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19)화 (119/156)

#119

“기어코 수술을 하다니!”

국왕은 분노했다. 캐롤라인이 그레타로 갔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프레져 헌티드, 그 작자가 수술을 받아? 이런 미친놈 같으니라고!”

프레져가 터트리고 간 장부를 수습하느라 국왕은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럴수록 프레져에 대한 국왕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수술을 못 하게 하는 건 기본에 조그만 책이라도 잡히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떤 인간이 멀쩡한 가슴을 가른단 말이냐!”

최종 실험에 쓸 다른 환자를 구할 거라 생각했다. 최종 실험을 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점검 없이 바로 캐롤라인에게 수술을 시행할 줄 알았다. 전자라면 생명 윤리를 이유로, 후자라면 종교적인 이유로 프레져를 벌할 수 있었다.

근데 그는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택을 내렸다.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에 제 심장을 내던지는 미친놈이라니!”

프레져가 그레타에 있다는 것을 샤를리즈는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언질 한 번 해주지 않다니.

“젠장!”

국왕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았다. 만년필 옆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미천한 년 하나 살리자고 내게 이런 수모를…….”

제럴드의 비밀 장부가 세상에 공개되며 왕실엔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횡령한 돈을 내놓으라는 말부터 시작해, 이 모든 것을 묵인한 국왕을 끌어내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남몰래 야학을 운영하던 이들은 왕실의 해체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네놈 때문에 내가 무슨 수모를 겪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송구합니다.”

분노한 국왕 앞에서 제럴드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국고는 제가 어떻게든 채워 두도록 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기껏 사람 같은 소리를 하는 제럴드에게 국왕은 버럭 화를 냈다.

“네가 횡령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거냐?”

“…….”

“그럼 왕실의 권위는? 네놈이 국고를 탕진하는 동안 내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게냐? 내게 돌아갈 책임은 생각하지 못해?”

제럴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를 가는 중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있는 국왕의 호출이었다. 제럴드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근신령이 풀린 줄로만 알았다.

지금이라도 국왕에게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사업을 지지해 줄 귀족들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장부가 공개돼 버리다니.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합니다.”

“후…….”

국왕은 전보다 기세가 죽었음에도 결코 입을 다물지 않는 제럴드를 탐탁지 않게 쳐다봤다.

1왕자 데본이 왕위를 이을 뜻이 없음을 밝혔으니, 왕세자 자리는 자신에게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건방지게도.

데본은 친어미를 닮아 명석했다. 제럴드가 그의 반만 닮았어도 이런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 텐데. 제럴드를 보고 있으면 정말 제 피를 이은 자식이 맞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평민의 피가 섞였으니 당연한 건가.’

“지금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 아느냐? 네가 가짜가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다.”

“가짜라 함은…….”

“네가 내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단 말이다.”

매사 조용하고 행실이 바른 1왕자와 제럴드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왕의 핏줄이라면 응당 명석해야 하거늘, 제럴드는 왕자라 하기엔 모자라지 않은가?

게다가 제럴드는 왕이 밖에서 낳아 온 사생아로 그 어미는 평범한 찻집 종업원이었다. 그의 아비가 국왕일지, 아니면 현 왕비의 정인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뭐든 한번 물을 타기 시작하면 사실이 되는 세상인데?”

국왕은 냉정한 눈으로 제럴드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해야 왕실의 무너진 명예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애초에 제럴드가 아니라면 이리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저놈을 아들이라고 감싸 줄 이유가 있나?

“차라리 네가 내 아들이 아니게 되면 되겠구나.”

“네……?”

충격적인 말을 뱉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여상해서 제럴드는 잠시 멍해졌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폐,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폐하의 아들입니다. 그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폐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아느냐? 그건 내가 아니라 네 어미가 알겠지.”

“어머니께서는 그런 일을 저지를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폐하의 자식이 아니면 대체 누구의 자식이란 말입니까!”

“흐음.”

왕비를 들먹이는 제럴드에 국왕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제럴드가 왕실의 손이 아니게 되면 왕비마저 벌해야 할 테니 번거로운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왕실의 평판이 깎이는 건 피차 마찬가지고.’

사생아를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 그게 제 친자식인지 구분하지도 못하는 왕이라는 오명이 붙을 터였다.

“이를 어찌한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국왕에 제럴드는 조아리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헌티드 백작이 수술을 받았다지 않습니까. 왕실과 교단의 명을 어기고 기어코!”

이 길을 빠져나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미 그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아직 죄를 짓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늦었다면 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말이 맞다.”

제럴드의 말이 흥미로운 모양인지 국왕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프레져가 제게 수모를 선사한 것도 모자라 제 눈을 따돌렸다는 사실에 분노해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교단을 설득하긴커녕, 몰래 그레타로 가 수술을 받았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해선 안 된다는 생명 윤리와 신의 뜻을 모두 무시한 것이었다.

“오히려 일이 쉬워졌어.”

차라리 죽어 버렸다면 일이 더 쉬워졌겠지만 지금 상황도 나쁘지는 않았다.

국왕은 간만에 쓸모 있는 말을 한 제럴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기회를 유연하게 넘길 좋은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네가 왕실에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이미 왕세자 자리는 물 건너 갔다. 국왕이 자신을 버리겠다 말한 마당에 왕실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터였다.

“말씀하십시오.”

‘프레져 헌티드만 무너뜨리면 된다.’

제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나와 함께 루미아르당에 가야겠어.”

* * *

애런은 눈을 감은 캐롤라인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푹 자고 일어나. 그러면 다시 건강해져 있을 테니까. 아파도 잘 참을 수 있지?”

오늘은 캐롤라인이 고대하던 수술을 받는 날이었다.

먼 길을 떠나 온 영향이 컸는지 캐롤라인의 몸은 좀처럼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하에 수술이 정해진 것이었다.

“앞으론 네 말 진짜 잘 들을게. 널 업고 로우밸리까지 걸어가라면 그렇게라도 할게. 그러니까 넌 멀쩡히 눈만 떠. 알았지?”

쉴 새 없이 속삭여도 떨리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이 수술이 실패한다면 캐롤라인에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분명 성공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헌티드 백작 덕분에 문제점을 찾았고, 또 빠르게 개선했습니다. 가슴에 큰 흉터는 남겠지만 이외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헌티드 백작. 익숙한 이름에 애런의 입이 다물렸다. 사실상 이 수술이 완성된 데에는 프레져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었다.

“헌티드 백작은 지금 어디 있나요?”

캐롤라인의 수술에만 신경 쓰느라 그레타에 온 뒤로 헌티드 백작을 만난 적이 없었다. 프레져 역시 몸을 회복하느라 병실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술 전에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기에 의료진과 연구원들 외엔 출입이 불가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곧 여기로 올 겁니다. 많이 회복됐는지 어제부터는 걸어 다니기도 하더군요.”

“다행이네요.”

프레져가 처죽일 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죽으면 안 됐다. 그를 벌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캐롤라인이어야만 했다.

“저기 오는군요.”

리거웰 박사의 목소리에 캐롤라인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프레져는 한 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수술실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헌티드 백작님.”

애런을 발견한 프레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몸은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애런은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캐롤라인을 만나게 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말을 걸어도…… 됩니까?”

의식을 잃은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하는 프레져에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

프레져는 캐롤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그녀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아주 미약한 숨결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다. 아직은.

남들에게는 별로 대단하지 않을 사실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져서 프레져는 목이 멨다.

“생각만큼 아프지 않은 수술이야. 내가 먼저 받아 봤잖아. 그냥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캐롤라인의 귀밑머리를 넘겼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이제 곧 봄이야.”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꽃을 로우밸리에 심어 놨어. 지기 전에 보려면 당신이 빨리 일어나야 할 텐데.”

휘어진 눈 끝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캐롤라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훑어보다 그녀의 마른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궁금하면 꼭 일어나 줘. 아주 건강하게.”

* * *

캐롤라인의 수술이 진행된 날은 유독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그레타의 땅을 적신 비는 글랜포드의 수도, 휴링턴에도 여과 없이 내렸다.

대신관은 흰옷을 입고 경건하게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날이라 그런지 비가 오는 와중에도 분위기는 엄숙했다. 이는 국왕이 유독 살얼음판 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이것밖에 모이지 않았지?”

“그것이…….”

국왕의 노기 어린 물음에 보좌관은 난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족들 대부분이 헌티드 백작에게 지지를 표하고 있어…….”

프레져 헌티드가 기어코 심장 수술의 완성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에 백성들은 열광했고 국왕이 신전에서 집회를 연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현재 수도 곳곳에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국왕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귀족들도 등을 돌렸다. 그들을 더 오래, 건강히 살게 할 사람은 국왕이 아닌 헌티드 백작이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훗날 개발될 다른 수술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헌티드 백작 쪽에 붙어야 했다. 단체로 움직이면 벌하기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도 컸다.

“감히 왕실을 거부해?”

국왕은 평소보다 썰렁한 신전을 보며 이를 갈았다. 경건해야 할 신전은 사람이 적은 데다 비까지 내리는 탓에 음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럴수록 더 목소리 높여 기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국왕에게 다가온 이는 대신관이었다.

“신은 부정한 자를 벌하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곧 집회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이에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걷는 국왕의 뒤를 제럴드와 그의 신하들이 뒤따랐다.

“폐하!”

그런 국왕을 붙잡은 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근위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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