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뭐라?”
“사과할 이는 백작뿐만이 아닙니다. 사고를 당한 귀족 일가에게도 사과하셔야 합니다.”
데본은 격노하는 국왕을 향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족만 열 명에 스무 명에 가까운 사제들이 죽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국왕이 팔 한쪽을 못 쓰게 됐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 왕실이 프레져에게 의수를 요청했다는 기사가 터졌다.
그 의수가 국왕이 그렇게 경계하던 ‘신자원’인 마광석으로 만든 물건이란 사실까지.
국왕이 냉큼 프레져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말에 글랜포드의 모든 이들이 분노했다.
종교를 이유로 프레져를 심판하려 들 땐 언제고, 막상 자신이 필요로 하니 냉큼 태도를 바꾸는 모양새가 간사했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건강을 핑계로 정작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 자리도, 사과 자리도 열지 않았다. 밀린 정무는 전부 데본의 몫이었다.
“어차피 헌티드 백작은 우리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뭐?”
국왕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자가 뭔데 감히 왕실의 요구를 거절한단 말이냐!”
그러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크게 휘청였다. 한쪽 팔이 없는 삶이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종교와 신자원의 안전성을 이유로 백작을 책잡은 건 폐하십니다. 헌티드 백작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은 이 분쟁을 끝내는 것뿐입니다.”
“됐다. 그깟 의수가 뭐가 대수라고. 다른 의사에게 지시하면 된다.”
“백작이 가진 건 마광석입니다. 인공 심장도 만들어 냈는데 팔에 쓰지 못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
데본의 설득에 국왕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프레져 헌티드, 그자에겐 죽어도 머리 숙이고 싶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집회를 연 것도 다 그자 때문이 아닌가? 루미아르당의 공사가 부실하게 끝난 것도 다 그자를 막느라 생긴 일인데. 애초에 프레져 헌티드가 제 말을 들었더라면…….
“폐하.”
데본의 부름에 잠시 흐려졌던 국왕의 눈에 초점이 생겼다.
“비단 의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왕실은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국왕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성벽 밖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규모가 더욱 커진 시위대가 농성을 하는 소리였다.
게다가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귀족들과 교단의 항의문까지.
“하…….”
그가 결정을 내리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프레져와 이야기를 끝낸 패트릭은 자리를 뜨기 위해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모아가 그를 찾을 시간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
“압빠아! 어디 있어?”
때맞춰 들려온 모아의 목소리에 패트릭과 프레져는 어깨를 흠칫거렸다.
“여기 계신 거 맞아?”
“몰라. 이 층에 있을 거라고 하긴 했는데.”
모아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함께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저, 여기엔 안 계시는 것 같아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보는 게 어때요?”
“아니야. 아빠가 분명 여기에 있을 거랬어.”
상황을 알고 있는 마샤가 조심스레 말려 봤지만 모아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마샤의 한숨이 깊어짐과 동시에 패트릭의 후회 역시 깊어지기 시작했다.
‘괜한 말을 해서는.’
패트릭이 카프지트에서 돌아온 이후 모아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마다 어딜 가는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저번처럼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모아의 불안을 자초한 건 자신이었기에 패트릭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자신이 어디에 가는지를 설명해 주곤 했다. 모아가 언제든 자신을 찾아올 수 있게.
‘근데 왜 하필 오늘.’
말이 길어진 나머지 예상보다 오래 이곳에 머무른 모양이었다.
패트릭은 서류 가방을 어깨에 메며 조심스레 프레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프레져에게서 불편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되게 깐깐하시다고 들었는데.’
그가 아는 헌티드 백작은 생각보다 무던한 성격인 것 같아 인지 부조화가 온 패트릭이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발소리와 말소리가 멀어졌다.
“조금 더 있다 나갈까요?”
“아닙니다. 더 늦게 가면 모아가 찾을 듯하니 차라리 지금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패트릭은 짧게 목례한 뒤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어? 아빠다!”
그리고 대각선 복도에 서 있던 모아와 떡하니 마주치고 말았다. 이에 패트릭은 황급히 열었던 문을 닫았다.
“모아, 왜 여기 있니?”
위층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쉿 하고 있으니까 아빠 목소리가 들리길래 살금살금 걸어왔어. 아빠도 살금살금 말하니까 모아도 살금살금!”
떨리는 패트릭의 목소리에도 모아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모아, 아빠는 찾아…… 어머, 패트릭! 여기 있었네요.”
“네. 오랜만입니다, 캐롤라인. 이렇게 괜찮아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감사해요. 저도 패트릭과 모아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뻐요.”
근데 이 감동적인 만남을 왜 하필 지금 해야 하는 걸까요. 패트릭은 관자놀이께에 흐르는 땀을 슬쩍 닦았다.
“그럼 다들 위층으로 올라가 볼-.”
“근데 압빠,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으, 응?”
“눈사람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는데.”
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아에 패트릭은 등의 땀이 홍수처럼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눈사람 아저씨라면……?”
모아가 프레져를 눈사람이라 부른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캐롤라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사람 아저씨는 글랜포드에 있지. 여긴 그레타인데 왜 계시겠어.”
“그래도. 분명히 들었는데에.”
캐롤라인은 몸을 틀어 미닫이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병원을 함부로 헤집고 다니는 게 무례인 줄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늦었군.’
여기서 헛소리를 했다간 캐롤라인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리라. 그렇게 생각한 패트릭은 모른 척 둘러대던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머지않아 벌컥, 문이 열렸다.
“프레져……?”
병실 안의 남자를 마주한 캐롤라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환자복까지 입고.”
프레져를 살피는 캐롤라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캐롤라인에게 고정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캐롤라인은 정신이 없어 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캐롤라인은 손등에 주사를 꽂은 프레져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패트릭, 마샤를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불현듯 어떠한 예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게 거짓말을 했군요.”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나만 빼고 다 알고 있었나 보네.”
프레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했을 때도 모두가 모른 척했다. 심지어 클리브와 이 병원의 대표인 니콜라이까지도.
달리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를 함구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공간에 떡하니 앉아 있는 프레져에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모아가 총총총 걸어 프레져의 앞으로 나가 섰다.
“눈사람 아저씨, 잘 지냈어요?”
“……그래.”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눈치를 살피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에 모아는 여전히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사 맞고 운 건 아니죠? 엄청 쓴 약도 잘 먹었고요?”
“주사?”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캐롤라인에 프레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모아, 그게 무슨 말이야? 주사는 뭐고 약은 또 뭔데?”
“우응, 눈사람 아저씨가 엄청 중요한 수술을-.”
“어휴, 우리 모아가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여기까지 찾아오고.”
모아의 말이 이어진 건 딱 거기까지였다. 모아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게 양 볼을 조물조물 주무른 패트릭은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황급히 아이의 입에 집어넣었다.
“어때? 맛있지?”
“웅. 마이따.”
“이거 엄마한테 가면 더 많이 있어.”
“진짜?”
“응. 우리 엄마한테 갈까?”
“좋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패트릭은 가방 들듯 모아를 옆구리에 낀 채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럼…… 마저 이야기 나누세요.”
마샤마저 자리를 비우자 병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창문 밖에서 들려온 새소리가 없다면 시간이 멈춘 줄 착각할 만큼.
오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프레져였다.
“미안.”
“뭐가 미안해요?”
“그냥 다.”
여태껏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제 와 시선을 피하는 프레져를 보며 캐롤라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글랜포드에 있다면서요.”
“…….”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요? 환자복은 뭐고 주사에 약은 또 무슨 소린데요?”
프레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로 니콜라이를 찾아갈까 잠시 망설이던 캐롤라인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제발 나한테 말 좀 해 줘요.”
“…….”
“뒤늦게 다른 사람 입 통해서 아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한 일인지 당신도 나도 잘 알잖아요.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 말에 프레져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고 수백 번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부부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프레져는 말하려 노력해 본 적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속내를 고백하려 마음먹었을 때는 캐롤라인과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진 뒤였다. 캐롤라인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인 게 전부였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 후회로 남는지 안다면 프레져는 입을 열어야 했다.
“……수술을 받았어.”
“무슨 수술이요?”
“심장 수술.”
“당신이 그걸 왜 받아요? 설마 그사이 병이라도 생긴 거예요?”
프레져는 심각한 표정이 된 캐롤라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니.”
“그럼 대체 왜요?”
“최종 실험 때문에.”
“…….”
“당신이 빨리 수술하려면 최종 실험을 거쳐야 한다잖아. 여러 문제로 복잡해 보이길래 그냥 내가 했어.”
“미쳤어요?”
캐롤라인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러나 프레져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을 느꼈다.
캐롤라인이 충격받을까 봐 진실을 숨긴다는 건 순전히 그의 이기심이었다. 그녀를 위한다는 이유로 또 그녀를 현실로부터 고립시킨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이런 걸 전혀 원치 않을 텐데.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어떻게 그런 짓을…….”
놀라 보이긴 했지만 쓰러질 정도의 충격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에 프레져는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거예요?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
캐롤라인은 자신의 걱정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몸이 좀 아플 뿐이지 마음은 자신보다 훨씬 단단했다.
그러니 그 지옥 같다는 곳에서 2년을 넘게 버텼겠지. 아내가 사라졌다고 환청을 듣는 자신 따위보다는 훨씬 강했다.
“어떡해. 정말 미쳐 버렸나 봐. 빨리 의사를…….”
프레져는 자리를 뜨려는 캐롤라인의 옷자락을 다급히 붙잡았다.
“아니야. 안 미쳤어.”
“그럼 왜 웃는데요.”
“그냥…….”
당신이 내 걱정을 조금은 해 주는 것 같아서. 이런 반응을 보니 수술을 받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프레져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삼킨 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