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17)화 (117/156)

#117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프레져는 이디나가 눈이 안 좋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린 이디나는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프레져에게 걸어왔다.

이디나를 부축하려던 프레져는 혹여 그녀가 자신과의 접촉을 불쾌해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디나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내어 주는 것밖에 없었다.

“내일 그레타로 떠나신다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디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백작님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캐롤이 아픈 것도 몰랐다는 걸 생각하면 욕을 한 보따리 해 줘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에 감사한 마음도 들고.”

“저를 용서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가 원하는 것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쇼.”

“내가 용서를 하고 말 게 있나요. 그건 전부 캐롤라인의 몫이지.”

캐롤라인이 혼수상태에 빠진 이후, 이디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애가 뭐라던가요?”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 했으면서, 캐롤라인은 왜 마지막 순간에 프레져를 찾아간 걸까? 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잊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

“잊어버려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해 달라고. 그리고…….”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프레져는 목에 힘을 줘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아쉽다고.”

“그 애는 아직…… 백작님께 하고 싶은 말이 남았나 보네요.”

프레져가 전한 말에 이디나는 무거운 숨을 뱉었다.

제 딸이 원한다는데 자신이 별수 있나. 원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이디나는 그리 엄격한 어머니도 아니었지만.

“떠나기 전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세요.”

예상치 못한 말에 땅에 처박혀 있던 프레져의 시선이 들렸다. 이디나는 부러 프레져 쪽을 응시하지 않고 있었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막겠나.”

“…….”

“백작님은 백작님이 하고픈 말을 하세요. 대답은 캐롤라인이 깨어난 후에 들으시고요.”

“어머님.”

“백작님도 캐롤라인도, 무사히 깨어나길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디나는 프레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프레져가 이디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으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프레져는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 끝에 캐롤라인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디나가 미리 말을 해 둔 모양인지 근처엔 간호사 한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마저도 프레져가 들어오자 자리를 비웠다.

이른 오후라 그런지 병실 안엔 햇빛이 가득했다. 초봄의 볕이 내린 병상 위에는 캐롤라인이 누워 있었다.

“캐롤라인.”

프레져는 조심스럽게 캐롤라인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나 그녀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랜만이야.”

그는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몇 주째 눈을 뜨지 못한 탓에 그녀는 몹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주위를 맴도는 햇빛도, 살포시 감은 눈도 너무 평화로운 까닭에 그녀는 꼭 잠든 사람처럼 보였다.

어깨를 흔들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데.

“잠든 사람한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얼른 일어나라고 해야 하나.”

프레져는 유난히 잠이 많던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이 억지로 잡은 아침 사교 모임에 가느라 비몽사몽 저택을 나서던 모습을.

빨리 일어나라 보채면 오히려 더 늦게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캐롤라인은 그동안 쉬지 못했던 걸 몰아서 쉬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그녀가 기분 좋게 잠에서 깰까 고민하던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좋아하는 말을 해 주기로 했다. 돈과 명예처럼 자신이 억지로 안겨 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프레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 봄이 오고 있어.”

추운 걸 싫어하는 캐롤라인의 얼굴이 점차 밝아지는 계절.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이 와.”

그녀가 사랑하는 작은 꽃들이 들판에 만개하는 계절.

“북부는 아직 이르지만…… 로우밸리엔 봄꽃이 잔뜩 피었을 거야.”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의 이름을 부르면 눈을 떠 줄까? 프레져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우유 아이스크림을 먹던 캐롤라인을 떠올렸다.

“로우밸리엔 아이스크림을 닮은 목련이 많다며.”

목련이 질 때면 꼭 아이스크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하던 목소리까지도.

“아쉬워하진 마. 목련이 지면 철쭉이 필 거고, 철쭉이 지면 당신이 좋아하는 아네모네가 필 거니까.”

프레져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한낮의 따스한 봄바람이 작은 틈을 넘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캐롤라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한 아름 피워 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꽃이 피면 그땐 꼭 보자.

* * *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 패트릭과 베카는 프레져를 배웅하기 위해 기차역에 나와 있었다. 모아는 아직 잠이 깨지 않았는지 패트릭의 품에 안겨 눈을 비비고 있었다. 손에 쥐어진 봉투엔 마시멜로 두 덩이가 들어 있었다.

“무탈하길 기원하겠습니다.”

“캐롤라인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희가 잘 돌볼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레져는 부부와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새 잠이 깼는지 모아도 프레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아조씨, 얼른 도라와야 해요. 업쓰면 모아가 심시마니까. 알아쬬?”

“그래.”

“설마 아조씨, 주사 마꼬 애기처럼 우는 거 아니죠?”

“글쎄. 맞아 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군.”

“헤엑! 아조씨 애기다! 다 큰 어르니 그런 거로 울면 어뜨케요!”

프레져는 옅게 웃으며 모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과장되게 놀라는 아이의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모아는 프레져를 놀리는 대신 손에 든 봉지 안에서 마시멜로 하나를 꺼냈다. 베카의 철저한 단속하에 하루에 두 개밖에 먹을 수 없는 비운의 간식이었다.

“이거 줄 테니까 울지 마라여. 우러도 이거 머그면서 뚝 그쳐여. 아라쪄?”

모아가 간식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기에 프레져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두 개밖에 없는데. 나를 줘도 괜찮은 건가?”

“엉엉 우는 거 보는 것보단 낫쬬. 자, 얼른 바다여.”

프레져는 모아가 건넨 마시멜로를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만큼이나 마음이 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캐롤라인이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프레져는 웃었다.

“그래. 다음에 봤을 땐 너도 커 있었으면 좋겠군. 앞니도 좀 자라 있었음 좋겠고.”

“피이.”

모아의 입술이 오리처럼 앞으로 나왔다. 앞니를 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가 자라지 않은 탓이었다.

프레져는 모아에게 받은 마시멜로를 새끼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뜯어 아이의 텅 빈 잇몸에 갖다 댔다. 끈적거리는 마시멜로는 침에 녹아 모아의 잇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렇게 말이다.”

“이러케?”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아는 승강장 기둥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곤 활짝 웃음을 지었다.

“헉, 진짜 이빨 가타!”

모아는 하얗고 말랑말랑한 앞니를 뽐내며 웃었다. 아주 화사하게.

그사이 경적이 울리고 플랫폼 안으로 기차가 들어왔다.

“그럼 가 보십쇼.”

“네. 다들 건강히 잘 지내십쇼.”

“꼭 무사히 다시 뵀으면 좋겠네요.”

머지않아 프레져는 홀로 기차에 올라탔다.

“아조씨, 빨리 돌아와서 모아 이빨 구경해야 돼여?”

“그래. 얼마나 자라 있을지 기대하도록 하지.”

“헤헤. 아저씨, 안녕! 또 만나요!”

모아의 밝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기차가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철저한 보안 속에서 대수술의 막이 올랐다.

* * *

“수술 경과는?”

“아직까진 좋습니다. 환자가 워낙 건강하기도 하고요. 인공 판막도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니콜라이는 젊은 의사의 보고를 들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글랜포드 왕실을 피해 몰래 수술을 하는 것이었으니 보안이 중요했다. 그 탓에 프레져는 고위층이 사용하는 고급 병동이 아닌, 실험실 옆에 붙은 병실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커튼 하나 걷을 수 없는 탓에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바로 옆에 연구진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적용되는 곳이었다.

“이르면 내일 오전 즈음에 의식을 회복할 겁니다.”

“예상보다 늦군.”

“아무래도 수술 중에 문제가 있었으니…….”

멀쩡히 뛰고 있는 심장에 칼을 대는 것은 섬세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 탓에 수술에는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니 회복이 더딘 건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혈전이 생길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 잘 지켜봐라.”

“네.”

또 한 가지 새로 알게 된 점은 마광석을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에 넣을 시 혈전이 생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헌티드 백작은 평생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할 터였다.

“그러게 왜 멀쩡한 가슴을 가르겠다 나서 가지곤…….”

니콜라이가 나간 후, 병실에 혼자 남은 젊은 의사는 프레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혈전을 막아 주는 약은 심장병을 앓는 환자라면 당연히 복용해야 하는 것이지만 멀쩡한 사람에겐 전혀 필요가 없는 약이었다.

앞으로 몸에 좋을 거라곤 하등 없는 약을 평생 먹어야 할 텐데 왜 이 짓을 나서서 한 건지. 의사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헌티드 백작 정도라면 스스로를 대신해 실험에 참여할 사람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만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건가?”

그럴 거면 이혼은 왜 한 거래?

힐끗 프레져를 내려다본 의사는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곧 아내분, 아니, 전 아내분 오신답니다.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십쇼.”

사랑의 힘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헌티드 백작도 알아서 눈을 뜨겠지. 의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프레져의 손가락이 움찔거리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의사가 자리를 비운 뒤부터였다.

0