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로널드 험프리의 건강과 왕위가 위태롭다는 소식은 저 먼 곳에 있는 그레타까지 전해졌다.
국왕의 입지가 좁아진 건 귀족들의 압박과 평민들의 시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프레져의 영향도 제법 컸다. 프레져가 왕실에는 마광석과 관련된 의학 용품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왕실과 교단의 반대로 수많은 심장병 환자들이 기회를 놓칠 뻔했는데 이를 국왕에게 제공하는 게 도의적으로 맞는 일이냐는 물음이 다였다.
왕국인들의 규탄으로도 모자라 의수를 얻을 수 없을까 걱정이 된 국왕은 예상보다 순순히 왕세자를 책봉했다. 물론 왕세자가 데본 험프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전 당연히 휘플러 공작이 왕세자가 될 줄 알았어요. 두 왕자를 제외하면 계승 순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그분이니까요.”
1왕자는 일찍이 왕위에 뜻이 없음을 밝혔고 2왕자는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왕녀 샤를리즈는 이미 그레타의 사람이 되었으니 국왕의 사촌뻘인 휘플러 공작이 왕위를 세습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국왕은 1왕자 데본을 왕세자로 임명했다.
“국왕을 끌어내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휘플러 공작이라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작에겐 절대 왕위를 주고 싶지 않겠죠.”
“맞아요. 어쩌면 데본 험프리가 뜻을 바꿨을 수도 있죠. 쓰러진 국왕을 대신해 정무에 나선 것도 1왕자라잖아요.”
어쩌면 아버지를 보고 깨달은 게 있을지도 모르고요.
베카의 말에 이야기를 듣던 마샤와 에릭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글랜포드의 정세에 대해 떠들면서도 짐을 꾸리는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내일 오전 열차로 그레타를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그동안 그레타는 완전히 봄이 됐고요.”
창밖을 내다보며 말하는 마샤에 에릭과 베카의 시선이 자연히 창문 쪽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헐벗었던 나무들은 이제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글랜포드를 떠난 지 한 달이 넘었죠?”
“네. 막상 병원엔 그리 오래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
“글랜포드에서 그레타까지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글랜포드보다 북쪽에 있는 그레타는 이제 봄이었다. 마리아 병원에서 노르티움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리니 도착했을 땐 노르티움은 봄이 끝나 있을 터였다. 글랜포드 남부는 이미 여름이 시작되고 있을지도.
“그래도 우리는 한 달이지만, 백작님은 이곳에 두 달 가까이 계셨겠군요.”
에릭의 말에 제법 밝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며칠 전, 프레져가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캐롤라인은 계속 찬바람만 풍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런도, 에릭이랑 마샤도 정말 너무했어. 어떻게 프레져가 여기 있다는 걸 나한테 숨길 수 있어?’
차라리 그대로 화를 냈다면 나았을 텐데. 캐롤라인은 저 말을 끝으로 프레져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러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려 애썼지만 캐롤라인에게서 풍기는 냉기를 감지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모아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선뜻 캐롤라인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프레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던 캐롤라인은 프레져가 마리아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러니 프레져마저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글랜포드로 돌아가면 당분간 백작님을 볼 일이 없을 텐데. 지금이라도 대화를 나누셨으면 좋겠어요.”
“마님께서 생각이 많으시겠죠.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가요……”
에릭의 말에 마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프레져는 병원 원장실에서 니콜라이와 독대 중이었다. 마리아 병원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을 듣기 위해서였다.
“흉통이 이전처럼 잦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진통제를 가지고 다니는 게 좋겠죠.”
“진통제라…….”
프레져는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약병을 응시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엔 새끼손톱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알약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들고 다니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군요.”
“몇 개씩 빼서 가지고 다니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이외에도 니콜라이가 여러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닥 프레져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그야 약을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문제였으니.
어차피 이제 매일같이 혈전 방지약을 먹어야 하니 진통제를 들고 다니는 것쯤이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캐롤라인에게 약병을 들키게 됐을 때를 생각해야 했다. 흉통을 앓는 걸로도 모자라 이에 대비해 약까지 들고 다니는 걸 들키게 된다면 큰일이었으니. 그녀에게는 이상이 없다 말해 두지 않았던가.
물론 글랜포드에 돌아가면 더 이상 그녀와 마주치게 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흐음.”
프레져가 걱정하는 바를 눈치챘는지 니콜라이 역시 고민에 빠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박수를 짝 치며 자세를 바꿔 앉았다.
“목걸이를 쓰면 되겠군요!”
“목걸이요?”
“네. 펜던트 말입니다.”
니콜라이가 제 목에 걸린 로켓 펜던트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펜던트 안엔 오래전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것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로 만들면 약 한두 알쯤은 너끈히 들어갈 겁니다. 약병이 아니니 눈에 띌 리도 없고 단순한 액세서리니 백작이 하기에도 불편하지 않겠죠. 위급 상황에 바로 약을 꺼내기도 좋고요.”
프레져는 니콜라이의 가슴께에 걸린 펜던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켓 안쪽에 들어 있는 노부부의 사진을.
추억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었다. 이는 결혼반지 외에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했다.
저런 걸 만들어 하고 다녔다면 캐롤라인에게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던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별것 아닌 사소한 것을 통해 제 존재를 인증받곤 했다. 그러나 프레져는 그녀에게 이런 사소한 의미조차 부여해 준 적이 없었다.
“십 년 넘게 차고 있는데도 달리 불편하다 느껴 본 적은 없습니다. 수술이 있을 땐 빼고 들어가긴 하지만요. 아, 이렇게 된 거 다른 환자들을 위해 보급형 목걸이를 만드는 것도…….”
이렇게 후회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의 자신은 제 마음조차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으니.
그럼에도 계속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백작?”
“좋은 방법이군요.”
사진 안에서 미소 짓고 있는 노부부의 얼굴이 몹시 다정해 보여 프레져는 결국 시선을 돌렸다. 가슴팍에 자리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니콜라이 역시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깨닫고는 화두를 돌렸다.
“수술 얘길 하느라 깜빡할 뻔했군요. 이건 그때 부탁하셨던 겁니다.”
니콜라이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든 프레져의 눈이 순식간에 이채를 띠었다.
“이것저것 꽤나 많이 손을 댄 모양이더군요. 검사 결과가 이리 확실하니 발뺌하진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어본 프레져는 준비해 온 가방에 서류를 넣었다. 이야기를 모두 마친 뒤 원장실에서 나왔을 땐 해가 오렌지빛으로 익어 가고 있었다.
“건강하게 돌아가실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글랜포드에 가서도 잘 지내셔야 해요?”
“그럼요. 다들 감사했어요.”
계단을 오르니 마침 복도에 서 있는 캐롤라인이 보였다. 그레타를 떠나기 전에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놀러 올게요.”
“네. 환자로 오시지 말고, 꼭 손님으로 오세…… 어머.”
프레져를 발견한 간호사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캐롤라인의 시선도 자연히 그녀의 뒤쪽에 서 있는 프레져에게로 돌아갔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요.”
간호사들은 프레져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빠르게 자리를 비켰다. 넓은 복도엔 프레져와 캐롤라인, 주홍빛 석양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저…….”
먼저 입을 연 건 프레져였다. 둘만 있을 수 있는 기회는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프레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말똥말똥 눈만 깜빡이고 있던 캐롤라인은 프레져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틀었다. 이에 프레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국왕이!”
“……네?”
그리고 후회했다. 기껏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가 국왕이라니.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했다.
“국왕이 뭘요?”
다행히 관심을 보이는 캐롤라인에 프레져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국왕이 도움을 요청했어. 마광석으로 만든 의수를 포함해서 손상된 폐를 복구할 방법을 묻더군.”
“폐요?”
대외적으로 국왕은 죽을 고비를 넘김과 동시에 팔 한쪽만 잃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달랐다. 예배당이 무너지며 지나치게 많은 먼지를 흡입한 것도 모자라 저체온증까지 앓은 탓에 폐가 망가진 것이었다.
“그걸 왜 당신한테 묻죠? 당신은 의사도 아니잖아요.”
“내가 투자해 주길 원하나 보지.”
“뻔뻔해라.”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탓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져는 그녀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건 명령인가요?”
“아니. 부탁.”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군요.”
마광석을 불신할 땐 언제고, 자신이 다치고 나서야 프레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당연히 거절했지. 의수를 만들 만큼 많은 마광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난 의사가 아니라 폐를 고치는 방법은 모른다고.”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있을 국왕을 생각한 프레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릴 뻔했다가 캐롤라인이 옆에 있는 걸 깨닫고 다시 표정을 굳혔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은근슬쩍 몸을 틀며 입을 열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
“내 생각이요?”
“응. 내 뜻이 어떻든 나는 당신의 결정을 따를 생각이야.”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로널드 험프리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길 한복판에서 개죽음을 당하게 만들어도 시원찮았다.
그러나 캐롤라인이 원치 않는다면 자제할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은 캐롤라인의 몫이므로.
좋은 원인은 아니었지만, 심장 수술과 마광석 가공이 이리 빠르게 발전한 건 캐롤라인이 아팠던 탓이 컸다. 무엇보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전부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 있으니까.
제 옆에서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다.
“우리가 국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의수 정도는 지원해 보도록 할게.”
의수 이상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캐롤라인이 원한다면 고려할 의사가 충분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대답은 프레져의 예상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