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23)화 (123/156)

#123

“폐하! 어디 계십니까!”

왕성은 그야말로 공황에 빠졌다. 루미아르당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국왕과 2왕자가 예배당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왕성의 모든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멀쩡히 걸어 나온 사람이라곤 예배당 뒤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출입문과 가까울뿐더러, 앞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무너졌기에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이었다.

“왕자 전하!”

기사들은 빠져나온 이들의 말을 토대로 국왕과 제럴드가 있을 만한 곳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예배당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었단 말인가?”

“폐하께서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셔…….”

“…….”

“폐하의 명에 따르지 않은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명을 따랐다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생존자의 증언을 들은 데본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터트렸다. 아버지의 명만 아니었다면 이리 많은 사상자가 나오진 않았을 텐데.

“됐네. 자네도 충격이 클 테니 일단은 돌아가서 쉬도록 하게.”

국왕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이는 현재로선 데본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비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지만.

“비라도 그치면 수월할 것을.”

이전보다 빗줄기가 약해지긴 했지만 비는 여전히 쏟아지는 중이었다. 수색이 난항을 겪는 것은 당연했다.

“폐, 폐하를 찾았습니다!”

벽돌 더미에 깔린 국왕을 찾아낸 것은 예배당이 무너진 지 꼬박 반나절 만의 일이었다.

* * *

“오늘은 좀 걸어 볼까요?”

“네, 좋아요.”

클리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캐롤라인은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따끔거리던 가슴의 고통은 어느샌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의료진들의 관찰과 애런과 마샤, 에릭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 캐롤라인의 몸은 빠르게 호전을 보이고 있었다.

“이젠 잘 걷네요.”

“네. 꿰맨 곳이 불편한 걸 빼면 다 괜찮아요.”

살이 쓰라린 것쯤이야 이전에 아프던 것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이렇게 건강해진 몸을 얻을 수 있다면 똑같은 상처를 열 개쯤 더 달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만큼 캐롤라인은 현재의 몸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가슴의 실밥은 내일 중으로 풀 거예요. 그러면 움직이기 더 편할 거고요. 불편하지 않게 여자 선생님을 보낼게요.”

“감사해요.”

“내일 실밥을 풀고 나서 다시 검사를 받을 거예요. 이후 문제가 없다 싶으면 약도 천천히 줄일 거고요.”

“……검사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인공 판막이 심장에 잘 적응했는지 확인하려는 거니까요. 지금까지 경과로 본다면 틀림없이 멀쩡할 거예요.”

클리브가 건넨 말에 긴장한 듯 굳어진 캐롤라인의 얼굴이 스르르 풀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달라진 몸을 느껴 보았다.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에 몸이 무겁긴 했지만 이전에 느껴지던 불안정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숨이 찬다든지, 느닷없이 심장이 두근거린 적도 없었다. 가슴께가 살짝 뻐근하긴 했지만 이는 수술 상처가 아물면 해결될 것이라 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런 몸으로 살아 본 적이 언제였더라.’

분명 하루 종일 언덕을 내달려도 숨이 차지 않는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까마득해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시 뛰어다닐 수도 있겠죠?”

“그럼요. 당장은 어렵겠지만요.”

다시 뛸 수 있다. 그 별것 없는 말에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영원히 못 할 줄 알았어요. 뛰는 것도 사는 것도.”

다시 살아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지금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다니. 더 이상 고통에 헐떡이지 않아도 된다니.

무심코 신에게 감사를 표하려던 캐롤라인은 글랜포드를 떠나기 전 불거졌던 문제를 떠올리곤 다급히 모았던 손을 풀었다.

‘신한테 감사는 무슨.’

자신은 그 엄격한 신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프레져 역시 교단과의 일을 해결하느라 꽤나 골머리를 앓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감사는 신이 아니라 프레져한테 해야 하는데.’

수술 연구를 지원한 사람도 프레져, 최종 실험을 해결한 사람도 프레져, 글랜포드의 교단과 맞선 이도 프레져.

결과적으로 자신을 살게 만든 이는 그였다. 밉지만 고마운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지금 글랜포드에 있다고 했지.’

듣자 하니 아직도 교단과의 분쟁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게 새 삶을 안겨 준 것도 고마운데, 자신 때문에 교단과 싸우고 있을 프레져를 떠올리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야 클리브의 권유대로 그레타에 망명하면 된다지만 프레져는 아니었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이 글랜포드에 있지 않은가. 잘못했다간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교리란 이름하에 빼앗길지도 몰랐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난 영영 글랜포드에 돌아갈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된다면 프레져에게 말을 전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었다. 프레져는 어떻게든 글랜포드에 남으려 할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캐롤라인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는 걸 본 클리브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프레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교단과 왕실이 힘을 합치면 그 사람이라도 빠져나가긴 쉽지 않을텐데.”

“음, 근데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난처한 듯 목덜미를 문지르며 입을 여는 클리브에 캐롤라인은 아래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 글랜포드 왕실이 심장 수술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거든요.”

* * *

국왕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잔해에 깔리기 직전, 국왕을 보호하듯 끌어안은 보좌관 덕이었다. 제 목숨을 바쳐 왕을 살려 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왕의 몸은 온전하지 못했다. 몸 곳곳엔 긁힌 상처가 가득했고 반나절 넘게 비를 맞은 탓에 극심한 저체온증까지 온 상태였다. 게다가 벽돌 더미에 깔려 있던 오른쪽 팔은 회생 불가능한 정도가 되어 있었다. 다리와 코뼈가 골절된 제럴드가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였으니.

“폐하는 괜찮으신가?”

“체온은 정상으로 돌아오셨으나 여전히 기침이 줄질 않으십니다. 어째서인지 제법 강한 약물을 썼는데도 좀처럼 듣질 않고……. 다행히 고비는 넘기셨으니 안정을 찾으실 때까지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매달린 궁의들 덕에 제럴드는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그러나 국왕은 아니었다. 팔팔한 20대 청년인 제럴드와는 달리 국왕은 늙은이였으니.

“팔은? 팔은 치료할 수 있는가?”

데본의 다급한 물음에 궁의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에 궁의의 어깨를 쥐고 있던 데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처치를 하긴 했지만 괴사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그 말은…….”

“최후의 상황엔 팔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데본은 말없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궁의 역시 최선을 다해 보겠다 했지만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송구하지만, 네. 현재로선 방도가 없습니다.”

“하…….”

“팔을 복구할 방법보다는 폐하께서 편히 사용하실 수 있는 의수를 제작하는 쪽이…… 더 나을 거라 판단됩니다.”

궁의는 데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국왕에게 했다면 경을 쳤을 말이었으나 데본은 그러지 않았다.

“일단은 알겠네. 그대도 많이 피로할 테니 이만 들어가 보게.”

데본은 본디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었다. 궁의에게 축객령을 내린 그는 서둘러 국왕의 침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누워 있는 국왕이 보였다.

“오, 데본.”

고비를 넘겼다는 말이 사실인지 국왕은 데본을 단번에 알아보는 데 성공했다. 데본은 국왕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배당은, 어, 떻게 되었느냐?”

“세족실을 제외하곤 전부 무너졌습니다. 나머지도 붕괴될 가능성이 커 병사들이 철거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 그러면 집회를, 할 곳이, 없는데…….”

“…….”

“대, 대신관은, 어떻게 되었어?”

“송구하오나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숨을 헐떡이면서도 프레져를 벌할 생각만 하는 국왕에 데본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헌티드 백작을 견제할 때던가. 몸이 더 회복되면 말하려 했건만, 결국 데본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리에 참여한 이들 중 절반이 죽었습니다.”

“저, 절반이나?”

“네. 귀족들은 물론이고 신관들과 어린 사제들까지 피해를 보았습니다.”

“내 뜻을, 지지해 줄 이들이, 절반이나, 죽었다는 게냐?”

“폐하.”

끝까지 저만을 생각하는 국왕에 데본은 탄식하고 말았다.

이는 데본이 왕위를 잇지 않겠다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배다른 동생을 데려와 어머니를 쓰러지게 만들어놓고서는. 욕심에 눈이 멀어져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은 제 아버지의 오랜 고질병이었다.

게다가 통치도 엉망, 백성과 신하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엉망이니. 데본은 이리 엉망으로 세워진 나라에 군주로 군림하고 싶지 않았다.

“……나가 보겠습니다. 이만 쉬십시오.”

데본은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할 말이 산더미였지만 상대가 환자라는 것을 생각해 겨우 참아 냈다.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분노한 귀족들에게 사과하는 것, 더욱 거세진 시위를 잠재우는 것, 또 국왕이 쓸 의수를 제작하는 것.

거기까지 생각한 데본은 프레져가 지원했다는 인공 판막에 대해 떠올렸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신자원과 더불어, 귀족들 사이에 알음알음 들려오는 인공 치아에 대한 이야기도.

제 아버지가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으나 지금으로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헌티드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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