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캐롤라인은 아주 오랫동안 꿈을 꾸는 중이었다. 설익은 햇살이 아름다운 어느 늦겨울, 별채에 가 피아노를 치는 꿈이었다.
“흰 건반 7개가 차례대로…… 도레미파솔라시도였나?”
헌티드하우스의 단원이 스치듯 일러 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둔 것이었다.
“그러면 검은 건반은 뭐라고 부르지?”
도레미파솔라시도. 혀가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는 발음들이었다. 분명 검은 건반에도 이것만큼 예쁜 이름이 있겠지, 생각하며 캐롤라인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제일 왼쪽에 있는 건반을 누르자 무겁고 낮은 소리가, 맨 오른쪽에 있는 건반에서는 높으면서도 맑은 소리가 났다.
“구두장이의 노래를 연주하고 싶은데.”
‘구두장이의 노래’는 남부 지방의 전통 민요로, 그녀의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곡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경쾌하게 통통 튀는 멜로디는 꼭 로우밸리에 있는 계곡을 떠올리게 했다.
“이 구두를 신고 먼 길을 걸어왔지.”
캐롤라인은 마음 가는 대로 건반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계이름은 모르지만 건반을 몇 번씩 두드리며 음을 맞춘 덕에 선율은 원곡과 제법 비슷했다.
“아름다운 나의 고향, 맑은 물소리가 흐르는 곳.”
그저 피아노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프레져는 대체 왜 별채에 걸음하지 않는 걸까? 캐롤라인은 피아노를 치며 계속 생각했다.
왕국 최고 극단의 주인이니 음악에도 당연히 조예가 깊을 텐데. 취미로 악기 연주는커녕 그 흔한 콧노래 한번 부르지 않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다.
“그 기다란 손으로 피아노를 치면 참 예쁠 텐데.”
그러나 프레져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와 캐롤라인은 갈라서기로 했으니까.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캐롤라인은 건반 위에서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부드럽게 연주되던 음악이 토막 난 것처럼 뚝 끊겼다.
“……이젠 여기서 나가야 하는구나.”
후원에 쏟아지던 따스한 햇살도, 별채에서 한가롭게 피아노를 연주하던 순간도 모두 지워야 하겠지. 프레져는 이 드넓은 저택에서, 캐롤라인은 자신이 새로이 도착하게 될 곳에서 각자의 미래를 꾸려야 할 터였다.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음먹었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뭐가 이렇게 아쉬운 걸까.”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신발 밑창에 풀이 붙어 있는 기분이었다.
이 저택에서 보낸 모든 순간이 불행했다. 그렇기에 가져갈 추억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른 척 외면하기엔 아까운 것들이 있었다. 마치 이 피아노처럼.
캐롤라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피아노 덮개만 쓰다듬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 건 그때였다.
‘봄이 오고 있어.’
봄. 듣기만 해도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단어에 캐롤라인은 창문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쏟아지는 햇빛이 환했다.
아직 늦겨울인데, 벌써 봄이 찾아온 걸까?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이 와.’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내가 좋아하는 계절을 알고 있는 걸까? 당신은 나를 어디까지 알고, 또 어디까지 모르고 있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캐롤라인은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창문을 열기 전까지 바깥 풍경을 보여 주지 않을 생각인 듯, 창문은 불투명해서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이 창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찰나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한아름 피워 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목이 메는 듯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꽃이 피면 그땐 꼭 보자.’
목소리는 거기에서 끊겼다. 머지않아 창틈으로 상쾌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이에 캐롤라인은 옅게 미소 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잔뜩 피워 놓았다는데 안 볼 수가 있나.
캐롤라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한풀 부드러워진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눈부신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람에 은은하게 풍겨 오는 딸기와 오디 향을 느끼며 캐롤라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캐롤라인, 괜찮아? 정신이 들어?”
“…….”
눈을 뜬 캐롤라인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애런의 얼굴이었다. 그 옆엔 클리브가, 그다음엔 클리브와 닮은 얼굴을 한 중년 남성이 보였다.
“여긴 그레타의 마리아 병원이야.”
애런은 캐롤라인의 손을 잡으려다 그녀의 손등에 주사가 꽂혀 있는 걸 보곤 손을 거뒀다.
“캐롤라인, 너 살았어.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된대.”
무슨 뜻이냐는 듯, 캐롤라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애런을 응시했다. 아직 제대로 말할 기력이 나질 않았다. 이에 애런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을 이었다.
“네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너 수술 성공했어. 그래서 이렇게 그레타에 있는 거야.”
“!”
캐롤라인의 눈이 일순간 커다래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가슴께에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에 느껴지던 흉통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아프다기보단 그 위를 덮은 살갗이 쓰라린 느낌이랄까.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상처가 회복되려면 멀었습니다.”
니콜라이의 말에 캐롤라인은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거길 가르고 수술한 거야. 그래서 상처가 다 아물기 전까진 아플 거래.”
얇은 환자복 위로 오돌토돌한 실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실밥 아래로 평소보다 빠르게 박동하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 아프면 돼. 그러면 너 이제 아플 일 없어. 죽을 날까지 얼마나 남았나 세지 않아도 된다고.”
아프다. 그런데 살아 있다.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바보야, 왜 울어. 이 좋은 날에.”
애런은 캐롤라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쳤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속눈썹 역시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분명 그때, 수술, 아직 못 한다고…….”
캐롤라인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번에 눈을 뜬다면 그곳은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 군데일 거라 생각했는데.
“헌티드 백작님이 나서서 일이 빨리 해결됐어.”
“어떻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캐롤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런은 동생이 놀라지 않게끔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는데, 백작님이 나선 덕에 최종 실험이 빨리 끝났대. 거기서 발견한 문제점을 개선해서 바로 너한테 수술한 거고.”
“정말?”
“응.”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동생이 충격을 받기라도 할까 봐 애런은 프레져에 대한 말을 최대한 아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거라면 상처가 낫기 전까지만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건강하게 낫기만 하면 돼.”
애런은 콕콕 찔리는 양심을 외면하며 태연한 척 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어?”
프레져를 찾는 듯 캐롤라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글랜포드에 있지.”
프레져 역시 아픈 모습을 캐롤라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지, 의사들에게 요청해 다른 곳으로 병실을 옮긴 상태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캐롤라인이 저를 찾는다면 수도에 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 일이 없기는 무슨.
캐롤라인은 이미 쓰러지기 직전에 프레져를 만나러 간 전적이 있었다. 그런 애가 프레져를 찾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동생의 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살리기 위해 멀쩡한 제 심장까지 바친 사람이었다.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애런은 프레져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나중에 하자. 글랜포드에 돌아가면 그때 해.”
“응.”
“이제 말 그만하고 좀 쉬어. 수술 경과는 차차 설명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캐롤라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의료진 역시 한 명을 빼고 전부 자리를 비웠다.
주위가 한산해지고 나서야 캐롤라인은 병실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왜? 뭐 찾는 거 있어?”
“창문, 좀.”
“응. 열어 줄게.”
애런은 후다닥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정오의 따스한 햇빛이 병실 안으로 쏟아졌다.
“날씨 좋지? 너 쓰러져 있는 동안 겨울 다 지나갔어. 그레타는 아직 좀 춥긴 하지만…….”
이후로도 애런이 계속 말을 걸었지만 캐롤라인은 귀담아듣지 못했다. 창밖에 펼쳐진 풍경 때문이었다.
겨울보다 푸르른 하늘, 옅은 색을 입은 정원, 겨울잠에서 깬 다람쥐와 들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들. 유독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간 자리엔 생동감 넘치는 계절이 찾아와 있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돋아난 새하얀 목련 꽃봉오리.
‘로우밸리엔 아이스크림을 닮은 목련이 많다며.’
당신이 말한 봄이 이런 거였구나.
캐롤라인은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꽃송이를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피워 놓겠다고 했던 게 이거였어.’
이제 막 봄이 시작되려는 계절, 캐롤라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을 선물 받았다.
* * *
“정말 안 가 보셔도 됩니까?”
“그래.”
프레져의 단호한 대답에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 변화가 드문 에릭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고생을 하셔 놓고 왜 그러십니까.”
“이 꼴을 캐롤라인에게 보일 순 없으니까.”
프레져는 이제 막 실밥을 푼 상태였다. 상처는 잘 아물었고 몸 역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지만 흉통이 문제였다.
초반에 비해 나타나는 빈도가 줄긴 했지만 방심해서는 안 됐다. 캐롤라인의 앞에서 흉통이 일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그녀의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애런에게 자신이 수술 성공에 협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터였다. 괜한 모습을 보여 그녀를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캐롤라인이 마음을 썼던 건 지난 세월이면 충분했다. 그녀가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됐다. 너도 그만 얼쩡거리고 나가라.”
“……알겠습니다.”
에릭이 병실을 나섬과 동시에 프레져는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엔 서류와 함께 로겐이 전해 온 서신이 들어 있었다.
서신에 쓰인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프레져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이내 그는 서신을 내려놓은 채 탄식했다.
“결국은 그렇게 됐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