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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24)화 (124/156)

#124

“……그래서 왕실에서 마광석으로 만든 의수를 요청한다는 겁니다.”

“…….”

“백작님, 듣고 계십니까?”

“네. 듣고 있습니다.”

목을 앞으로 쭉 내밀고 묻는 패트릭에 프레져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져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그의 동업자인 패트릭에게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외부엔 패트릭이 프레져의 동업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상 마광석의 주인은 패트릭이었으니.

그리고 패트릭은 이 소식을 전할 겸 모아의 정밀 검사를 위해 마리아 병원에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시길래 그리 정신을 빼놓고 계신 겁니까?”

캐롤라인이 밖으로 나왔다는 말에 프레져 역시 오랜만에 병실을 나섰다. 혹여 캐롤라인의 눈에 들기라도 할까 멀찍이 거리를 둔 채였다.

옆에 클리브 헤이오스가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리 멀리서나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니, 그저 멀쩡히 살아 있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분명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프레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캐롤라인은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그 이후로 프레져는 계속 이 상태였다. 이런 스스로가 음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말을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했다.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보고 싶어 한다면, 만나러 가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흉통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요 며칠 동안은 잠잠하긴 했지만, 캐롤라인의 앞에서 아프면 낭패나 다름없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프레져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낸 뒤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국왕이 직접 연락해 온 겁니까?”

“아뇨. 1왕자 전하께서 요청하셨습니다.”

“필요하면 본인이 직접 찾아오면 될 것을 왜 아들을 부려 먹는지.”

예배당이 무너진 것은 글랜포드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성스러운 공간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대신관은 죽고 국왕과 왕자는 죽을 뻔했으니.

이에 사람들은 국왕의 행동에 신이 분노한 게 분명하다는 의견을 내었다.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방법을 금지하려는 것도 모자라 헌티드 백작을 벌하려고까지 했으니 분노한 신께서 국왕을 응징하려 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집회에 참여했던 귀족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이 죽으며 귀족들의 반발 역시 거세졌다.

집회에 참여했던 이들 중 대부분이 친왕파 귀족이었다. 국왕에게 잘 보이려다 변을 당했으니 이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금이 간 벽을 보고서도 자리를 지키라 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왕실에서 은밀하게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거절합시다.”

“예?”

감히 왕실의 청을 거절하라는 프레져의 말에 패트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광석이 가진 마나는 신력과 반대되는 힘입니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를 벌하겠다며 그 난리를 쳤는데, 내가 어떻게 폐하께 마광석을 상납한답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요.”

“게다가 왕실과 교단이 그렇게 반대하는 심장 수술에 쓰인 광석인데 말입니다.”

이는 핑계였다. 이미 글랜포드 교단과 국왕은 끝났다. 이 종교 분쟁 역시 조만간 프레져의 승리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이리 심심한 승리를 거머쥐고 싶지 않았다.

“패트릭, 나는 왕실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

“캐롤라인을 살릴 방법이 코앞에 있는데 왕실의 되도 않는 논리로 시기를 놓칠 뻔했습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가 무섭게 절망에 내던져졌다. 그것도 모자라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기까지 했다.

홀로 무섭고 아파했을 캐롤라인을 생각하면 당장 국왕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다니.

“이제 국왕에겐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청을 거절한대도 응징할 수 없겠죠. 모두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니까.”

그렇게 된 이상 프레져는 마음껏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이게 악랄한 마음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는 선인이 아니었으니.

“내 마음을 알겠습니까?”

프레져의 물음에 패트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번 사건으로 느낀 바가 많았다. 모아 역시 캐롤라인의 입장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

모아를 위해서라도, 후에 수술을 받을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패트릭은 프레져의 뜻을 따라야 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프레져는 잠시 침묵했다. 평민인 패트릭이 위험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은…….

“일단은 우리가 가진 자원이 마광석이라는 것부터 밝힙시다. 마력이 신력에 반대되는 힘이라는 것 역시 강조하고요.”

지금껏 신의 뜻을 앞세워 프레져를 방해했으니 신자원이 마광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멈칫할 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 것임을 프레져는 알고 있었다.

국왕은 겉치레에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팔을 잃게 됐으니 어떻게든 멀쩡해 보이는 팔을 얻기 위해 애를 쓰겠지.

“국왕이 마광석을 요구했다는 것 역시 함께 밝히도록 하세요.”

국왕의 이기적인 면모를 알게 된 사람들은 분노할 것이었다. 신의 뜻을 이유로 반대할 때는 언제고, 자신이 아프니 프레져를 찾는 게 간사하지 않은가.

이 과정에서 종교 분쟁은 자연스럽게 끝날 터였다. 그러면 캐롤라인은 무리 없이 로우밸리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아름다운 계곡이 흐르고 들판에 풀꽃이 만발한 곳. 그 아름다운 곳의 봄을 캐롤라인에게 보여 주기로 약속했으니, 프레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글랜포드로 돌려보내야 했다.

* * *

“캐롤라인, 마샤!”

“모아, 오랜만이야.”

캐롤라인의 품에 안기기 위해 우다다 달려가던 모아는 그녀에게 닿기 직전 급하게 옆으로 몸을 틀었다.

“아코!”

갑작스레 방향을 튼 탓에 모아는 침대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모아, 괜찮아?”

“우응.”

“왜 갑자기 방향을 바꿔선.”

“캐롤 아프잖아. 막 안기면 안 된댔어.”

빨개진 코를 문지르며 말하는 모아에 캐롤라인은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울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이젠 걱정 안 해도 돼. 앞으론 아플 일 없을 거거든. 몇 밤만 더 지나면 모아가 막 뛰어와서 안겨도 괜찮아.”

“정말?”

“응. 앞으로 건강해질 일만 남았다고 클리브 선생님이 그랬어.”

“다행이다!”

모아는 팔을 활짝 벌려 캐롤라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캐롤라인이 맨날 맨날 잠만 자길래 걱정했어.”

“……그랬구나. 미안해.”

“잠꾸러기! 이젠 늦잠 자면 안 돼. 알았지?”

“응.”

캐롤라인은 해사하게 웃는 아이를 마주 보며 따라 웃었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자란 아이의 잇몸에는 옥수수처럼 조그만 앞니가 나 있었다.

“앞니 많이 자랐네?”

“웅. 눈사람 아저씨가 마시멜로 붙여 줬더니 이가 자랐어. 이젠 발음도 안 새.”

“눈사람? 마시멜로?”

알 수 없는 말을 읊는 모아를 보며 캐롤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엔 대충 좋은 뜻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마랑 아빠는 어디 계셔? 인사하고 싶은데.”

“엄마는 클리브 선생님이랑 있고 아빠는…… 어디 갔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는데.

폴짝, 침대에서 뛰어내린 모아는 패트릭을 찾아 복도 곳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사라졌다!”

모아가 양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말하자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캐롤라인은 킥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랑 같이 찾으러 갈까? 이 근처에 계실 거 아니야.”

“웅! 아빠 찾으러 가자!”

캐롤라인은 모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샤도 가자. 오랜만인데 인사해야지.”

“아, 네. 그래야죠.”

마샤는 초조한 듯 입술을 씹다 두 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패트릭이 프레져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 * *

결국 국왕은 팔을 절단했다. 물론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는 새까맣게 썩은 팔이라도 붙들고 있고자 했으나 그랬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왕국 각지의 유능한 외과 의사들이 수술에 참여했으나 괴사한 부위를 떼어 내는 덴 아주 오랜 시간이 들었다. 수술 부위가 잘 지혈이 안 됐을뿐더러 약물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폐하께서 ‘그런’ 약물에 손댄 건 아니실지…….”

“콘월 후작과 친분이 있는 것도 조금…….”

의사들이 조심스레 전한 말에 데본은 침음을 삼켰다.

연일 이어지는 시위와 귀족들의 반발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제 아버지는 제게 최악의 최악까지 보여 줄 심산인 모양이었다.

데본은 일단 의사들에게 축객령을 내린 뒤 국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끔찍하구나. 끔찍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국왕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데본은 서둘러 국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외팔이 된 제 모습을 비춰 보고 있었다.

“폐하, 흥분은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 부디 고정하십시오.”

“고정? 지금 고정이라 했느냐? 지금 내 꼴을 봐라!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는지!”

수술 이후 국왕은 매일 이런 상태였다. 거울을 보고 성을 냈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일의 반복이었다.

궁의는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내렸으나 국왕은 듣지 않았다.

“이런 모습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가 상상한 권위 있는 군주의 모습에 외팔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국왕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는지 데본의 옷자락을 잡았다.

“허, 헌티드 백작에게 연락은 해 보았느냐? 그자가 가진 게 마광석이라면서?”

“…….”

“마광석은 신묘한 힘을 가진 돌이 아니더냐. 그자라면 마광석으로 잘린 팔을 복구할 방법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폐하, 잘린 팔을 다시 붙일 수는 없습니다.”

“고장 난 심장도 고치는데 팔은 왜 못 고친단 말이냐! 왜!”

이성을 잃은 국왕이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그의 머릿속엔 자신이 프레져를 궁지로 몰고 갔다는 사실은 남아 있지 않았다.

데본은 그런 국왕을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의수 제작 정도야 의뢰할 순 있겠지요.”

“의수, 의수라…….”

“하지만 그 전에 폐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마광석을 쓰고 싶으시거든 헌티드 백작에게 먼저 사과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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