단 말이냐?”
“네. 백작저에 들르지 않고 바로 왕성으로 온 듯싶습니다.”
“어찌 연락도 없이?”
왕족을 만나기 전엔 사람을 시켜 알현을 잡아 놓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미리 연락도 없이 왕성으로 쳐들어오다니.
“문지기들은 순순히 문을 열어 줬다는 말이냐?”
“오늘 오후에 귀족 회의가 있지 않습니까. 헌티드 백작이 회의에 참여하는 줄 알고 문을 연 모양입니다.”
프레져의 무례함에 이를 갈던 국왕은 그가 아직 의수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얼굴을 보고 얘기할 생각인가 보군. 들여보내라.”
할 수만 있다면 그자를 잘 구슬려야지.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현재 왕국의 권력은 헌티드 백작이 쥐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헌티드 백작을 잘 설득하면 왕위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왕의 허황된 꿈은 프레져가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며 깨졌다.
“오랜만입니다.”
프레져는 왕의 앞에서 지켜야 할 그 어떤 예의범절도 따르지 않았다. 아무 호칭도 없이 한 줄 인사만 건넨 프레져는 바람에 펄럭이는 국왕의 옷소매를 보다 미간을 좁혔다. 이에 시종이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저런.”
딱하다는 듯 탄식하는 프레져에 국왕은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백작, 대체 이게 무슨 무례인가!”
갑자기 일어선 탓에 몸이 비틀거렸으나 국왕은 신경 쓰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외팔이 된 게 우스운가? 팔도 없는 주제에 자네에게 의수를 구걸하는 처지가 우습냔 말이야!”
프레져 헌티드는 국왕을, 글랜포드 왕실을 이겼다. 그 점이 국왕의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처지도 체면이 상하는데 팔을 잃은 자신을 감히 동정하다니. 국왕은 좀처럼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이 나라의 왕이네! 왕위에서 물러난다 해도 내가 왕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근데 그깟 수술 좀 성공했다고 자네가 신이라도 되는 줄…… 콜록콜록, 컥!”
갑자기 언성을 높인 탓에 폐에 무리가 간 모양인지 국왕은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프레져는 국왕을 둘러싼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시종들을 건조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빨리 나가고 싶군.’
병든 것도 모자라 욕심이 그득그득 붙은 노인네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프레져는 국왕의 기침이 사그라들길 기다렸다 바로 입을 열었다.
“글랜포드의 왕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무려 글랜포드 법전에 명시된 항목이었다. 신의 축복을 증명할 방법 따윈 없었지만 과거의 지배자들은 왕가의 정통성을 위해 이 말도 안 되는 조항을 법전에 새겨 두었다.
“그런데 폐하께선 신의 미움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신이 버린 자를 어찌 왕으로 받들겠습니까.”
신이 버린 자. 글랜포드의 모든 사람들이 국왕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예배당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수많은 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신에게 버림받다 못해 저주를 받은 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국왕을 지지하던 종교 세력마저 등을 돌린 이유였다.
“이런 불경한……!”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하는 게 불경한지, 신의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은 주제에 왕좌를 지키려 하는 게 더 불경한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팔걸이를 쥔 국왕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프레져는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을 공개하기 전에 한 가지 드릴 청이 있습니다.”
“청?”
혹시 의수와 거래 가능한 부탁인 건가? 직전까지만 해도 분노로 벌게져 있던 국왕의 눈이 금세 다른 빛을 띠었다. 프레져는 그 변화를 부러 못 본 척하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사람을 물렸으면 하는데.”
“자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사람을 물린단 말인가!”
“거절하시니 별수 없군요.”
프레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종이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저는 사람을 물릴 기회를 드렸습니다. 분명히.”
경고하듯 읊조리는 목소리에 국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저게 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물리라고 한 걸까? 프레져의 경고는 오히려 시종들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역효과를 낳았다. 알현실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로 향했다.
“폐하께서 금지 약물, 그러니까 마약에 손을 댔다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