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캐롤라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곤 냉큼 그의 상의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옷이 아래로 내려가며 가슴께에 새겨진 상처가 드러났다.
“지, 지금 뭐 하는……!”
양쪽 가슴 중앙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보였다. 상처는 캐롤라인과 똑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그녀의 것보다 훨씬 컸다.
“미쳤어, 정말…….”
캐롤라인은 그 상처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옷을 잡아당기고 있던 손을 거뒀다. 얼굴이 붉어진 채 옷을 정리하고 있는 프레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신은 정말 미친 게 분명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달리 방법이 없었어. 최종 실험만 성공하면 수술할 수 있다는데 우리한텐 시간이 없었잖아. 난 허무하게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았어.”
허무하다. 그 말이 맞았다. 되도 않는 이유로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캐롤라인이 느낀 건 허무함과 탈력감이었다. 애써 버텨 왔던 것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으니.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생살을 갈라 심장을 들추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병든 가슴을 가르는 것도 두려운데 남을 살리겠다고 멀쩡한 심장을 내어 주다니.
“이러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요?”
“…….”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받아들일 줄 알았냐고요! 만일 그 과정에서 당신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이제 캐롤라인에게 프레져는 그리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캐롤라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그가 자신을 살리려다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은 프레져에게 이전보다 더 무거운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미움과 맞먹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거짓말. 그럼 대체 왜 그런 건데요.”
“그야 당신이 죽는 게 싫었으니까.”
그녀가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무모한 짓이었다는 거 알아. 나도 쉽게 결정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한테는 시간이 없었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살리고 싶었어.”
“나한테 미안해서요?”
이젠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프레져에겐 아직도 부채감이 남아 있는 걸까? 캐롤라인은 살짝 젖은 눈동자로 프레져를 응시했다.
캐롤라인의 말에 프레져는 고개를 짧게 가로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당신이 소중해서 그랬어.”
“…….”
이어진 말에 캐롤라인의 입이 다물렸다.
“미안하다는 이유가 아주 없진 않지. 하지만 내가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던 건 미안한 거 하나 때문이 아니야. 내가 당신이 너무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마음 때문만도 아니고.”
“그럼 왜요?”
“이대로 가 버리면 당신이 너무 억울할 것 같잖아.”
“…….”
“이제 나 같은 놈이랑 이혼도 했고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가족들도 만났는데 다 같이 재밌게 살아야지. 이대로 죽으면 당신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캐롤라인은 행복해져야 했다. 자신이 캐롤라인의 슬픔을 가져올 수 없다면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늘 로우밸리를 그리워했잖아. 돌아가야지.”
“정말…….”
캐롤라인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이대로 입을 열었다간 엉망인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캐롤라인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목숨은 안 아깝고요?”
“어. 별로 안 아깝더라.”
“…….”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아까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유언장을 쓰며 프레져가 느낀 것은 이전보다 더 큰 후회였다.
헌티드 백작으로서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 생각하니 그리 아쉽진 않았다. 다만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쁘게 살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어 허무했다.
결국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은 캐롤라인인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각날 사람 역시 그녀 한 사람뿐인데. 그 의미 없는 것들을 누리겠다고 그녀를 아프고 또 외롭게 했다. 그것 하나가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아쉬운 게 없어서 결정 내리기가 더 쉬웠어. 나랑 달리 당신은 아쉬운 게 많은 사람이니까.”
자신처럼 아쉬운 게 없는 사람보다 아쉬운 게 많은 사람이 세상에 남는 것이 유익할 터였다. 이 넓은 세상엔 캐롤라인이 누려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으니.
“내가 왜 아쉬운 게 많아요?”
“당신이 그랬는데. 정말 아쉽다고.”
“내가 그랬다고요?”
“응. 기억 안 나?”
기억을 더듬어 보는 듯 생각에 잠긴 캐롤라인을 보며 프레져는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쉽다는 말 역시 그녀의 무의식에서 기인했던 것임을.
무의식중에 그런 말이 나올 정도면 얼마나 삶에 미련이 가득한 걸까. 그걸 깨닫자 수술대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던 그녀가 이리 멀쩡히 서 있었다. 게다가 화까지 버럭버럭 내면서. 그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살아서 다행이야, 캐롤라인.”
* * *
국왕은 실로 오랜만에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배당 붕괴 사고에 대한 사과와 동시에 그동안의 종교 분쟁을 끝내기 위함이었다. 결국엔 프레져의 승리였다.
귀족들은 국왕의 한쪽 팔이 빈 것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으나 이미 국왕은 그 미묘한 시선을 모두 느낀 뒤였다. 그는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겨우 참은 뒤 입을 열었다.
“헌티드 백작에 대한 심판을 철회함과 더불어…… 붕괴 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네. 사과의 뜻을 담아 보상금을 준비했으니 다들 너그러이 받아 줬으면 하네.”
“폐하, 고작 돈 몇 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멀리서 들려온 외침에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국왕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폐하께서는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불응의 목소리를 낸 건 티어런 자작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가주가 된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선대 가주가 사고를 당한 뒤 급히 가주직에 오른 이였다.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만 이 자리에 넷이었다.
“이번 일은 유감이네. 나 역시 이번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으니. 하지만 이건 재해가 아닌가? 건물이 비바람을 이기지 못해 무너진 사고를 인간에 불과한 내가 어디까지 사과를 해야 하는 겐가?”
국왕의 목소리엔 분노가 섞여 있었다. 팔 한쪽을 잃었다는 것과 감히 대드는 신하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티어런 자작은 고개 숙이지 않았다.
“재해라니요. 재해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천재지변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이번 붕괴 사고는 전부 폐하께서 자초하신 일이지 않습니까.”
“뭐라?”
“그날, 폐하께서 다시 자리에 앉으라는 명을 내리지만 않았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예배당 증축을 급히 마무리하지만 않으셨어도 됐을 겁니다. 그랬다면 폐하의 몸 역시 온전히 보전할 수 있으셨겠지요.”
“지금 예배당이 무너진 게 내 책임이라 이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어딜 감히……!”
무심코 팔걸이를 내려치려던 국왕은 움직일 팔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눈으로 국왕을 응시했다. 그의 편을 들고 나서는 귀족 역시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친왕파 귀족들은 전부 루미아르당에서 변을 당했으니. 티어런 자작가 역시 한때는 대표적인 친왕파 귀족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국왕은 이전보다 조급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방금 사과하지 않았는가? 헌티드 백작의 죄 역시 묻지 않기로 했고 말이야. 그대들을 위해 심장 수술과 마광석의 도입 역시 인정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게 어찌 저희들을 위한 일입니까. 폐하를 위한 일이겠지요.”
틀린 말 하나 없는 대답에 국왕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번 대답은 귀족파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휘플러 공작에게 나왔다.
“폐하께서 팔을 잃으신 이후로 헌티드 백작에게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그건.”
프레져에게 연락한 걸 들켜 당황한 건 아니었다.
친왕파와 귀족파의 의견이 깔끔하게 단합된 것도, 그 담합이 자신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꽤나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20년 넘게 군림했지만 이리 불손한 모습의 신하들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당황은 배가 되었다.
이에 휘플러 공작은 국왕에게 다가가 성명서를 내밀었다. 무릎은 꿇지 않은 채였다.
“저희 귀족원 전원은 현왕 로널드 르 아스트르 험프리의 퇴위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회의에 참석하는 모든 귀족들의 반대가 있으면 왕은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리고 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만장일치가 나온 것이었다.
“퇴위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그것은 이제 정하셔야지요.”
“왕세자 임명이 오랫동안 미뤄졌으니 이참에 바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답변이 이어졌다. 계승 순위나 업무 능력으로 밀리지 않는 데본을 왕세자로 임명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국왕은 끼지 못하는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휘플러 공작이 다시 국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는 폐하께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나는 국왕이네. 이 나라의 제일이야! 자네들이 어찌 감히 나를……!”
“이 글랜포드의 사람들 중 폐하의 통치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나기 싫으시다면 사람 한 명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나라에서 군림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