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21)화 (121/156)

#121

“수술은 잘됐습니까?”

애런의 성급한 물음에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다행…….”

다리에 힘이 풀린 애런은 감사의 인사를 전할 새도 없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니콜라이도 프레져도 지친 건 마찬가지라 다들 애런을 부축하거나 하진 않았다.

“꼬박 다섯 시간이 걸린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을 처음으로 받은 프레져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시간이었다. 캐롤라인의 몸이 좋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수술 중에 한 번 고비가 찾아오긴 했지만 잘 넘겼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제 환자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애런이 벌떡 일어나 니콜라이의 손을 붙잡았다. 프레져 역시 니콜라이에게 다가가려 했다.

“정말 감사…….”

“백작님!”

“헌티드 백작!”

말을 끝맺기도 전에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프레져는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젠 캐롤라인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어, 또 그녀의 고통을 제가 느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프레져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 * *

시위대는 맞은편에 선 이들을 당황스런 얼굴로 응시했다.

“지금 저거…… 군대입니까?”

성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타난 이들은 전부 갑옷과 함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전쟁 한번 일어나지 않는 시기에 무장한 군인들을 보니 당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군인들 역시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국왕 직속 부대인 만큼 1부대 소속 군인들은 전부 기사 작위를 받은 이들이었다. 약한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기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란 뜻이었다.

무장조차 하지 않는 일반인을 상대로 칼을 겨누는 건 기사도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이런 심심한 일을 진압하는 데 부대를 풀다니. 나름 실력 있는 자들만 모아 둔 1부대로서는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국왕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1부대의 대장 로이사르는 경직된 시위대를 향해 말을 이끌고 다가섰다.

“이쯤 하고 해산하십시오. 소란이 계속된다면 힘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비무장 시위대를 상대로 칼이라도 뽑겠다는 겁니까?”

칼을 뽑는다. 그 위협적인 단어에 시위대 맨 앞줄에 선 사람들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국왕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공포 앞에서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주춤하는 건 잠깐이었다.

“왕실을 알면 알수록 더욱 끔찍한 곳이군! 무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군대를 풀다니!”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의 외침에 시위대의 표정이 일순간 바뀌었다.

“무능한 왕실!”

“이젠 죄 없는 평민까지 죽일 셈인가!”

“살인이야말로 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지!”

비바람은 점점 거세져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기어코 군대를 푼 국왕을 비난하는 목소리만 더욱 커져 가고 있었다.

이에 1부대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쉰 뒤 뒤편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칼을 들어라.”

“네?”

부대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칼을 들라고 했다.”

“로이사르 님, 시위대는 무장은커녕 방패 하나 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폐하의 말에 불복종하라는 말이냐? 우리가 섬기는 건 글랜포드 왕실이다.”

“…….”

“나도 진심으로 저들을 벨 마음은 없다. 적당히 겁만 주면 알아서 도망가겠지.”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대장에 기사들은 마지못해 칼을 빼 들었다.

“열을 셀 동안 물러서지 않으면 베겠소!”

행렬 앞에 서 있는 기사 하나가 작은 나팔을 들어 올렸다. 이 나팔이 열 번 울릴 때까지 시위대가 해산되지 않으면 본보기로 몇 명만 잡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쿠구궁.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대장, 뒤쪽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에 대장은 부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예배당이 무너졌다!”

우뚝 솟아 있어야 할 첨탑이 무너지고 있었다.

* * *

“헌티드 백작은 기어코 교리를 어기고 말았습니다.”

대신관이 열변을 토하는 타이밍에 맞춰 국왕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본은 당연히 불참했고 왕비 역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왕비는 제럴드가 국왕에게 내쳐진 이후 자주 두통을 호소하곤 했다. 국왕 옆의 왕족이라곤 제럴드가 전부였다.

“기도하십시오. 오직 기도만이 우리에게 답을 내려 줄 것입니다.”

프레져의 죄목이 결정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이 오랜 기도가 끝나고 나면 대신관은 약속했던 대로 헌티드 백작의 국외 추방을 추진할 것이었다. 국왕이 해야 할 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다들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세요.”

대신관의 지시하에 예배당 안의 모든 이들이 눈을 감았다. 넓은 예배당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주위가 얼마나 고요한지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집중을 깨뜨리는 소리는 그때 들려왔다.

뚝. 뚝.

굵은 빗방울과 양동이가 만나 듣기 거슬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예배당 안이 지나치게 조용한 탓에 더욱 크게 느껴졌다.

“…….”

프레져 헌티드, 제발 그 인간을 없애 달라 기도하던 국왕은 이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그래도 심사가 뒤틀려 있는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이 가뜩이나 예민해진 심기를 건드렸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국왕 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신관 중 하나가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갔다.

“거슬리는군.”

다섯 음절에 불과한 말이었으나 신관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신관이 눈짓하자 구석에 서 있던 어린 사제들은 사다리와 걸레를 들고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고개를 드십시오. 이제부터…….”

주위가 시끄러워질 것을 예상한 대신관은 자연스럽게 다음 차례로 순서를 넘겼다. 이윽고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며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라, 빨리!”

“예!”

“시끄럽게 하진 말고.”

어린 사제들은 신관의 눈치를 살피며 물이 새는 곳에 사다리를 받쳤다. 다행히 모퉁이 쪽이라 커튼을 넓게 치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덩치가 작은 소년 한 명이 사다리를 지탱하고 그 위를 가장 키가 큰 소년이 올라섰다, 나머지 한 명은 그들 옆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해 주는 역할이었다.

“우리 힘으론 안 될 것 같은데…….”

사다리에 오른 소년이 기둥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소년의 팔은 제법 길었음에도 높은 천장까지 닿는 덴 무리가 있었다.

“신관님, 안 될 것 같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따로 목수를 부르는 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소년은 국왕을 가리키며 무서운 표정을 짓는 신관을 보곤 다시 사다리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쉰 뒤 사다리를 잡고 있는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팔이 안 닿아서 그런데 사다리 좀 오른쪽으로 밀어 봐라.”

“이, 이렇게요?”

“아니. 너무 갔어. 다시 왼쪽으로.”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사다리는 꼭대기에 소년을 태운 채 위태롭게 흔들렸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소년은 발판 위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신관님께 혼이 날 바엔 차라리 다치는 게 낫지.’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새 천장은 까치발을 들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조금만 더…….”

물수건을 쥔 손이 빗물 구멍에 닿기 직전이었다.

“으악!”

소년의 비명과 함께 사다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소년의 마른 어깨는 벽의 금이 간 부분에 닿고 땅으로 추락했다. 사다리 역시 소년이 움직인 궤적을 따라 벽으로 곤두박질친 뒤 바닥에 떨어졌다.

“아악!”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예배당 안의 모든 이목이 어린 사제들에게로 집중했다. 대신관과 국왕의 눈총이 따라붙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이놈들!”

이에 신관은 성난 얼굴을 한 채 소년들에게 다가왔다.

“내가 조용히 해결하라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거늘!”

“시, 신관님!”

“하루 종일 굶어야 정신을 차릴 게냐?”

신관은 덜덜 떨고 있는 소년들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소년들이 겁에 질린 이유는 신관 때문이 아니었다.

“벼, 벽이…….”

“핑계 댈 생각일랑 말아라! 너희 셋 모두…… 음?”

호통을 치는 신관의 머리 위로 길고 굵은 물줄기가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이에 신관은 소년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벼, 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다리가 찍혔던 곳을 기준으로 생긴 균열은 머지않아 점점 커져 가기 시작했다. 소년의 외침을 시작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 역시 하나둘 이상함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예배당이 무너지고 있대요!”

“지금 당장 여길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아직 앉아 계시는데…….”

귀족들은 뛰쳐나가려다 말고 국왕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국왕은 제럴드의 팔을 꽉 붙든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폐하, 루미아르당이 무너지고 있답니다. 어서 여길 뜨셔야 합니다!”

보좌관이 애타게 국왕을 불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왕은 뿌득, 하고 이를 한 번 간 뒤 자리에서 일어서서 외쳤다.

“다들 자리에 앉게.”

“하지만 폐하!”

“짐이 갖은 공을 들여 지은 건물이 이 루미아르당이네. 겨우 빗물 좀 샌다고 무너질 곳이 아니니 소란들 그만 떨고 자리에 앉지. 감히 신성한 예배 시간을 방해할 생각인가?”

“벽에 금이 갔다고 합니다. 비까지 오는데 이대로 건물이 무너지면 저희는 다 죽습니다!”

“이곳은 신의 가호가 내린 예배당이네. 그리 쉽게 무너질 리 없다는 건 이 나리의 왕인 내가 보장하지.”

국왕의 호통에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물론 찰나를 틈타 도망간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왕명을 거스르고 도망친 이들은 내가 전부 엄벌에 처할…….”

그러나 국왕의 호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 무너진다!”

결국 예배당 천장이 빗물에 쓸려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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